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리뷰 / 스포주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돌아왔다. <바람이 분다> 이후 근 10년만이다. 그가 새로운 물음을 들고 왔다.
“난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극단적으로 평이 갈리고 있는 듯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 좋게 봤다. 뭐 재미니 뭐니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아무리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는 80이 넘는 고령에 이룰 만큼 이룬 거장이다. 그러나 이토록 ‘새로운 것‘, ’가보지 않은 곳‘을 향한 도전을 할 수 있다니. 그 점에 대해서 경외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이게 ‘거장’이라는 이름의 무게감인 건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처음부터 두 번 이상은 볼 생각이었고 막상 직접 보니 예상보다 훨씬 난해한지라 두 번 이상은 봐야 뭘 써도 써지겠다 싶었는데 그냥 이번엔 힘을 조금 빼고 오랜만에 극장에서 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인 만큼 영화의 첫 느낌을 위주로 기록해보고 싶다.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 만큼 영화에 담긴 미야자키 하야오의 삶의 행적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미야자키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영화 감독 중 한 사람인 만큼 그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찾아보곤 했던 경험들이 꽤 도움이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느낌이라, 이외에도 더 있을 수 있지만 일단 내가 영화를 보면서 바로 찾았던 자전적 요소만 간략하게 적어보기로 한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버지도 군수 업체의 부품 하청 공장을 운영했다. 반전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전쟁 특수 누렸던 과거는 또 자랑스럽게 얘기하자 미야자키가 “아버지 전쟁부역자잖아요!!!” 하고 대들어 집안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었다는 일화도 알 만한 사람들 다 아는 얘기다.
마히토의 어머니와 나츠코에게서도 감독 본인의 어머니에서 따온 듯한 부분이 보인다. 영화에서처럼 일찍 돌아가시지는 않았지만 미야자키가 어렸을 때 꽤 오랜 시간 투병 생활을 했다. 결핵인가 그랬던 거 같은데 정확한 병명은 기억 안 나지만 어린 미야자키가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을 정도로 병이 심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웃집 토토로>에서 초등학생 사츠키가 집안일에 능숙한 것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반영한 설정이다.
그리고 마히토가 어머니에게 요시노 겐자부로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를 선물받은 것처럼 미야자키 자신도 어머니에게 같은 책을 선물받았고 그 책에 착안해 이 영화를 만들 정도로 무척 감명깊게 읽었다고 알려져 있다.
미야자키가 곳곳에 숨겨놓은 자신의 작품의 오마주—거장의 간지—를 찾는 소소한 재미도 있다. 일단 주인공 마히토는 얼굴과 활을 쓴다는 점이 아시타카를 닮았고, 귀여운 와라와라들은 사슴신의 숲에서 열심히 고개를 까딱거리던 고다마가 생각난다. 히미와 마히토가 포옹하는 장면은 소스케에게로 전속력으로 돌진하던 포뇨와 겹쳐 보이고, 황금문 너머의 공간은 터널 너머의 신들의 세상으로 말려들었던 치히로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이 일궈온 세계에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정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 보니 이번 영화의 화자는 마히토라기보다는, 마히토의 모습을 한 미야자키 하야오 같았다. 그동안 항상 주제의식을 투영한 인물에게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남겨두었던 미야자키 감독이 이번엔 캐릭터의 입을 빌리지 않고, 직접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난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라고.
확실히 전작들에 비해 서사의 이음새가 분명치 않아 난해하다. 물론 전작들도 초창기작과 최근작(?)들만 비교해봐도 서사의 밀도 차이가 크긴 하지만, <그대들…>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애초에 서사 전개에 있어 친절한 설명과 개연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느낌이 강하다.
왠지 마히토 또래의 아이가 꾸는 ‘꿈’ 같다. 깨고 나면 이게 뭔 개꿈인가 싶지만, 정작 꿈속에 있을 때는 그 허무맹랑함들을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미야자키는 꿈 속에서—마히토의 모습으로— 일련의 사건들을 겪어 나가고 있고, 우리는 잠에서 깨어 있는 채로 현실에서 지켜보고 있는 셈이니 감독한텐 자연스럽고 우리한텐 낯선 이야기가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한 노인이 자신의 발자취를 회고하는 묵직한 과정들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사고가 아니라 정돈 안되고 충동적이라 어디로 튈지 모르던 소년 시절 머릿속에 든 상상의 회로 속에 집어넣고 그걸 그대로 영상에 옮겨놓은 듯했다.
지브리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쏟아부었다는 게 빈말은 아닌 모양인지 작화에서 돈 냄새 + 사람 갈려나간 냄새가 철철 나긴 한다. 하지만, 예술과 상업을 다 잡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작품을 기대하기보다는 감독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려고 자본과 인력을 때려박은 내맘대로 예술성 몰빵 영화 정도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고도로 발달한 영화감독은 엿장수와 구별할 수가 없다…………
1991년에 태어난 한 일본 소년은 지브리의 영화를 보며 자라왔다. 지브리의 열렬한 팬이었던 소년은 무럭무럭 자라—진짜 무럭무럭 자라서 키가 188이 되었다— 일본 최고의 싱어송라이터가 되었다. 그리고 2019년, 지브리의 새 영화를 위한, 그리고 그 영화의 감독을 위한 곡을 쓰기 시작했다.
무려 4년을 매달린 끝에 ‘地球儀 (Spinning Globe)’가 세상에 나왔다. 영화의 메시지를 완벽히 반영하면서 동시에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세계를 향한 사랑과 존경의 헌사를 가득 담아서.
이런 서사마저도 왠지 ”지브리“답다.
요네즈 켄시의 음악은 그냥 들어도 좋지만, 서사가 결합했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마르고 닳도록 들은 ‘Lemon’이 <언내추럴>이란 드라마를 보자마자 그 깊이가 완전히 다른 곡처럼 느껴졌던 것처럼, ‘지구본’도 그랬다. 책을 읽으며 들었을 땐 책장의 글씨가 영화 엔딩 크레딧처럼 보였고, 진짜 영화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올 땐 분명 아는 노랜데도 내가 몰랐던 또 다른 공간을 발견했다. 요네즈의 음악은 서사의 힘을 뒷받침하고, 서사의 힘을 발판삼아 음악 자체로서도 더 높이 날아오른다.
내가 영화를 봤던 날, 쿠키 영상이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것도 흔친 않은 일이지만 그보다 더 인상깊었던 건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요네즈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자리에 앉는 몇몇 사람들이었다. 음악의 힘을 눈으로 본 순간 중 하나로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최대한 자제하려 애썼지만
여기서부터는 불가피한 스포가 조금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주의 요망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관되게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보여온 반전주의자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으로 그의 유복한 유년 시절의 배경엔 전쟁 특수가 있었고, 또 그런 유년 시절의 영향으로 비행선, 전투기 등에 관심이 많았다. 소위 말해 ‘밀리터리 덕후’였던 거다. 그리고 그런 밀덕 기질을 자신의 창작물에 가감없이 발휘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특히 초기에 전투기와 비행선을 등장시키며 전쟁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꽤나 아이러니한 영화가 많다. 몇 작품들이 전쟁 미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물론 개인적으로 나는 미야자키 영화가 전쟁 미화물이라는 의견에 매우 회의적이다.)
확실한 건, 애니메이터로 활동해오는 동안 자신의 이러한 모순점을 미야자키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언행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영화에서 ‘악의’라는 키워드가 등장하자마자 그 점이 바로 생각났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모순된 삶의 한 단면을 ‘악의’로 펼쳐놓았다. 그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었고, 그 이야기들로 전 세계를 숱하게 감동시켜온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평화’의 세계를 건설할 자격이 없음을 이 작품을 통해 털어놓는다.
그렇게 마음 속의 악의를 인정하고 난 후에는, 모든 결말을 다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 '살아가기'를 택한다. 그게 거장이 되어버린 소년이, 한때 소년이었던 거장이 생각한 ‘책임을 지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라'는, 새롭지 않다. 사실 이 양반이 평생에 걸쳐 우리에게 부르짖어왔던 단 하나의 메시지였다.
탑 속 세계에선 무(無)에서 유(有)가 태어나고, 유가 무에게로 돌아간다. 그 공간 속에서 마히토가 찾는 건 새로운 시작이다. 만약 이 영화가 정말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면,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미야자키의 나이를 생각하면 감독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를 보며 자라온 우리도 어떤 한 세계의 종지부쯤에 서 있는 셈이다.
우리 모두 이 끝자락에서 어떤 시작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탐색은 결국 단 하나의 물음으로 시작할 것이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끝을 맺는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감독은 물었고 그로써 할 일을 다 한 것 같으니, 답을 찾는 건 우리의 몫이다.
(…) 나는 온 세계 사람들이 서로 친한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그런 세상이 오면 좋겠어요. 인류는 지금껏 발전해 왔으므로 머지않아 틀림없이 그런 세상이 올 거라고 믿어요. 내가 그런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갑자기 방이 환해졌다. 코페르는 고개를 들었다. 창문 가득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해가 안개를 뚫고 새하얀 빛을 땅으로 내려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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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 겐자부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