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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Feb 22. 2019

청소를 좋아합니다


 "저한테는 변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하지만 좋든 싫든 결국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 무엇이 힘든지의 고백을 듣는 것은 의뢰인 자신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정인 듯싶다. 고개를 끄덕이지만 적정한 선에서 다시 한번 같은 말로 맥을 끊을 수밖에 없다.


간혹 머쓱해진 상대방이 "그런데 왜 도와주시려는 거예요?"라는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한다. 도움을 요청해서 왔는데요,라고 말하는 게 정답이겠지만 좀 더 진심을 담아 대답한다. "제가 좋아해요. 청소와 정리를요"

이쯤에서 상대방은 아! 라며 놀라거나 어머! 라며 웃는다. 어쨌든 나도 같이 웃는다. 이렇게 고백의 시간에도 쉼표 하나가 지나간다.


청소와 정리를 좋아한다. 그의 말을 자르려고 찾아낸 변명이 아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더 길게 이어갈 수도 있기는 하다.


나는 쉬운 청소와 즐거운 정리를 좋아한다. 

매일 아침 베개에서 남편의 코딱지를 찾아내는 일. 깨끗해 보이는 빈방에 마른 밀대 걸래를 밀고 다니며 스케이트 타는 일. 화장실 바닥을 물청소하며 머리카락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털을 수압으로 밀어내는 일. 별일 없이 잘 보관되어 있는 그릇들을 크기와 모양 색깔로 다시 분류해서 자리를 바꿔보는 일. 책장에서 책 두어 권을 뽑아내... 여행가방에 던져놓는 일(여행지에 두고 오려는 계획. 하지만 여행은 못 떠나고 가방에 책만 쌓여서 그대로 끌고 나가 재활용장에 버린 적이 있다). 속옷과 양말을 꺼내서 토너먼트로 탈락자를 골라내고, 탑텐을 다시 색깔별로 분리해 각을 세워 놓는 일. 새로 나온 청소용 세제를 실험해보는 일 등등... 한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좋아한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좀 더 개인사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나는 먼지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다. 발작적인 재채기와 콧물 때문에 계속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해서 감기약을 달고 살았다. 그게 알레르기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나서는 왠지 모를 배신감에 항히스타민제를 소주처럼 마셔댔다.


동시에 나는 창의성과 효율성이라는 단어에 꽂힌 70년대생 어린이였다. 집안에서도 다양한 실험 했는데, 예를 들어 내 방에 서있던 2열의 키다리 책장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의 도움을 받아) 창가에 가로로 눕게 되었다. 누워있는 책장은 일반적인 판형보다 큰 악보집이나 화보집을 정리하기에 딱 좋은 크기가 되었고, 한동안 창가에 앉아 책을 볼 수도 있는 벤치 역할도 맡았다. 그 책장을 엎어두고 위에 매트리스를 깔아서 침대로 써보려고 했다. 물론 멀쩡한 침대 놔두고 무슨 짓이냐는 타박 때문에 원상 복귀해야 했지만.


이런 식으로 집안의 가구나 물건, 옷이나 살림살이를 아무 데로나 옮겼다. 그리고 그 뒤에 먼지를 닦고 동전을 찾아냈다. 모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엄청난 괴력의 소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어지른 것을 치우는 실력만큼 망가뜨린 것을 숨기는 능력도 커졌다. 바쁜 부모는 무엇이든 물건들이 자리를 찾아들어갔다는 것만으로 딸을 대견해했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창의성을 발휘한 것이다.


"저는 사회에서... 효율을 높이는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결국에는 이런 대답에 이르고야 말았다.

고3 진학상담시간.

질문이 "너는 사회에 나가면 어떤 일을 하고 싶니?" 였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효율.. 창의... 음... 그래, 중요하지. 사회학과 어때?"


말문이 막혔다. 사회에서 라고 물어봐서, 사회에서 라고 대답했는데 사회학과에 가라니. 이건 너무 함정인데?


"... 그래. 사회학과는 뭐랄까. 너무... 광범위할 수도 있겠다. 효율, 효율.... 경제학과? 경영학과?... 창의적이라면.... 정치외교학과?"


그래서 정치외교학과에 간 사람이 나다. (대학 면접 때 같은 답변을 해서 피식 비웃음도 샀다. 차남희 선생님 건강하시죠?) 우리 사회에서 효율을 높이는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으나, 아뿔싸 졸업하자 백수행.


돌고 돌아 "우리 사회에서"까지는 몰라도, 생활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면서도 창의성이 필요한 일중에 하나가 청소와 정리다.


이 것을 이렇게 쓰는 게 맞는지.

이 것을 이렇게만 써야 하는지.

이 것이 여기 있어야 하는지.

이 것이 있어야 하는지.


청소와 정리 과정에는 이런 식의 질문들이 계속된다.


가족이 있다면 질문은 확장된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지. 그에게는 이것이 필요한지. 그를 배려하는 최적의 생활 조건은 무엇인지. 혹은 공용의 공간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까지도.


그래서 나는 청소와 정리가 좋다. 같은 질문이라도 다른 물건들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질문이 되고, 다른 공간이기 때문에 지금 나는, 우리 가족은, 타인은,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고 확인해야 한다. 철학이 현실과 만나는 예리한 푼쿤툼이고, 책임이 따르는 결정의 연속이다.


청소와 정리를 좋아한다.

이것 말고도 이유를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의뢰인들에게도 이유 따윈 말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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