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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온 Nov 14. 2023

[영화] “함께 살아가자”

영화 <모노노케 히메> 리뷰/해석

”살아라.“

처음 지브리를 알게 해 준 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었고, 지브리가 전하는 메시지에 감화하게 만든 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다면, <모노노케 히메>는 지브리의 팬으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개인적으로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다시 없을 최고의 역작이라 생각하고 있고, 지브리 중 최애를 넘어 그간 본 모든 영화를 통틀어봐도 최고로 꼽고 싶은 인생작 중 하나다.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처음부터 돌려서 다시 본 건 <모노노케 히메>가 유일하다. 횟수를 세는 게 무의미하지만, 올해만 세 번을 봤다. 그런데도 생각날 때마다 돌려보고 심심할 때마다 돌려본다. 대사를 외울 정돈데 볼 때마다 새롭다. 그 정도로 사랑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블로그에 영화 카테고리를 만들 때 꼭 <모노노케 히메>의 리뷰를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근데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었는지, 외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나 더 막막해서 외면하고 있었다. 다만 생각날 때마다 폰 메모장에, 노트에 끄적이기만 하고 차마 꺼내놓지 못했던 토막들만 좀 있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개봉을 기념삼아 큰 맘 먹고 그 토막들을 엮어보려 한다.


뜬금없지만 <원령공주> 리뷰지만 <나우시카>도 많이 언급하게 될 것 같아 덧붙이는 여담인데, 지금도 지브리의 최애작을 물으면 <나우시카>를 품은 채 <원령공주>라 답하고, 지브리의 최애캐를 물으면 마음 속에 아시타카를 품은 채 나우시카를 외친다. 케이팝은 카씨들이 잘하고 지브리는 카 자 돌림들이 잘하더라(뭐래요) 무튼 <원령공주>는 <나우시카>와 함께 봤을 때 작품이 함의하는 바가 더 깊어진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


그간 자연과 인간의 대립 구도를 다룬 영화를 보면, 대부분 인간들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파괴자’로, 반대로 자연은 파괴되서는 안 될 절대적 위치에서 그런 인간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수호자’로서 포지셔닝된다. 감독의 전작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그 공식을 잘 따라가고 있다.

  토르메키아와 일부 페지테 사람들은 전자에 해당한다. 그들은 부해의 독기와 곤충의 습격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간끼리의 전쟁을 불사할 뿐 아니라 부해와 오무를 불태우겠다고 전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거신병까지 부활시키며 오무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려는 정신나간 짓을 자행한다.

반면 후자에 해당하는 것은 오무와 부해로 상징되는 자연과 그 자연을 지키려 하는 나우시카를 비롯한 바람계곡 사람들이다. 부해는 겉으로는 독기를 내뿜으면서 인간의 생존을 위협—이것도 다시 생각해보면 인간놈들 오죽했으면,,, 싶은 거임—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인간들의 파괴 행위로 오염된 환경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무는 그런 부해를 지키는 역할을 해 왔다. 뿐만 아니라 모두를 지키려다 희생된 나우시카를 되살리는 등 생명력으로서의 자연과 인간을 향한 포용을 표현하기도 한다. 나우시카와 바람계곡 사람들은 일관되게 그런 자연의 입장의 편에 서 있다.


<원령공주> 서사의 가장 큰 축을 이루는 갈등은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자연(신)과 인간의 갈등이다. <나우시카>에서 등장하는 이원적 대립구도를 그대로 차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지점에서 두 작품은 완전히 다르다. <원령공주>는 <나우시카>가 견지하고 있던 동화적 시선을 완전히 거두고 이 대립을 아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다루어냈다는 점이다. 그 시선이 가장 돋보이는 건 <원령공주>에서는 그 어디에도 ‘절대선’도 ‘절대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점이다.




1 . 자연 : 순환과 파괴


자연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생명을 부여하고, 거두고, 또 치유하며 생명이 순환하게 한다. 나무 한 그루에 얼마나 많은 고다마들이 살아가는지만 생각해 보아도 보금자리로서의 자연의 품은 넉넉하다. 또 같은 인간으로부터 버려진 인간(산)을 연민하고 거두어 삶을 도모할 수 있게 해 준 것 또한 숲의 일원인 모로다. 이 모든 순환의 과정들이 생명을 생명답게 하고 세계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 된다.


숲의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는 모노노케, ‘신’들이다. 모로 일족이라 불리는 들개 신들과 옷코토누시를 비롯한 멧돼지 신, 원숭이 신인 성성이 등이 여기 속한다. 신들에게는 극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인간이 자연에 적응하는 방식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신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힘을 앞세워 폭력과 파괴로 맞대응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인간은 나무를 베고 숲을 파괴하는 침입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산이 에보시를 죽이기 위해 타타라 마을을 습격했을 때, 여자들은 산을 진심으로 증오했다. 들개 일족에 의해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여인들이 ‘산’으로 표상되는 자연을 적대하는 이유는 지배욕보단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과 들개 일족을 향한 원망에 터잡고 있다.

어찌보면 아주 당연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녀들이 그렇듯 그의 남편들도 지극히 소탈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신들에게 희생된 인간들을, 숲을 침범했기 때문에 응당한 벌을 받았을 뿐이라고만 여긴다면 그건 너무 납작한 해석이 될 것이다.



2 . 인간 : 탐욕과 존엄


자연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듯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작품이 그리고자 하는 인간의 면모를 가장 명징하게 표상하고 있는 건 단연 에보시와 그가 이끄는 타타라 마을의 사람들, 그리고 지코와 그 부하들이다.



<원령공주>에서도 여전히 인간은 이기와 탐욕의 존재임이 틀림없다. 자연이 품고 있는 자원들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인간들은 끊임없이 숲을 파괴하고 들개 신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또 인간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불로불사의 힘을 얻기 위해 사슴신을 죽여 세상의 근원적 질서마저 깨려 했다.


자연이 자신의 영역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과 타협하지 않았듯, 인간들도 ‘인간들의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골몰했다. 신들은 자기 의지를 가졌지만 인간은 그런 신들을 괴물 취급만 하고 소통하려 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들개 신들과 함께 지내는 산을 ‘원령공주’라고 부르며 경멸하는 것도 그런 몰이해의 산물일 것이다. 사실 산이야말로 인간의 악에 당한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끝없는 욕망만큼이나 이 작품에서는 인간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려내는 것에도 소홀하지 않다. 그 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대하는 태도다.



타타라 마을의 여성 지도자인 에보시는 여자가 철을 만지면 부정 탄다는 속설 같은 건 엿바꿔먹고 철을 생산하는 일을 여성들이 책임지게 했다. 또 마을을 지켜야 할 때면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너무 당연하게 총칼을 든다. 마을의 생존과 번영을 유지하는 일을 남자와 여자가 공평하게 분담하고 있다. 여자들은 당당하며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데에 주저함이 없고, 남자들도 여자들을 존중하고 자신들과 대등한 존재로 대우한다.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 전이라는 작품의 배경을 생각하면 이 마을의 여성의 지위는 파격 그 자체다.


에보시의 세심한 온정은 병자들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 시절 나병은 공포 그 자체였음에도 에보시 본인부터가 전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손수 간호했다. 거기다 총을 생산하는 일을 맡겨 그들이 보호받아야 할 객체로만 전락하지 않고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끔 돕는다. 마을에 위기가 닥쳤을 땐 환자들은 기꺼이 총을 들고 정원을 뛰쳐나갔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그들과 동료로서 함께 협력하며 적과 싸우고, 데이다라봇치의 폭주를 피해 대피할 때엔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먼저 챙기는 모습은 그들이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온전히 존중받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타타라 마을에서는 누구 하나 소외되는 자들이 없다. 힘이 약해도, 병이 있어도 모두가 동등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품었기 때문이다.



3 . 이면과 가치


<원령공주>는 각각 생명의 원천과 이기심의 존재라는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잊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자연은 생명 그 자체로 세계를 떠받들고, 인간은 순응보다는 개척을 택하며 이기적인 지배욕구를 불태웠다. 그러나 동시에 비타협적이고 파괴적인 자연의 이면과 상호 존중과 포용이라는 공동체 정신을 가진 인간의 이면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양쪽 모두에 쉽게 저울질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질서와 존엄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건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의미도 없다. 영화는 절대악과 절대선이라는 이율배반의 관점에서 벗어나, 두 입장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며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주제에 새로운 문법을 창조해냈다. <원령공주>가 이미 그 자체로 명작인 <나우시카>를 뛰어넘은 “걸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시타카와 산


1. 흐림 없는 눈을 가진 중재자



자연과 문명 사이 고착화된 이분법을 이토록 유려하게 탈피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바로 주인공 ’아시타카‘의 존재다. 아시타카는 완벽하다. 모든 지브리 영화를 통틀어 이 정도로 완벽한 먼치킨은 찾아볼 수가 없다. 감독이 본인이 생각하는 ‘영웅은 이래야 해!’의 요소를 싹 다 몰빵해놨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뛰어난 신체능력과 잘생긴 외모는 차치하고정신력이 사기 수준이다. 지브리 영화 중 멘탈갑인 애들 암만 데려와봐도 얘 앞에서는 걍 애들 장난이다.


아시타카를 이야기하면서 나우시카를 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나우시카도 선하고 강한 영웅으로서의 면모는 아시타카 못지않긴 하다(심지어 아시타카에게는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지도자로서의 리더십도 확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나우시카도 아버지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도 하고,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하는 등 다소 인간적인 면모를 내비칠 때가 있었다.


근데 아시타카는 그마저도 없는 그야말로 비브라늄 멘탈을 가졌다. 어떤 상황이 와도 올곧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목에 칼이 들어와도 플러팅을 시전하는 남성 어떤데) 그나마 심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사슴신이 총상만 치료하고 저주를 치료해주지 않았을 땐데, 그때도 걍 눈물 한 방울 흘려주고는 롸끈하게 극복해버리신다. 정신력이 어떤 경지를 아득히 초월한 수준이다.


아시타카는 인격적인 면에서 성장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건 그야말로 양날의 검과 같다. 좋은 거 다 때려넣으면 되니 만들기는 쉬운데, 그로 하여금 관객들을 납득시키는 건 외려 더 어렵다. 관객의 대부분은 아시타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성장해주지 않는 사기캐의 비현실성은 몰입에 방해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런데 아시타카는 그런 이질감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서사 속에 녹아들어 있다. 작품의 주제를 대놓고 외쳐도 촌스럽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데에 있어서도 서사가 아시타카에게 기울지 않고 내내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팽팽하게 균형 잡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시타카의 캐릭터성을 이렇게 영리하게 활용했고, 본인이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제대로 증명한 셈이다.


이를 위해 감독이 아시타카란 인물에게 부여한 가장 중요한 속성은 바로 잘생겼다는 거다. 가 아니고 “흐림 없는 눈”을 가졌다는 거다.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줄 안다. 숲과 인간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그는,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다. 자신이 이해한 것을 그들도 이해하길 바라면서 철저히 중립에서 숲과 인간을 중재하는 역할만을 하며 공존을 피력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아주 입체적으로 묘사된 인간, 자연과 달리 아시타카는 오히려 평면적이다. 그에게 평면적이고 일관된 객관성을 가진 ‘중재자’ 역할을 부여한 덕분에 이 영화가 생명으로서의 자연과 파괴로서의 자연, 탐욕으로서의 인간과 공동체로서의 인간을 모두 조망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아시타카의 흐림 없는 눈을 통해 보고 듣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의 입체적인 면모를 납득하고 감독이 아시타카의 입을 빌려 부르짖는 ”함께 살아가자“는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2. 가능성의 매개자


반면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산은 아시타카와 비교했을 때는 미성숙한 부분이 두드러진다. 산은 인간에게 버림받아 들개에 의해 거두어진 존재다. 스스로를 들개로 정체화하긴 하지만, 신도 인간도 될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들개 아닌 신들은 산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인간의 세계로 돌아가자니 인간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너무 크다.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그러나 이 전설의 플러팅과 맞닥뜨렸을 때, 들개 소녀의 인간적인 면모가 처음 부각된다. 들개로 살고자 했던 산에게 인두겁은 저주와도 같다. 산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신들의 세계에 있는데, 자신의 출신이 인간인 이상 아무리 애써봤자 신들의 세계에 완전히 편입할 수 없으니, 인간의 몸은 장애물이자 열등감의 원천일 수밖에. 산을 진정으로 아껴주는 어머니 모로조차도 “가엾고도 ‘추한’ 사랑스러운 딸”이라 칭하는 걸 보면 아무도 산의 아름다움을 알아봐주는 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여지껏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한 적도 없었을 거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인간에게 복수하고 숲을 지킬 수만 있다면 목숨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것도 그런 열등감이 기저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게 자기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자연의 세계에서 산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웬걸 내가 방금까지 죽이려 했던 남자가, 목에 칼을 겨누는데도 ‘살려달라’는 말 대신 ‘살아라’라는 말로 시작해 ‘아름답다’로 끝나는 고백 공격을 시전한다. 어쩌면 그 말을 듣고 크게 동요하던 순간이 산이 평생을 들개처럼 살아왔어도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제대로 자각하는 첫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산은 죽을 뻔한 아시타카를 구하고, 자신의 원수인 에보시를 구하는 아시타카를 원망하다가도 끝내는 이해하며 인간의 선한 본성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모두를 구하기 위해 아시타카와 함께 사슴신에게 머리를 돌려주는 순간에는, 산은 마침내 들개가 아니라 오롯이 인간—사슴신의 머리는 반드시 인간의 손으로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었다—이었다.



이런 점에서 산은 아시타카와는 다른 결로 자연과 인간을 매개한다.

“아시타카를 좋아해. 하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어.” 산의 마지막 대사다. 하지만 ‘괜찮으니 함께 살아가자’는 아시타카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인간을 증오했던 산이 처음으로 자신의 곁을 내어 준—혹은 자신에게 곁을 내어 준— 인간이 생겼다. 산은 아시타카가 내내 모두에게 제시하고자 했던 어떤 가능성, 그 자체를 상징한다.




대자연의 의지



사슴신은 삶과 죽음,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대자연의 섭리이자 세상을 떠받치는 진리의 가장 큰 축이다. 아시타카의 말처럼 ‘생명 그 자체’인 사슴신은 자연의 본질을 상징한다.


하지만 자연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들개 신이나 멧돼지 신, 성성이들처럼 숲의 입장을 옹호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사슴신도 아시타카만큼이나 ‘중립’이다. 사슴신은 나무를 베고 숲을 갉아먹어온 인간들에게 단 한 번도 벌을 내린 적이 없다. 멧돼지 신들이 숲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을 쓸어버릴 힘을 호소했을 때에도 별 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사슴신은 신들에게도, 인간에게도 제어를 가한 적이 없다. 신과 인간, 그 어떤 쪽의 삶의 방식도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신들의 삶에도, 인간의 삶에도 저울질할 수 없는 각각의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법칙은 신도 인간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품고자 함을 보여주는 거라 생각한다.


그랬던 사슴신이 딱 한 번 폭주하는 순간이 있다. 인간에 의해 머리를 빼앗기자 데이다라봇치가 되어 그 일대를 그야말로 싹 쓸어버렸다. 사슴신의 머리를 베는 인간의 행위는 자연을 개척하는 것을 넘어서 자연의 섭리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사슴신의 폭주는 생명의 질서를 거스른 채 자연을 완전히 배척하고 인간 중심의 세계를 건설하려 하는 탐욕의 끝에서는 참지 않고 징벌을 내렸다.


그러나 끝내 아시타카와 산이 인간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머리를 돌려주었을 때, 사슴신은 자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아시타카에게 걸린 재앙신의 저주를 치유해준다. 결국 사슴신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법칙의 근간은 “생명 존중”이다. 사슴신이 아시타카를 치유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준 것은, 그런 자연의 섭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아시타카를 계속 ‘살아가게’ 함으로써 그 법칙의 근간을 지키려는 대자연의 의지라고 할 것이다.




현실, 타협 그리고 공존


<원령공주>에서 말하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나우시카>에서 말하는 ‘조화’ 혹은 ‘합일’이 아니라 ‘각자도생’—여기서의 각자도생은 협력과 유대 없이 스스로 생존해야 한다는 요즘의 뉘앙스보다는, 정말 ’다른 대로 각자 살아간다‘는 지극히 표면적인 이유로 읽어주기 바란다.—에 가깝다. (더 적확한 어휘가 있으면 추천 바랍니다)


<나우시카>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그 질서 아래 순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문명을 타도하자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반 문명의 색채가 어느 정도 묻어나온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바람이 이끌어주는 대로 가고자 하는 나우시카의 비행이나, 돌진해오는 오무의 무리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장면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렇게 오무에 치어 죽었던 나우시카가 종국에는 오무의 힘으로 부활하는 모습은, 자연에 맞서기보다는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이 조화될 수 있다는 이상적인 결말을 그려낸다.



그와 달리 <원령공주>에서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우리는 그런 동화를 현실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타협’을 택했다. 문명과 자연은 본질적으로 그 생존 방식이 다르기에 앞으로도 대립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결국 인간도 신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사슴신이 자연과 인간, 그 어느 쪽의 삶의 방식도 부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인간과 자연 사이에 놓인 필연적인 평행선을 인정하되, 무익한 희생을 낳는 충돌을 피할 수 있도록 서로 간의 배려와 타협이 필요하다는 게 이 영화의 메시지다.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계’라는 주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서로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어떻게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원령공주>는 <나우시카>에 비해 꽤나 현실적인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어쩌면 지브리 작품 중에서 손꼽히게 고어하고 냉혹한 연출 방식을 사용한 것도 이 영화가 ‘현실’을 담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수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지막 대화를 끝으로 아시타카와 산은 헤어진다. 아시타카는 타타라 마을에 남기로 하고, 산은 들개들과 함께 숲으로 돌아간다. 부부의 연을 맺고하나가 됐음에도 물리적 거리를 둔 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기로 하는 두 사람은 다름을 인정하는 작품의 메시지와 꼭 맞닿아 있다. 그리고, “꼭 만나러 갈게.” 라는 두 사람의 약속은 타협으로 빚어낸 공존의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산과 아시타카는 그 가능성의 증거와도 같다.




아시타카 전기가 아닌, ‘모노노케 히메’


이 작품의 제목에 얽힌 일화는 꽤나 유명하다. 감독이 원래 밀었던 이름은 <아시타카 전기 アシタカO記>—‘전’에 해당하는 한자는 감독이 직접 만든 한자라 텍스트로 붙일 수가 없어서 O로 처리함—였다. 그러나 프로덕션의 영화 홍보 문제+아시타카는 너무 빈틈없이 완벽해 감정 이입이 안 된다는 이유로 <모노노케 히메 もののけ姫>가 된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아시타카 전기>가 아닌 <모노노케 히메>를 제목으로 민 스즈키 토시오의 안목도 꽤나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말한 것처럼, 그리고 이 영화를 본 모두가 느끼는 것처럼 아시타카는 갓벽 사기캐이자 감독의 대변자로서 주제의식 그 자체다. 반면 산은 작품이 끝나는 순간에도 인간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완전히 거두지 못한 채, 앞으로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갈등하게 될 불완전한 인물이다.


지금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본다. 여전히 인간은 산이 본다면 극대노할 스탠스—그대들 이따위로 살 것인가—를 취하고 있지만, 우리는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며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산과 더 비슷하다. 그리고 그런 산에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던 아시타카가 있다.


  <모노노케 히메>는 <바람계곡 나우시카>부터 이어져온 문명과 자연의 대립 양상, 두 개념이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의 탐색이라는 주제에 대해 나름의 종지부를 찍은 작품이다. 영화의 결말은 극적이지 않다. 별천지를 꿈꾸지도 않았다. 다만 ‘함께 살아가자’는 두 사람의 약속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다.


영화가 바라는 건 아시타카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작은 노력들을 쌓아가며 “어제보다 오늘 좀 더 나아진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아시타카에게 마음을 연 산은 그런 세상을 향한 첫 걸음 그 자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아시타카처럼 빈틈 없는 완벽한 세상이 아니다.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에 눈을 뜬 ‘산’이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나아가며 만나게 될 그런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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