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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Dec 15. 2020

그런 결혼식 한 번 해봤습니다

여덟 번째 결혼기념일 일기

특별한 선정 기준은 없지만 그래도 피하는 영화가 있다면 엔딩이 결혼식 장면인 영화. 흥행과 호평에도 불구하고 <내 친구의 결혼식>이라든지 <맘마미아>에 끌리지 않았다. 결혼을 할지 안 할지, 이놈이랑 할지, 저놈이랑 할지를 대놓고 탐구하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 같은 영화도 마찬가지.

(결혼식이 나온다고 무조건 망작이라는 건 또 아니다. 총각 여행의 소동을 다룬 <사이드웨이>, 앤 해서웨이가 약물중독자 여동생을 맡아 언니 결혼식에 참석하는 <레이철 결혼하다>는 좋았다. 그러니까... 그렇다.)



드물게 "즐기는 인간형"도 있다지만 내 주변엔 "세리머니를 견디는 인간 vs 견디지 못하는 인간"... 두 종류다. 나는 후자라서 관혼상제 중에서 상갓집 외엔 잘 안 갔다. 그래도 내 결혼식에는 어떻게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결혼식=부모 행사. 별다른 효도를 한적 없던 우리 팀! 은 반론 없이 그들의 편의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공산품 결혼식은 여행 패키지와 똑같다. 편하게 하려면 한없이 편하다. 장소 선정 후, 날짜 시간 고르면 나머지는 일사천리. 종교가 있다면 더 선택의 폭이 좁다. 필요 없는 항목을 빼고 나면, 대가족 식사 예약 잡는 것보다 빠르게 끝난다. 준비할 것은 당일날 주인공 노릇을 감당해야 하는 예약자의 뻔뻔한 얼굴과 무대 킹 가능한 체력.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오래된 예식장에서 열린 나의 결혼식은 건물만큼이나 우중충하고 거룩했다. 예약자가 아무도 없어서 고른 12월 중반의 토요일 오후는 신산하게 눈발까지 날리는 으슬으슬한 날씨였다. 이거 딱 죽... 결혼하기 좋은 날이군!  


모르는 분들이 많이 왔기 때문에 더욱더 가벼운 마음.  

키높이 구두를 신었음에도 바닥을 다 쓸고 다녔던 웅장한 드레스 자락에 걸려 신부 입장 중에 앞으로 꼬꾸라질 뻔했던 위기의 순간과, 급하게 섭외한 잘 모르는 목사님의 길고 길었던 좋은 말씀 중 졸뻔했던 것을 제외하고... (아버지 친구의 축가! 처음 본 분인데 박장대소할까 봐 열심히 참았습니다. 제 콧구멍 커진 사진 지워주세요.)  


결혼식 날의 신부는 "거대한 포장지로 싼 이동식 광고 인형 같은 것"이라서 조심스럽게 조금씩 움직이는 것 외에는 별로 하는 것이 없다. 대신 신랑 역을 맡으면 좀 바쁘다. 진한 눈썹 화장을 한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색한 인사를 하고. 잘 모르지만, 괜히 미안한 기분이 느껴지는 남자 어르신-장인-옆에도 삐뚜룸하게 서 있어야 한다. 이런 불평등? 때문에, 나의 구원자님은 예상대로 약간 심통이 난 것처럼 보였다. 물론, 모른 척했다.


분칠을 하면 할수록 나이가 드러나는 "별로 예쁘지 않은 인형"인 나는... 다른 그 모든 사람들보다도 한가했기 때문에, 커다란 알사탕을 하나 입안에 넣어둔 아이처럼 유유자적하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일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웠다. 아는 얼굴은 물론이고 모르는 얼굴들까지도 모두가 지루함과 딴생각의 파도를 넘어 다니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시계를 보았다. 그러다가 내 눈과 마주치는 순간에는 잊었다는 듯 최선을 다해 친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구별에서 4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우연히라도 받아보지 못한 다정한 눈빛이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던, 몇 명 안 되는 친구들과 선배, 동료들. 하품 때문에 나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애써 짓는 미소들이란! 그 안깐힘 때문에 계속 웃음이 나왔다. 신부 포장이라는 하얀 포장지에 꽁꽁 싸매져 있었지만, 키득거리고 있는 이빨은 결코 숨길 수 없었는데... 사진사 아저씨가 "아 쫌! 신부님, 이제 그만 좀 웃으세요"라고 했을 때야 입술을 다물었다.  


그렇게 결혼식을 했다.

내 결혼식이었지만, 나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을 생각했다. 너그럽구나. 억지 표정을 만들면서 귀찮지만 하품을 하면서도 다들 너그럽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정해서 나는 웃었다.




영화 사이드웨이 중에서


"한 번 해봐. 힘들면 그만둬도 돼."

피아노도 몇 년 치다 그만뒀고 미술학원도 그만 다녔다. 고3 때 모두를 의아하게 하며 시작했던 성악 레슨도 낙엽 떨어지는 가을날, "이제 그만할래요"라고 말하고 끝냈다. 달리기를 할 때도 "힘들면 그만두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뛴다.


결혼식 전날 밤. 마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듯이 "힘들면 언제라도 돌아오라" 고 내 부모는 말했다. 물론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문간에 있던 내 방에는 모친의 사계절 옷가지들이 걸린 간이 행거가 세워졌고, 오래된 청소기와 녹즙기, 빙수기 같은 달그락거리는 것들이 황금색 보자기에 싸여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든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 더 이상... 돼지 멱따는 것 같은 기괴한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교실의 뒷자리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아무렇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이런저런 자극적인 말로 타박하던 음악 선생님은 그만두겠다는 말에 두 번도 만류하지 않았다. 머리를 처박고 자습을 하고 있던 아이들도... 아예 드러누워 잠을 자던 아이들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자리에 앉아서 풀지 못한 연습문제를 마저 풀면 되는 거였다.


처음으로 하프마라톤을 뛰기 시작했을 때, 우르르 앞서 달려 나갔던 이들이 시야에 잡혔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만둘까를 계속 질문하면서 반환점을 돌았더니 이미 골인지점에 도착했을 줄 알았던 많은 이들이 줄줄이 도로가에 앉아 헉헉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힘들면 그만두지 뭐... "라는 주문을 외우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만두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없다. 뛰어왔던 길은 그대로 남아있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돌아가는 달리기는 또 다른 달리기다.



결혼 생활 역시 언제라도 끝날 수 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원해서일 수도 있고. 그 어떤 다른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8년을 맞았다.


드넓은 골반으로 유혹했던 나의 구원자는 남다른 에스트로겐의 소유자인 만큼 말싸움도 잘하고 째려보기에도 능하다. 약이 많이 오른 밤에는 허약한 털이 하늘거리는 그의 정수리를 이빨로 꽉 깨물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지지만 아직 우리 팀은 무사하다.

 


내 공산품 결혼식 이후 느낀 바 있어, 모르는 이들의 결혼 세리머니에도 곧잘 참석해왔는데... 정작 축하해주고 싶은 이들의 청첩장은 배달되지 않는다. 심지어 제일 친한 친구라고 여긴 이는... 올해, 결혼식 없이 결혼해버렸다. 에라이 멋진 놈.





결혼식 하면 떠오르는 영화라니... 좀 안 맞지만, 어쨌든 저는 이 영화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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