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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Sep 03. 2021

굿바이 7

올리브 나무 사이로



 

"오빠, 나 정아... 귀 변태니까, 내 목소리 잊은 거 아니지? 오빠 번호... 지웠는데... 공순이라 그런가 2년이 넘었는데도 숫자는 잘 잊혀지네. 번호가 그냥 눌러지더라...  청첩장 보내는 건 아닌 것 같고 어차피 알게 될 거 다른 사람 통해서 듣게 만드는 게 싫었어.


결혼한다, 나. 거봐, 그럴 줄 알았어. 속상하게, 아무렇지도 않지...  이제와 얘기할 거 있는데. 정훈이 오빠가 말 안 했지? 사실 나 오빠 꼬시려고 영화동호회 들어간 거야. 헐리웃 영화 좋아하는데 아닌 척하느라고 애썼어. 오빠랑 영화 보면서 졸았던 거... 실험 때문에 피곤한 게 아니라 정말 재미없어서 잔 거야. 아니 그전에, 이공대 도서관 놔두고 중앙도서관에 가서 기웃거린 것도 다 의도적인 거였어. 정훈이 오빠한테 물어봐서 그 앞자리 맨날 먼저 가서 앉아있었던 거야. 오빠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해서 단발머리로 자른 거고.


내가 오빠 먼저 좋아했고 더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던 거야. 그때 설명 잘 못해서 미안해. 오빠가 안 잡을 거 알아서 말해주기 싫었어. 그때, 잡아줬으면 달라졌을까 많이 생각했는데. 오빠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도서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확실한 답이더라고. 오빠, 나보고 맨날 씩씩하다고 그랬잖아? 나... 힘세지 않아. 그냥 보통 여자애였어.


있지, 이제는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말해주는 거야. 근데... 오빠 이제 사랑한다는 말은 잘 못한다. 나는. 그러니까 쪼금 고장 났으니까... 정훈이 오빠 통해서 축의금 보내. 알았지? "  




*                *                *               *




2003년은 아직 고속열차가 개통하지 않았다. 부산까지는 4시간 10분. 남포동에 도착하면 오후 7시가 넘을 것이다. 서울역을 빠져나간 열차가 철컹거리며 한강 철교를 지날 때 상훈은 몇 년 전 정아와 함께 봤던 영화를 떠올렸다.



모래먼지를 뒤집어쓴 채 언덕을 돌고 돌아 걸어가는 소년 '아마드'의 모습이 보인다. 고개를 쳐들며 애처롭게 길을 묻는 작은 아이의 질문에 어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의 잘못이라면 오늘 숙제를 해오지 않아 꾸중을 들었던 '네마자데'의 공책을 그만 내 가방에 넣어온 것뿐인데. 공책을 돌려주는 길은 멀고 힘겹다. 올리브 나무 사이를 헤치며 낯선 동네를 찾아갔는데 아무도 네마자데를 모른다. 오후 내내 모르는 집 문 앞에서 답 없는 질문을 던지다가 돌아왔는데도 아이의 사정이 궁금하지도 않은 가족들은 심부름만 시킨다. 그런데 마침 집 앞 골목에서 자기 아들 이름이 네마자라고 말하는 어른이 나타난다. 다시 한번 희망을 품고 쫓아간 다른 마을. 네마자데라는 이름의 아이가 한둘이 아니다.  헤매고 다니느라 해가 다지고 밤이 되어버린 하루의 끝. 공책을 펼친 아마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늦은 숙제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날 숙제 검사 시간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친구에게 그의 숙제까지도 말끔하게 끝낸 공책을 건넨다.


착한 아이는 고생한다. 희망을 품은 아이는 더 고생한다. 청새치를 잡으러 바다로 갔던 노인처럼,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처럼 그 끝은 온통 기진맥진이다. 언제나 그렇다. 몸과 마음은 애쓰면 쓸수록 고달프고 서러우며 세상은 무심하고 잔인하다. 이 이야기가 좋은 걸까.




상훈은 감정이 복잡할 때마다 문자 속으로 피신하는 버릇이 있었다. 가방에 들어있던 복사 자료를 꺼냈다.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여러 시민사회단체의 명단과 그 발표된 연설문의 내용, 신문 기사의 스크랩. 논리는 다양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명분 없는 전쟁에 명분 없는 파병. 무의미한 희생의 가능성을 차단하라.  


콜린 파월은 뻔뻔했다. 표면적인 이유로 제시한 생화학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 살상 무기의 미국 본토의 타격 가능성은 낮다. 이라크에 대한 공분 유도는 당사자인 후세인뿐 아니라 미국 내의 전직 CIA 요원들조차 여러 차원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테러 주범으로 지목된 알-카에다와 이라크의 테러 조직 간 연계설도 찬찬히 논리를 따져 올라가면 미국이 자처한 결과였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수파였던 수니파의 수장들을 주요 정치세력으로 키운 건 오직 미국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센터를 무너뜨린 그 참혹한 테러의 장본인으로 주목된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의 도움으로 성장한 탈레반의 수장이다. 1980대 아프가니스탄에 시아파 친소정부가 들어섰을 때 그들과 싸웠던 것이 수니파의 탈레반이며 미국 CIA가 그들의 뒤를 비호했던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장기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던 소련 정부의 패배는 미국의 승리였고,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과도 주요하게 연결된다. 오사마 빈 라덴,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도움으로 성장한 수니파의 수장들이다. 그렇게 성장한 후세인의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태도를 바꾼 것이 부시의 걸프전이었고. 이에 대한 반감이자 처절한 응징 911이라는 전대미문의 미국 본토 타격이었다.


어리석은 전쟁에 대한 참혹한 응전. 산유국들 사이의 이간질로 존재감을 유지하는 월드 깡패 부시의 전쟁놀이에 한국이 참전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2003년 봄 대한민국 국회는 국군부대의 이라크 전쟁 파견 동의안을 사뿐하게 통과시켰다. 비록 아랍 저항단체에서는 이 부대를 이라크에서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9월이 되자, 제21대 미 국방부 장관인 도널드 럼스펠트는 다국적군의 일원이자 동맹국의 자격으로 더 많은 수의 군인을 추가 파병해줄 것을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이제 막 임기를 시작한 젊은 대통령은 전후 지역 복구라는 평화적 명분을 챙기려고 했다. 파병은 파병이었다. 하지만 대머리 보좌관은 단호했다.



"시민단체는 언제나 시민단체의 말을 하는 거고 국회는 또 국회의 일을 해야죠. 아마... 연말에 조사단을 파견하말이 나올겁니다. 이럴 때 위험을 감수하는 게 나쁠 건 없습니다. 특히 여성의원이라면 더."


*                *                *               *



"꼭 필요하다는 게 이거 때문이었어요?"


"그럼...  뭐, 머리 쓰는 일일 줄 알았어요?"


남포동 부산 극장 앞에 도로에 마련된 간이 부스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는 상훈에게, 덕주는 수영복 심사에 나온 미스코리아들이 매는 노란 리본띠 같은 것을 둘렀다. 앞쪽에는 <시네마테크 살리기>, 등 쪽에는 <사랑의 펜을 모아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 계속









그거면 되요 ... 호피폴라

https://www.youtube.com/watch?v=C5t8M2P5liY


"왜 마흐말바프라고 거짓말을 했습니까?”

"그분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화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전 걱정이 생기고 우울해지면 뭔가를 필요로 합니다. 제게는 가슴속의 분노와 슬픔을 들어주려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제 고통을 표현해주는 좋은 사람을 찾게 됐습니다. 바로 마흐말바프 감독님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영화를 자꾸 보게 됐습니다.” - 영화 클로즈업(압바스 키아로스타미)중, 사브지안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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