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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Jul 19. 2021

잘했지만 후회한다

돌멩이 하나

"... 그냥 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라고, 알고 있을게"

"...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 야, 그래. 뭐? 그럼 안돼?"

"ㅎㅎ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알고 있을게."


그녀가 수화기 저편에서 까르르 웃었다. 기분을 좋게 하는 밝은 웃음이었다. 따라 웃었는데 전화를 끊은 오후 내내, 집중력이 떨어졌다. 같이 웃었다는 게 귓불을 화끈거리게 했다. 심호흡 세 번 하고 창가에 서서 보면서 기지개도 한번 켜고, 벽에 팔 굽혀 펴기도 했다. 이런 기분은 흘려야 되는 것도 알고, 기분이라는 게 놔두면 그냥 지나가는 것도 안다. 근데 그러지 못하고 퇴근하려고 노트북을 가방에 넣다가 결국 터져 나왔다. '... 여시 같은 게. 사람을 놀려?'


처음도 아니다. 올해 초 계절이 이제 막 끝나던 참에 퇴근길 공원을 걸어오는데, 연두색 초록이 아련했다. 문득. 궁금했다. 잘 사는지, 목소리 여전한지. 진심이었고 또 핑계였지만 어쨌든 나는 이제 편안하니까. 편하게 전화 걸어서, 한마디도 절지 않고 다 받아칠 자신감이 갑작스레 피어올랐다.


수년만의 통화인데도 어제처럼, 그녀는 밝고 상냥했다. 주말이면 "차박"이라는 걸 한다는데. 왜 허리 편한 숙박시설 다 놔두고 차에서 자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게 요즘 트렌드라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왠지 모르게 '안심'되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잘 살고 있구나. 나와는 다른 세상에. 그러기를 바랐다. 나와는 다른 우주, 멀고 먼 곳에서 잡히지 않는 별처럼 살아가길. 세월이 훌쩍 지나갔으니 그녀와 나의 세상이 전혀 다른 축을 기점으로 돌면서 멀어지고 멀어지다가 그래도 행성들이 그렇듯이 잠깐, 20년에 한 번 정도 만나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 야, 처녀가 유부남을 왜 만나? 난 안 만나줄 건데?"

"... 뭐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 단둘이 보자는 것도 아니고. 야... 너는, 무슨 말을... 야. 됐어 됐어. 무슨 너 지금, 처녀라고 유세하냐?... 유부남도 요즘엔 노처녀 안 만나. 참. 성격 이상해졌다. 너..."


당황했다. 그 입에서 '유부남'이라는 단어로 정의된 내가 가방을 모로 멘 채 가로등 밑에 서 있었다. 맞는 말인데 그게. 순간 "유부남"이라는 짧은 단어로 정의된 나는, 은하계 저편에서 다시 그녀와는 영영 닿을 수 없는 검은 블랙홀로 멀리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궤도는 이쪽이야,라고 선장이 고개를 획 잡아 돌렸다.



*     *     *     *


그녀를 처음 본 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강당 뒷좌석을 차지했을 때는 이미 영상의 1/3쯤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딱 봐도 초보티가 역력한 학생 연기자들이 카메라 동선과 엉키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너무 엉성해서 '다음 장면은 어쩌려고 저러지?'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다음 장면도 그 다음장 면도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아수라장. 처음에는 황당해서 큭큭거리다가, 나중에는 소리를 내서 껄껄 웃게 되었다. 그 패기와 엉망진창이 신선했다. 연출자라면서 강당의 한가운데로 부드러운 곱슬머리를 한 작은 체구의 여자애가 사뿐히 올라왔을 때. 갑자기 펼친 커튼 때문이었는지, 그녀가 (나를 향해) 웃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주변이 환해지고, 심장이 빨라졌다. 이게 반한다는 건가.



두 번째 그녀와 나란히 앉았던 날도 기억한다. 해지는 오후였고 수업의 거의 다 끝난 강당 앞마당은 조용했다.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커피를 홀짝이다가 귀여운 곱슬머리마저 웃고 있는 것 같던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혹시 나좋아하냐?"

미소가 멈췄고 좀 놀라는 것 같았다. "...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아니, 나한테 잘해주길래... 혹시 그런 건가 싶어서..."

 

정중했기 때문에 더 아팠지만 대답을 전혀 예상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웃 모두에게 웃었다. 알고 있었다. 마음 졸이기 전에 먼저 물어보는 게, 데미지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었다. 한번 쪽팔리더라도 착각을 깨는 확실한 길이었고, 오해가 커지기 전에 빨리 처리하는 것도 내겐 중요했다.



'그럼 그렇지. 여우 같은 것.' 엉덩이를 툭툭 털며 나는 이제 맘 편히 그녀를 미워하기로 했다. 저리 예쁘게 웃으면서 다정하게 귓불에 작은 숨을 속삭이며 챙길 걸 잘 챙기는 아이들은 내 대기권 밖의 사람이다. 바라볼 수 있지만 따라 할 수 없는 영리한 능력자에게... 한 명의 안티 정도는 괜찮겠지. 빠르게 식어버린 마음 때문에 적극성은 좀 떨어졌지만, 남은 시시한 학창생활에서 작은 심술이라도 부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녀가 입방아에 오르는 테이블에 앉을 때마다, 바닥에 '퉷'하고 침을 뱉는 것으로 그 봄날 오후, 내 무안함에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녀를 세 번째 만난 날도 기억한다.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던 그녀와 졸업 후에 단둘의 만날 수 있다는 게 새로웠다. 나는 이미 취직해서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으니 그녀에게 밥 한 끼 맘 편히 사줄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도 좋았다. 아무리 거지 같은 회사라도 월급이라는 걸 받다 보면 쭈굴쭈굴해지던 어깨가 조금은 펴지는 날이 오는구나.  


건네받은 시나리오는 사실 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난해했다.

그렇지만 단둘이 만난다는 사실이 좋았고 그녀의 미소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모든 지식을 동원해 칭찬이 될만한 아무 말이라도 떠들었다. 이게 다 개소리인 걸 그녀의 눈썹이 이미 아는 것 같아서, 관자놀이를 둘러싼 곱슬머리에만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전히 리드미컬하게 구부러진 그 머리카락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걸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정육점처럼 붉은 조명을 밝히던 좁은 2층 와인바까지 터덜터덜 따라갔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주인은 얼른 나가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바에 기대서서 나를 노려봤지만, 그녀가 천천히 와인잔을 다 기울일 때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의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막차를 타기 위해 전철역으로 걸어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춘 그녀가, 내게 기댔을 때. 몸을 돌려 얼굴이 다가왔을 때... 천년처럼 느리기도 했고 눈깜박하던 짧은 그 순간에 알아버렸다. 누구라도 상관없는 순간. 내가 사라진 순간. 내 것이 아닌 키스였다. 그 순간을 나는 매트릭스의 키아누 리브스처럼 허리를 뒤로 꺾어서 슬로모션으로 피했다. 그녀의 입술과 그녀의 머리칼과 그녀의 향기를. 피했다. 아주 잘.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자 마차 전철은 승강장에 도착해 입을 열었고, 한마디 인사도 없이 총총총 열차 안으로 그녀가 사라져 갔다. 그 밤, 상수에 잠시 머물렀던 똥색 열차는 왼쪽 심장에 굉음을 내며 구멍을 뚫고 지나갔다. 가슴팍이 아주 시원하고, 골이 띵할 정도로 정신이 명료해서 알게 되었다.

'... 좋아했구나. 내가. 이 여자를.'



*     *     *     *


'그런 얘야. 별로야. 내 타입도 아니고.'

연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천만다행 아닌가. 연락이 온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이든 한다면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다면 그건 다 안 좋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 밤에 나는 그녀의 손끝을. 어깨를. 입술을. 만지지 않은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주 멋지게, '매트릭스의 주인공처럼 허리를 돌려 꺾어가며' 피했다. 웬일인지 그게 자랑스러웠고, 그 비밀을 끝까지 내뱉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의 최대치구나 싶었다. 그래, 그 정도는 기꺼이.


이후에는 두어 번쯤 우연히 그녀를 더 만났다.

동기들의 모임이나, 친구들의 술자리였던 것 같은데. 그녀가 반가웠고, 여전히 너무 반가워서 나는 빨리 자리를 떴다. 티안나게 피했다. 그녀는 나의 결혼식에도 와주었다. 축하해주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밝고 다정해서, 고마웠고 괜찮았다.



*     *     *     *

 

아무 일도 없었으니... 괜찮겠지. 안들켰으니까.

시간이 지나고 긴장감으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게 되면, 귀밑머리가 하얗게 새고 코털에서도 흰털이 심심치 않게 삐죽 나오는 때가 되면, "이런 여우 같은 년에게 홀릴 뻔했었잖아. 얼마나 잘 피했게"라고 껄껄 웃을 수도 있을 거라고. 소녀도 이젠 어른이 되었는데. 몰랐다. 소녀가 어른이 되면 아저씨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 아재들만의 꿈이라는 것을.



".... 야. 너 나한테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맥주 한잔을 마시고 이 한 줄의 엔터를 눌러버렸다.

하나도 취하지 않았지만 취한 걸로하고. 그녀는 기억조차 못하는 그날 밤의 내가 지금은 좀 짜증나기도 한다는 것에... 솔직하기로 했다. 이제 멋있는 척하지 말자. 뜬금없고 찌질하고 못나고 불필요한 마음. 그런 걸 가진 중년의 남자. 고작한다는 게 문자로 이죽거리는 아재. 똥색 6호선를 타고 10년을 떠돌다 도착한 곳.


답장이 무엇이든 괜찮게 지나가리라는 것도 안다.

우리들의 우주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두 행성은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다 손바닥에 떨어진 운석 하나를 내가 챙기고 있는 것이다. 이게 꽤 뾰족해서 여전히 손까락이 찔리는데도 냅다 어디 던지지도 못하고. 어느날이 오면 아무렇지않게 이 돌을 호수에 던지고 올까. 늙는 게 좋은 거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그때도 누구에게 말하기는 너무 쪽팔려서 입밖에 낼 수는 없겠지만. 누구에게 말하고 안 하고 가, 뭐 중요할까. 이 돌멩이의 문제.



end.


https://www.youtube.com/watch?v=GhjtRvanFas

최백호 - 바다 끝 <앨범, 불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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