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고등학교 온라인 수업 콘텐츠 제작 후기 1
시중지도(時中之道). 대학 시절 한 교수님은 중용의 한 구절을 설명하시며, '군자는 시중지도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덧붙여 시중지도는 리더의 자세일 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임을 강조하셨다. 모든 상황과 때에 맞는 적절한 행동과 대처 방안이 있으므로, 그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5년도 지난 노교수님의 강의 한 자락이 문득 떠오른 이유는 올해 내가 시중지도를 놓친 사람들을 위한 수업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선배들이 많이 하던 봉사활동 중에 야학 봉사활동이 있었다. 야학은 생계, 개인 사정 등으로 적절한 시기에 배움을 실천하지 못한 분들이 검정고시 통과 등 다양한 이유로 수업을 듣는 비영리 민간기관이다 이익을 위한 공간이 아니기에, 야학의 선생님들은 모두 어린 대학생이거나 꾸준한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현직 선생님들이다. 당시 나는 야학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선배들을 우러러봤다. 그 당시 선배들도 학업과 아르바이트, 임용 준비 등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고 쪼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모습이 더없이 멋져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매우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단체 생활이 거북했다. 그 흔한 농활 한번 간 적이 없다. 누군가를 위해 내 삶의 일부를 내놓는 희생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30대 중반, 경력 10년 차인 내가 우연한 기회에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하게 되었다. 방송통신고등학교는 초, 중등교육법에 근거해 여러 이유로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다양한 학생을 위한 정규 학교다. 학력을 인정해주는 교육 기관이므로, 야학과는 다르다. 출석 수업도 진행되지만, 주로 온라인으로 수업이 진행되며 일반 학교와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시험을 친다. 올해 5월, 교사들이 사용하는 사이트를 살펴보던 중, 한국 교육개발원에서 온라인 수업 콘텐츠 강의 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마침 내가 가르치던 화법과 작문 과목의 강의 교사를 뽑고 있었기에, 수업한 내용을 그대로 활용하면 되겠다 싶어 선뜻 지원했다. 괜찮은 경력이 될 것 같다는, 순전히 개인적이고 실용적인 이유로 지원한 것이다. 정제되었지만 화려한 언어로 자기소개서를 빼곡히 채우고, 강의 영상을 찍어 보냈다.
<강의 교사 지원 자기소개서>
10년 차 교사로 다양한 수업을 해 왔습니다. 그동안 좋은 수업이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고민하여 다양한 방면에서 수업 역량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좋은 수업과 평가로 학생의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학생들의 말하기와 글쓰기 교육에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학위 논문으로 ‘읽기, 말하기, 쓰기’를 통합한 수행평가의 교수학습모형과 타당한 평가 기준을 연구했습니다(Rasch 모형을 활용한 논증 중심 영역 통합형 수행평가 도구 개발 연구, 2019). 이후 학생의 논설문 평가와 관련된 학술지 논문을 내기도 했고(Rasch 모형을 활용한 국어교사의 논설문 평가에 나타난 논증 영역별 평가 특성 분석, 2019), 현장에서 한 학기 한 권 읽기 수업을 실천한 결과를 재구성해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습니다(한 학기 한 권 읽기를 위한 주제 중심 독서, 2019). 이 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부산시교육청에서 ‘교실 수업 개선 실천 우수 교사’로 선발되어 덴마크, 핀란드의 학생 참여 중심 수업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이를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현재에도 고교 학점제와 연관해 IB (International Baccalaurea) 교육을 국내 공교육에 정착시키기 위한 기초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수업 관련 다양한 연수에 연수 강사로 참가하여 저만의 수업 노하우를 널리 알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처럼 저는 학생들의 말하기, 글쓰기 능력 향상에 큰 관심이 있는 교사입니다. 마침 이번 학기에 화법과 작문 과목을 맡아 학생들의 화법, 작문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블렌디드 수업을 체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말하기, 글쓰기 수업 및 평가에서의 전문성, 10년 차 교사로서의 뛰어난 수업 역량은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고 자부합니다.
한국 교육개발원의 온라인 수업 콘텐츠 교과 교사로서 저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해 오프라인 수업 못지않은 좋은 수업을 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제가 온라인 수업 콘텐츠 교사로 선정된다면, 정확한 이론적 지식과 개념 학습은 물론이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말하기, 글쓰기 역량을 신장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6월 어느 날, 강의 교사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7월 초에 강의 교사 사전 교육이 서울에서 예정돼 있었지만, 코로나가 심해져 결국 온라인으로 연수를 하게 되었다. 강의 교사가 해야 할 다양한 업무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니, 벌써부터 지치기 시작했다. 내가 제작해야 할 강의는 총 17차시로, 설명문, 발표, 보고서, 논설문 영역이었다. 한 차시 당 3가지의 소주제를 구성해 각각의 소주제에 걸맞은 내용을 10분 분량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각 소주제에 맞는 동기유발과 학습 활동을 구상해야 한다. 또한 각 소주제 당 최소 5개씩의 평가 문제, 총 15개의 평가 문제를 출제해야 한다. 강의 원고 집필과 평가 문제 출제는 그렇다 치고, 5-6번가량 서울에 올라가 강의 영상을 촬영할 생각을 하니 바쁜 일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12월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일정에 괜히 지원한 걸까라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원고를 작성하고 강의를 촬영하다 보니 이 같은 걱정보다는 즐거움이 앞선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내 강의를 듣는다는 상상을 하니 왠지 모를 뿌듯함과 보람이 느껴진다. 항상 10대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수업 자료를 찾아다니던 내가, 나와 비슷한 또래 혹은 그 이상의 성인들이 재밌게 생각할 만한 소재를 고민하게 되었다. 차분하고 진중한 언어로 그 어떤 때보다 수업의 속도를 신중하게 조절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각자만의 이유로 배움을 놓쳤지만, 배움을 향한 여정을 다시 시작한 사람들에게 든든한 위로가 되는 수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신은 타자의 얼굴을 통해 말을 건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주체가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우리는 관계 맺음으로 존재한다. 교사 김형성이라는 주체 앞에 선 수많은 학생의 얼굴이 내 존재를 존재하게 한다.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해 학업을 놓아버린 친구들, 몸이 아파 학교에 갈 수 없는 친구들, 가족과 자식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신의 배움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 철없던 시절의 선택으로 배움의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나와 얼굴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뜻으로 굳건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교감할 것이다. 서로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 것이다, 늦었지만 늦지 않은 당신의 배움을 응원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