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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Apr 29. 2021

시시한 절망

-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샀다

무의미한 손길이었을 뿐인데,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던 휴대폰이 검은 화면을 열었다. 기사 제목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200만 원 보이스피싱 피해자, 사망" 

열어보지는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다. 그이를 이해할 수 있겠다. 200만 원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 있냐고? 어쩌면 20만 원 때문에도 그럴 수 있다. 당연하다. 가슴이 찌르르했다.


경의선이 덜컹거리면서 멈췄다. 지상으로 달리는 열차라 차 문이 열리자 바깥바람이 훅 하고 들어왔다. 어디선가 라일락 냄새가 따라왔다. 특별한 계획이 없었던 '알렉스'는 무릎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어깨에 올려 매고 열차 문을 나섰다. 


능곡역을 나서자 길 건너 바로 앞으로 전통시장이 이어졌다. 분주한 시장 속을 걸어가면 주머니에 동전하나 없어도 두리번거리는 게 이상하지 않겠지. 두리번거리다 보면 빨간 토마토가 소쿠리에서 반짝반짝 빛나며 웃어줄 것이다. 그 소쿠리를 가방에 담지는 않겠지만. 


그러고 보니 정말로 가진 거라곤 교통카드 기능이 포함된 체크카드 한 장뿐이었다. 통장의 잔액을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이번 달 통신비가 빠져나가지 않았다면 간신히 10만 원 정도가 남아있을 터였다. 가방 안에는 등기소 문 앞, 무인발급기에서 뗀 가족관계 증명서, 결혼 증명서 그리고 3층 서류 비치실에서 가져온 협의이혼 확인신청서... (그나마도 한 장은 식탁 위에 올려두었으니, 가방 안에 있는 건 글씨가 맘에 안 들어 북북 그어 못쓰게 돼버린 협의이혼 확인신청서) 한 장이 전부였다. 


시장 옷가게 앞 여름용 냉장고 바지 옆에 서서 알렉스는 깨달았다. '호떡 하나 못 사 먹겠구나.' 어차피 뭘 사려고 들어온 것도 아니지만 전진하던 발이 멈췄다. 의욕이 사라진 발은 터덜거리며 시장을 빠져나왔다. 


정류장엔 60대는 족히 넘어가 보이는 어머님 두 분이 앉아계셨다. 알렉스가 그저 슬쩍 봤을 뿐인데도 엉덩이를 밀어 자리를 내주셨다. 엉덩이를 옮기는 중에도 그녀들의 이야기는 끊기지 않았다. 


    "왜 안 낳는데?" 

            "나야 모르지. 지들이 안 낳는걸 뭐 어떻게 해." 

    "뭐 문제가 있대?" 

            "아휴 몰라. 먹고살기도 힘든데 무슨 애를 낳겠어. 요즘 얘들이 다 그래"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알렉스는 본의 아니게 밀착해 들어오는 이야기를 피해 일어서려다가 둘 중 한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때마침 눈앞에 버스가 멈췄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에 올랐다. 



아이를 낳고 싶어도 배우자가 없어서, 여건이 안돼서 안 낳는 것과 아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은 다르다. 주머니에 호떡 정도는 사 먹을 돈이 있는데 안 사 먹는 것과, 아예 동전하나 없는 건 다르듯이.

겉으로 볼 때는 비슷비슷하지만 그 속은 다르다. 속사정은 그 사람만 안다. 다른 사람은 짐작만 할 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정말 죽는 것도 많이 다르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에게 타인이다. 

'... 나라고 별 수 있을까?'


버스는 좁은 도로를 지나 언제부터인가 속도를 내며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이번 정류장에서 회차합니다. 다 내리세요."  

앞서 나가는 사람의 여행용 캐리어 바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버스 계단을 튕기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보니 앉아있던 사람은 알렉스뿐이었다. 


김포공항의 국내선 대기실은 별로 크지 않았다. 월요일 오후였지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거리두기라고 써진 푯말 때문에 좌석의 반은 비어있어도 앉을 수 없었다. 알렉스는 라디에이터에 기대 서서 비행기의 출발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을 보았다. 


동생이 제주도에 살고 있다. 6년 전인가, 성화에 못 이겨 동생의 집에 일주일인가 머문 적이 있는데 여행을 떠난 동생 부부의 공간도 남의 집이라 생각해서인지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너네 집에 가도 돼?" 알렉스는 동생에게 카톡을 썼다가 지웠다. 


비행기표는 포털 사이트에서도 쉽게 살 수 있었다. 인터넷 쇼핑을 편하게 하려고 미리 등록해둔 남편의 신용카드에 결제 버튼만 누르면 됐다. '10년이나 같이 살아줬잖아. 이 정도는 편하게 쓸게.'  알렉스는 한 시간 반 후에 떠나는 제주도행을 예약했다. 그런데 항공료가 너무 쌌다. 지방 소도시로 가는 우등고속버스표 가격보다도 저렴했다. 심지어 그중 천원은 여행사의 수수료였다는 걸, 결제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알았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칠 때조차 그의 신용카드를 써야 한다는 게 치사한 것 같았지만 그 값이 싸니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구매를 확정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마음의 공기가 변했다. 공항 너머 이제 막 저녁노을이 깔리는 창밖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바람 냄새가 났다. 후다닥 가방을 던지고 지나온 보안 검색대에서 직원이 눈짓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볼펜 한 자루와 버스카드가 가능한 체크카드, 그리고 협의이혼신청서가 들어있는... 새털처럼 가벼운 가방을 다시 어깨에 걸쳤을 뿐인데, 5분 전의 세상으로부터 이미 아주 멀리 떠나온 기분이 들었다. 


돌림노래처럼 이어지던 말싸움과 냉전. 지긋지긋한 결혼 생활은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한 채 알렉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kCPTnArF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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