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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Mar 23. 2021

초록과 노랑 사이에, 너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와 그해 봄

정릉을 돌아, 북악터널을 지나 신촌까지 향하는 버스를 타면, 학교까지 넉넉히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 항상 막히던 세검정 사거리 정체구간에서 바라보는 먼 산 나무에 연하게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버스 제일 뒷자리 창가에 앉아, 이른 봄의 생일은 진짜 별로라고 웅얼거렸다. 새 친구를 사귀기엔 촉박하고 재수학원과 다른 학교로 뿔뿔이 흩어진 고교시절 친구를 모으기에도 애매했다. 친엄마도 미역국 챙기는 것을 까먹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스무 살 생일.



종로 3가,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바라본 피카디리 극장 앞. 한쪽으로 늘어진 가방을 다른 쪽으로 바꿔 매는 K가 보인다. 나를 알아본 것 같은데 모르는 척했다.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뛰는 척해야겠는데, 새로 산 키높이 구두는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발뒤꿈치를 할퀴고 있었다. 뛸 수가 없다. "보자는 놈이 늦었네. 얼른 들어가자..." 사투리 억양을 숨긴 서울말로 본 척 만 척 영화표를 건네며 영화관 문을 미는 K.  



<라세 할스트롬>이라는 이름에는 당시 국내에 갓 입성한 서른한 가지 아이스크림 맛이 났다. 슈팅스타, 체리쥬빌레 그리고 라세 할스트롬. 스웨덴의 맛. 전작 "개 같은 내 인생"의 감동을 기대했고. 혼자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런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혹시 시간 되면 영화 볼래? 종로 피카디리. 네시. 오늘"


1994년은 삐삐의 시대였다.

K는 가입한 지 한 달 정도 된 미술 동아리, 대학연합 모임에서 알게 된 다른 학교 남학생이었다. 어떤 정보를 전달하라는 선배의 지시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소년은 그 동아리의 94학번 연락망 중 하나였다. 두어 번의 술자리와 말을 섞었던 적이 있었지만 딱히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다. K가 다니는 학교가 종로와 그리 멀지 않았던 게, 영화를 보자고 한 유일한 이유였다. 공중전화에 서서 메시지를 남기고 나서 '앗차'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근데, 뭐 어때. 안 오면 말고.


<길버트 그레이프>를 다 본 후의 감정은, 혼란스러웠다.

<라세 할스트롬>과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제목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 나는 영화의 톤이나 스토리를 아무렇게나 상상해버리고 있었다. <체리쥬빌레>와 <슈팅스타>, <후르츠 칵테일>과 <스톡홀름>과 <잉마르>의 미소를 섞어 귀엽고 상큼한 따듯하고 이국적인 영화를 기대했다.


영화의 전반부까지는 어쩌면 기대와 딱 맞았다. 아이오와 시골 마을의 따듯한 햇살과 천진난만한 자폐아 동생, 귀여운 캠핑족 소녀까지. 하지만 이후 영화의 스토리는 기대로부터 영영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자살한 아버지와 충격으로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어머니. 희생적인 노처녀 누나와 사춘기 여동생, 자폐아 막내. 그리고 불륜으로 얽힌 카버 부인까지. 어느 곳으로 눈으로 돌려도 숨 막히는 현실 속에 길버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길버트의 눈빛에서 스무 살 가면 뒤로 감춰둔 나의 무표정이 보였다.


영화관의 유리문을 천천히 밀고 나오자, 길어진 저녁 햇살이 여전히 환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오랜 잠수를 끝내고 수면으로 올라온 것처럼 큰 한숨을 쉬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제야, 옆에 서 있는 K를 생각해내곤 비쭉거렸다.


"이 영화 별로네"

... 약간의 미안함에 대한 선제적 방어가 담긴 말이다. 공대생, 영화 문외한, 스무 살 소년의 감성과 취향을 고려하지 못한 미안함.


"... 아니... 난 너무 좋은데?"

 

... K를 올려다봤다. 예상했던 것보다 키가 컸다. 납작한 들창코와 양쪽에 알사탕을 문 것 같은 귀여운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그 순간. K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해가 막 지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노을로 세상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란한 시간이군.


영화표를 산 것에 대한 답례로 도넛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커피 한잔씩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선배가 전하라던 심부름 메시지와 그밖에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겉도는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면서 K를 봤다. 저 편안한 미소는 애쓰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아이인 걸까?


마침 저녁 퇴근길이라 버스는 만원이었다. 양손을 버스 손잡이에 매달린 채, 발 하나는 몰래 구두에서 반쯤 꺼내 다른 발에 뒤꿈치를 문질렀다. 그리고 '남자랑 영화를 봤네.'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동기 중 한 명이 K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평소 수줍음이 많은 그녀였기 때문에 모두들 의아해했지만, 다들 내심 응원하는 분위기였다.


 K는 20살 소년답지 않게 편안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애써 사투리를 숨기기 위한 느린 말투 때문인지, 아니면 알사탕을 잔뜩 물고 있는 것 같은 통통한 볼살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흥분과 웃음을 넘나드는 여대생들의 대화 속에 앉아있을 때도, 다른 소년들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고, 빙그레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얼마 후에 나 역시 K의 과 동기이자 절친인 또 다른 소년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1994년은 바야흐로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마음을 먼저 선언하는 것이 대유행에 이르렀던 시절이다. 스무 살의 마음은 천 원짜리 폭죽처럼 아무데서 날아가 터져버렸고, 쏜 사람도 앞에 있던 사람도 깜짝깜짝 놀랐다.


K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그가 늦은 군대 생활을 하다 휴가를 나온 날이었다.

광화문 사거리 어느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세종대왕 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IMF의 꼭짓점을 지나가던 시기였다. 세월은 하수상했고 차 소리도 시끄러웠지만 여름이 끝을 향해가고 있어서 저녁 공기는 서늘했다. 캔커피를 따며 내가 입을 뗐다. "... 만만치 않네"  


K의 동기였던 소년에 대한 부질없는 짝사랑도 흐지부지 끝나고, 첫 사회생활의 피곤함과 실망감으로 가득하던 나는... 그날의 K에게만큼은 솔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짧은 머리와 군복을 보니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지 알 수 없었다. 그날의 K는 외모만큼이나 모든 게 달라져있었다. 자꾸 실없는 농담을 했다. 웃고 싶었지만,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이 예상할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고 여겼기에, 변한 K의 모습도 멀게만 느껴졌다. 그게 자꾸만 화가 났다. 마음이 빠르게 뒷걸음질 치는 걸 느꼈던걸까? 그날 K는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지려 돌아서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다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디선가 들은 얘기로 K는... 오래전에 같은 과 후배와 결혼하여, 먼 나라로 떠나 그곳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정착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K를 좋아했던 나의 친구 역시 오래전에 후배의 친구와 결혼했다. 스무 살의 인연이란 헬륨을 품은 풍선처럼 그 시절 하늘의 어느 끝으로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어느 정도 왜곡과 자의적 해석을 거쳐 그렇게 색깔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봄이 오면, 세상이 아직 깊은 초록에 이르기 전에 막 노랑을 지나가고 있을 때면, 그 미묘한 빛을 만난다. "... 아니, 난 너무 좋은데?" 경상도 억양의 느린 서울 말씨와 낮은 들창코와 하얀 볼. 그 미소에 향한 설렘의 온도를 안다. 라세 할스트롬과 길버트 그레이프, 체리쥬빌레와 슈팅스타 그리고 K.






https://www.youtube.com/watch?v=bk6hKl3OB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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