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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Feb 27. 2019

청소를 배웠습니다


"이거, 저랑 같이 해요"


침대보의 한끝을 잡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퀸사이즈 매트리스를 나란히 붙여 만든 커다란 침대의 반대편에서 날렵하게 다가오더니 양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왼쪽 가슴 위 편에 달린 이름표에는 영어로 '루비'라고 적혀있었다. "두 잇 투게더. 그냥 저랑 같이해요" 그녀는 내 입모양을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가로젓고는 "메이요, 메이요" 하면서 손에 걸린 시트의 자락을 휙 뽑아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돌아 엉덩이로 나를 밀어내고는 시트를 접어 침대 모서리 밑에 끼워 넣었다. 나는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창밖에는 양동이로 들이붓는 것 같은 엄청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시간에 맞춰 수영장이든 사우나로든 나가서 자리를 비웠을 테지만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벌써 2주 전부터 누군가 서랍에 캡슐커피와 초콜릿, 오렌지나 바나나 따위를 몰래 더 챙겨 넣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캡슐커피는 초록색과 파란색만, 초콜릿은 아몬드가 없는 걸로. 다 먼저 먹어버려 비었던 아이템. 내 취향. 책상 옆 미니 바에 위에 호텔에서 매일 교체해주는 일정량의 차나 초콜릿과는 별도의 선물이다.  

 

"셰셰"


서랍에서 오렌지를 꺼내 보이며 작게 말했다. 이 방으로 바꾸기 전에는 아침마다 식당에서 하나씩 훔쳐와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화장실 쪽으로 청소 트레이를 끌고 가면서 못 들은 척했다. 화장실, 파우더룸, 드레스룸, 욕실이 각각 분리되어 일자로 이어져 있는 호텔방의 두 번째 공간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여기저기 놓여있던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챙겨 넣고 한 공간씩 차례대로 청소해나갔다. 화장실을 청소할 때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는데 변기 뒤편의 벽까지 손을 넣어 닦는 모습에 약간 숙연해졌다. 휴지 끝을 세모꼴 모양으로 접어 각을 잡고, 거울까지 반들반들하게 닦고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음 공간에서도 투숙객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청소를 마무리해나갔다. 나는 분주히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유독 꽉 묶인 앞치마의 매듭을 따라 가만히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욕실에는 지난밤 손으로 빨아둔 여성용 속옷과 양말, 여름 티셔츠가 널려 있었다. 남편은 호텔의 세탁 서비스를 이용하라고 했지만 공짜 숙박도 모자라 세탁 서비스까지 맡기는 건 남편 회사에 너무 염치없었다. 껄껄 웃으면서 다 포함된 비용이니 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남편의 말보다는 세탁된 옷을 받으면서 딸려온 영수증이 잊히지 않았다. "양말 한 켤레 빠는 게, 당신 양말 값보다 더 비싼 것 같아" 그렇게 시작된 손빨래. 욕실 한면은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밖에서는 안쪽이 안 보인다고 하지만 들어갈 때마다 민망다. 게다가 이렇게 빨래를 널어놓은 것이 왠지 호텔의 품위를 떨어뜨린 것 같아 머릴 긁적거렸다.


널린 빨래는 못 본 척 욕실 바닥의 물기까지 완전히 닦아내고 난 후에야 그녀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이마 옆 관자놀이에서 작은 물방울이 반짝 빛났다. 잰걸음으로 청소 트레이로 돌아가더니 바구니 옆주머니에서 캡슐커피 다섯 개와 오렌지 하나를 꺼내왔다. 그제야 눈을 맞추며 내게 웃었다. 루비, 그녀 이름.  



*   *   *   *   *   *   *

 


밤톨같이 짧은 머리에 운동화, 막 조깅이라도 다녀 온 사람처럼 가벼운 트레이닝 차림의 S가 로비에 앉아 있었다. 어느 호텔에 언제까지 있을 거냐는 간단한 질문 후에, 정말로 일정을 맞춰서 날아온 것이다. 사실 서울에서도 못 본 지 꽤 오래. 제일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정작 친구들이 모일 때 잘 나가지 않았다. 단 둘이 만날 수도 있었지만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만나지 못했다. 반가웠다.


처음으로 택시를 탔다. 말을 못 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S에게는 익숙한 듯싶었다. 그가 묶는 곳은 해변이 보이는 휴양 호텔로 시내 한복판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바닷가를 걸었다. 최근에 본 영화. 뉴욕에 사는 한 노장 피아니스트의 작은 방에 대해 얘길했다. 에단 호크가 감독을 맡았다고. S는 정작 피아니스트 이름은 까먹었다면서 피식 웃었다. 몇 년째 우쿨렐레를 배우고 있는데 출장 올 때 가지고 와서 밤중에 친다고도 했다. 누구 들려줄 수준은 아니고 그냥 혼자 만지는 건데 심심할 때 그만한 게 또 없단다. 청승맞게 보이는 단점을 빼면 소리가 작아 아직 민원은 없단다. 그런 얘기를 하는 그녀의 옆모습이 좋았다. 살짝 꺾인 높은 콧등의 각도나 옅은 주근깨가 처음 만났던 때와 변함없었지만,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에단 호크에 견줘도 밀리지 않는 중년이다.



*   *   *   *   *   *   *



"내가 걔를 좋아해"


스무 살의 좀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S가 웃으면서 답했다. "걱정 마, 걔 안 좋아해. 네버. 따로 한번 만난 건 사실이지만 나랑은 전혀 안 맞더라고." 1년째 품었던 조바심, 화끈거리는 심장을 꺼낸 것에 대한 대답. 허탈삼각관계의 . 갑자기 집 앞까지 찾아간 내게 S는 잠자리를 주었다.  그녀의 방에서 정수리를 맞대고 누워 밤새도록 떠들었다. S는 그녀나름의 첫사랑 진행중이었다.


둘 다 추억할만한 사건이 많지 않은 처음이었지만 그 연애의 미련이 길었다. S는 그녀의 스타일로, 나는 내 방식으로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온기가 배 안쪽 뒤편 어딘가에 남아있다.


S에게도 나에게도 그 후로 몇 번은 더 인생의 비밀을 가르쳐 준 고마운 인연이 나타났고, 떠올리면 콧구멍에 힘을 주며 웃음을 참아야 하는 추억이 있다. 불꽃같은 심지를 스스럼없이 공유했고 굳이 손을 대서 가장 시리고 날카로운 자기 그림자의 칼날에 베었다는 것을 안다. 인생 첫 고백고는 분에 넘치는 응답을 해준 S다.    


 

*   *   *   *   *   *   *

 


호텔에서 특별히 준비해준 저녁 식사는 광둥식 코스요리. 첫 번째 지느러미 수프를 다 마시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그 통화가 1시간이 넘도록 이어질 줄은 몰랐다. 식사를 시작한 남편을 자리에 남겨두고 인터넷이 잘 터지는 로비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을 때는 식은 수프만 남아있었다.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나비넥타이의 웨이터가 다가와 이십 분 전에 일행 분이 방으로 올라가셨다고, 나머지 식사는 혼자 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다음 요리는 뭐죠?"


이런 코스요리를 언제 또 먹어보겠나, 혼자서라도 먹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향신료 때문인 건지, 갑자기 콧물이 나왔다. 멈추지 않는 콧물 때문에 시야까지도 흐릿흐릿한 게 앞이 잘 안보였다. 결국 조용히 일어서 식당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그냥 서있었다.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나를 가로질러 열린 엘리베이터 문안으로 들어갔고, 한참 동안 눈치를 보다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몰랐던 게 아니잖아.' 설마 했던 결국 그게 발목을 잡았다. 항상 설마 하던 바로 그게 지뢰였고, 항상 그 지뢰에 발목이 날아가버렸다.   



*   *   *   *   *   *   *




남편은 아르바이트를 반대했다. 할만한 일의 기회를 잡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쉬고 재충전하는 게 낫다. 맞는 말. 하지만 돈이 필요했다. 십 년 넘게 넣고 있는 이런저런 보험과 저축 상품들, 하다못해 휴대폰 유지비 같은 자질구레한 비용과 부모나 친구, 가족의 경조사에 사람 노릇 할 돈까지 남의 주머니를 빌리기는 싫었다.


방송국은 더 싫었다. 진지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떠나고, 비겁함을 묵인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약간씩 경멸하거나 의지하는 사람들만 남았을 텐데. 존경하고 사랑했던 이들이 종종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모습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정의로움에 대해 그리 민감한 사람도 아닌데, 기회를 노려 뭐든 챙기려는 맨들맨들한 눈빛만 자꾸 목을 할퀴었다. 물론 필요 없는 걱정. 순전히 능력 문제만으로도 다시 기회를 잡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법륜스님은 말씀하셨다.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면 돼요. 남들보다 돈을 더 적게 받고 더 힘든 일. 그런 일은 널리고 널렸어요."


작가가 필요한 곳은 언제나 있다. 기업이나 자치 단체의 홍보나 교육용 콘텐츠. 중앙정부의 각 부처가 만드는 스폿 광고, 지역방송이나 종교방송의 특집 다큐. 이미 제작된 국내 방송 및 영상 콘텐츠를 해외에 팔기 위해 만드는 또 다른 광고용 스팟, 게임업체나 스타트업, 혹은 중소기업이 웹상이나 업계에 돌리려고 만드는 홍보 콘텐츠 등등...  이런 작업의 특징은 십 년 이상 경력의 중견작가를 필요로 한다고 공고하면서도 그들이 응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원고료를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일회성, 단발성 작업이라 경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업체가 원하는 작가를 구하기는 어렵다. 작업에 조인한 연출자들 역시 같은 처지. 설령 유능한 사람이라고 해도 고객이 원하는 만큼 진지한 열정을 끝까지 유지하기는 힘들다.


영상작업에 대한 이해가 없는 고객일수록 모호하고 까다롭다. 1,2차 시안이 운 좋게 통과된다고 해도 작업 중간중간 이런저런 어이없는 주문과 태클이 끼어들어와 방해한다. 고객과 제작팀 사이를 조율하는 피디나 업체가 안일할수록 연출이나 작가 중 누구 하나는 지쳐서 떨어져 나간다.


고난의 줄거리는 파악했다. 그러니까, 나만 잘하면 된다. 돈만큼만 고민하고, 돈만큼만 일한다. 처음엔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돈의 기준으로 판단하니까 설명할 수 없는 선명한 기준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그 선을 놓쳐버렸다. 적어도 아르바이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로 나를 대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는데, 일꾼 노릇에 정신이 팔려 그를 내팽개쳐 둔 것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돈만큼만 일한다는 게 가능한 발상이었을까.


*   *   *   *   *   *   *

 



S가 도시를 떠나기 전날에 한번 더 만났다. 그녀의 동료들과 남편까지 합류해서 왁자하게 한잔씩 마시고 돌아왔다. 그날 밤부터 왠지 열이 나서 며칠 동안 심하게 앓았다. 다음 날 호텔 지배인에게 부탁해 얻어온 현지의 약은 너무 독해서 먹은 것은 물론이고 내장까지 게워내도록 만들었다. 잠을 잤는지 기절을 했는지 모르는 낮과 밤을 보냈다. 청소 서비스는 받지 않도록 남편이 룸 사인을 문고리에 걸어두었다. 다음날 아침, 누군가의 체온이 이마를 만지는 것을 느꼈다. 이내 차가운 수건이 이마에 닿았다. 당연히 남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녁때 물어보니 그는 아니라고 했다.


앓고 나자  돌아가고 싶어졌다. 몇 번의 긴 비가 그친 후 시작된 이 도시의 여름은 대단해서 호텔 밖을 나가면 숨이 막혔다. 이미 지하철을 타고 가볼 수 있는 관광지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히 3개월의 비자 만료기간 때문에라도 돌아갈 항공편을 알아봐야 했다.


호텔 직원의 도움으로 싼 표를 산 일요일 오후, 나는 마침 2층 연회장에서 열리던 결혼식 피로연을 멀찌감치 팔짱을 끼고 서서 구경했다. 하객을 위해 스파클링 와인을 따라주는 사람 중에 아침마다 식당에 앉아있는 내게 영자신문을 가져다주던 청년이 있었다.


영자 신문까지 읽을 의지는 전혀 없었지만, 오래 앉아있으려면 뭐라도 펼쳐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 청년이 주는 신문을 받아, 읽는 척을 했다. 그리고 블랙퍼스트 서비스가 끝날 때까지 사람들을 구경했다. 특히 허리를 곧게 펴고 한 손에는 커피포트나 주스병을 들고 테이블 빈 잔을 채워주는 지배인의 무브먼트는 무용수처럼 우아했다. 아침 식사를 하러 온 손님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일주일씩 돌아가는 식단의 루틴은 일정했다. 일식 요리 옆에는 항상 작은 김치보시기가 있었는데, 내가 식당으로 들어가면 그쪽 직원 중 누군가가 김치보시기가 비지 않았는지 한번 더 살핀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며칠 결석 후의 첫 아침식사. 지배인은 내 테이블로 와서 따듯한 게살 수프를 먼저 먹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미 두 달 넘게 하루 종일 건물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기웃거리고 다니는 나의 신상에 대해서 호텔 안의 직원들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   *   *   *


떠나기 전날, 루비를 만나고 싶어서 일부러 청소시간을 기다렸다. 성가시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화장실이며 욕실 청소도 미리 대충 해두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청소용 트레이를 밀고 온 것은 루비가 아니었다. 손짓 발짓으로 루비의 안부를 물었는데 못 알아들었다. 나는 실망해서 침대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창밖에 나무들이 처음 호텔방에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이파리가 펄럭 펄럭 창문을 때렸다.  



오렌지를 넣어두던 서랍 안에, 별로 많지 않은 금액의 팁과 한국어로 쓴 편지 한 장을 남겨두었다. 그 도시 외곽에 있는 대학을 구경갔다가 소나기를 피하려고 들어간 학교안의 미용실에서 머리 한 얘기를 썼다. 당신처럼 단발머리로 잘랐다고.



*   *   *   *   *   *   *



얼마 더 호텔에 머물렀던 편이 체크아웃 하는 날, 혹시 두고 오는 건 없는지 한번 살펴봐 달라고 했다. 그는 서랍 비어있다고 말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VyVFYBxGiU

왠지 자꾸 시선을 강탈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님

김목인 - 꿈의 가로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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