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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Jul 20. 2021

당신의 한 장면

기린도서관 작문교실 네 번째 시간

인터넷 화상회의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라 그런지 수강생들이 모두 능숙하게 화면 속에 얼굴을 드러냈다.  "숙제 다들, 해오셨죠? '내 인생의 한 장면'... 보자, 오늘은 '작약'님 이야기부터 들어볼까요..."


턱 아래쪽에 휴대폰을 두었는지, 코 위로 그림자가 어둡게 진 화면 속에서 한쪽으로 곱게 빗어 넘긴 단발머리에 꽂힌 하얀 나비 핀만 유난히 반짝거렸다. 70대 중반의 작약님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면서 얼굴 표정 하나 안 변하는 환자는 그 환자가 처음이었어요.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닌데, 옛날 항암주사는 정말 아팠거든요. 오죽하면 온몸의 실핏줄이 다 터지는 아픔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아픈 주사를 다섯 번째 맞으면서도 그 환자분은 신음소리 한 번을 안 내시는 거예요. 이젠 몇 번 얼굴도 본 터라 반갑기도 신기해서... 그날은 무슨 용기인지 제가 너무 물어봤어요. '아저씨는 안 아프세요...?'라고요. 그랬더니 한참을 대답을 안 하고 계시다가, '아프지요.'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표정이 안 변했어요. 그 대화를 옆에서 듣고 계시던 환자의 보호자분이, 누님이었는데, 저보고 귀엽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국은 그분이 중신을 서주셔서 결혼하게 되었죠. 그런데 누구를 서줬냐면요... 바로 그 주사를 맞던 아저씨지 뭐예요? "


여인이 까르르 웃었다. 그때 어디선가 하얀 꽃냄새가 난 것 같았다. 여인의 나비 핀이 살짝 날아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진행자는 조심스럽게 "... 환자분은 건강하시죠?"라고 물었다. "그럼요. 제가 간호사인데요. 아주 잘 보살폈지요. 아들 둘, 딸 둘 낳아주고 갔지요. 그때 중신을 서주셨던, 그러니까 지금은 시누이시죠? 아직도 여기 지척에 사시는데, 언니처럼 지낸답니다. 남편 몫까지 해준다고 참 잘해주셔요. 그런 언니가 생긴 게 바로 그날이지요."



두 번째로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은 별명은 없으니 그냥 이름을 불러달라는 구중환 선생님이었다.


"... 그렇게 좋은 일식집에는 사실 처음 갔습니다. 일인당 한 50만 원쯤 하는 데 같았어요. 그래도 이 정도는 내가 내야겠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막 도배업을 시작한 때라, 모텔 서너 개를 가진 사장님이라면 엄청난 손님인 셈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소개해준다던 사장님은 오지 않는 겁니다. 자꾸만 초조해지는데... 옆에 후배는 속도 모르고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더라고요. 그러더니 대뜸... 모텔 사장이 무슨 양주를 좋아하니, 기다리는 시간에 잠깐 자기가 사 가지고 오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보고 양주값을 달래요.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었지만, 까짓 거 양주값 아끼지 말자 싶어서 20만 원을 쥐어주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후배 놈이 돌아오지를 않는 거예요. 한 시간 두 시간... 그때, 앗차 싶었습니다. 일식집 사장에게 물으니 나중에 온다는 모텔 사장의 전화 같은 건 오지도 않았더군요. 내 후배라며 접근했던 그놈은 알고 보니 그 일대에서 비슷한 사기만 스무 번 이상 치고 다닌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날 일식집 시시티브이 화면으로 그놈이 허겁지겁 일식집 문을 밀고 나가던 모습을 바라보던 시간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러 수강생들의 얼굴의 안타까운 탄식으로 바뀌었지만, 정작 구중환 선생님은 씩 웃었다. "욕심이 문제였지요. 얼른 공사를 따내 보겠다고. 마누라한테 얼른 목돈 쥐어주고 싶은 욕심에, 후배라고 접근해온 낯선 사람의 말을 덜컥 믿었으니. 그렇게 돈 벌기 쉬웠으면 여기 계신 분들도 다들 도배집 하지 않았겠습니까."



세 번째 이야기는 욱 사마님이 시작했다.

"... 그날이 결혼 초인데, 퇴근하고 집에 가면 집사람이 저한테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하루 종일 혼자 육아하고 말할 사람이 없으니까 제가 오면 말을 하는 거예요. 근데 그게... 너무 많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루는 제가 집사람한테 그랬어요. 당신은 말을 참 잘하는 것 같아. 구연동화 같은 거 배워보면 어떨까? 그랬더니 집사람이 배우러 다니더라고요. 그리고 쫌 있다가 자기는 야간대학에 갈 거래요. 그래서 빚을 졌죠. 대학에서 아이들에게 읽기 수업, 말하기 수업 같은 걸 배웠나 보더라고요. 집을 좀 넓여야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대요. 그래서 또 빚을 졌죠. 근데 쫌 있으니까 아내가... 특수교육이라는 걸 더 배워야겠다는 거예요. 아이들 말하는 걸 가르치다 보니까... 말을 더듬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많이 찾아와서 자기가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거죠. 그래서 또 빚을 집니다. 공부를 하고 나서 아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이게 너무 잘되는 겁니다. 그래서 학원을 해야겠다는 거예요. 또 빚을 집니다. 그러니까... 저는 빚을 갚으려고 계속 회사에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때 그날 밤에, 아내 얘기를 좀 잘 들어줬으면 인생이 편하지 않았을까..."


네 번째는 이름이 진미인데, 재미가 없으니까 맛이라도 있는 게 좋지 않겠냐면서 "진미채"라고 불러달라는 수강생이었다.

 "... 저는 뭐 대단한 장면은 아니고요. 지난 주말에 비가 왔잖아요? 그래서 이번 주말엔 마당에 잡초를 뽑았어요. 잡초도 이렇게 빗질하듯이 풀을 잘 펴가면서 뽑아야 돼요. 그래서 이렇게 풀을 뽑고 있는데, 잡초들이 제 흰머리 같은 거예요. 그래도 살자고 아등바등 고개를 쳐올리고 자라나는 걸 뽑으니까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풀아 미안하다. 너나 나나 입장이 있지않겠냐' 하면서 뽑았어요. "

     

다섯 번째 순서는 <인생이모작>님이었다.

"... 어제 마지막 회차를 돌고 차고지로 돌아가는데, 창밖으로 비행기가 보이는 겁니다. 제가 가양동 쪽에 있는 버스 회사에 다니는데요. 퇴근하러 들어갈 때 김포공항 쪽으로 내려가는 비행기가 아주 잘 보여요. 저는 그거 보는 게 참 좋더라고요. 버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7년인데요. 처음에 버스기사 할 때 고생 많이 했죠. 버스에다가는 '초보운전'이라고 붙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버스 운전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때가 어제 같고, 지금이 참 좋습니다. 회사 다닐 때는 어머니 모시고 병원에도 한 번 못 갔거든요. 제가 쉬는 날은 병원도 쉬니까요. 근데 어제는 퇴근하면 내일은 작문교실도 듣고 오후에 어머니 병원도 모시고 가야겠다 생각했지요. 어머니는 아직도 제가 버스일 하는 걸 안 좋아하세요. 그래도 어머니 병원 모시러 가면 좋아하시죠."



다음은 "날라리"님의 차례.

" 오늘 아침에 설거지를 하는데, 제가 손에 힘이 없어가지고 접시를 닦다가 탁! 놓쳤어요. 그게 쨍그랑하고 쉽게 깨지데요. 그때 우리 영감이 '아니 설거지 하나를 제대로 못해' 그러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서운하더군요. 그래 식탁에 앉아 가만히 있는데... 제가 올해 명퇴를 했거든요. 회사를 인제 안 가는데, 제 발로 나온 거긴 하지만은 마음속에 꽁한 게 좀 있었어요. 내가 아직은 더 일할 수 있는데. 젊은 사람보다 못한 게 없는데... 그런데 깨진 접시를 보고 있으니까 한심하더라고요. 설거지 하나를 제대로 못하는구나. 내가 마음만 청춘이지 손목에 힘이 없는데... 회사에서 그게 안보였을까, 싶고요."   


 



마지막 순서로 입을 뗀 것은 군인처럼 좋은 풍채를 지닌 <복숭아 아저씨>였다.

"... 작년에 좋은 기회가 생겨서 방송국에서 우리 집에 와서 촬영을 석 달 하고 갔습니다. 저의 아버님이 그때 당시 아흔 여덟이셨는데 치매를 앓고 계셨거든요. 그래서 이 <또또>라는 인공지능 로봇하고 몇 개월 같이 사는 거였어요. 그때 또또에 몇 가지 대답을 입력했는데... 저희 아버지가 똑같은 걸 자주 물어보시거든요. 어릴 때 먼저 천국으로 간 저의 누님이 계신데 그 누님 이름이랑, 제 이름이랑... 저희 어렸을 때 한탄강으로 놀러 간 적이 있는데. 거기 언제 갔었냐... 뭐 그런 걸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보세요. 근데 그날은 새벽 한 네시쯤 무슨 소리가 나서 일어났는데, 아버님이 침대 난간에 걸터앉아계신 거예요. 또 물어보신 거죠. <또또>한테. 누님 이름이랑, 제 이름이랑... <또또>가 또박또박 대답을 해주는 겁니다. 제가 문 앞에 서서 그걸 봤는데. 그게 생각이 나네요. 그 로봇은 싫은 내색도 한번 안 하고 아마 밤새도록이라도 대답을 해줬겠죠. 그게 어젯밤에 생각하니 왜 그렇게 고맙던지요."


복숭아 아저씨는 이야기 끝에 눈물을 살짝 훔쳤다. 그리고 아버님은 올해 봄에 아주 따듯한 날에 누님 곁으로 편안하게 보내드렸다고 덧붙였다.



end.







https://youtu.be/grwEO2Chp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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