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적글적샘 Oct 01. 2021

우리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노동의 가치를 생각하며

“얘들아, 이번 수학여행은 취소되었어.” 98년도,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수학여행이 취소되었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의 반응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때에도 소위 목소리 큰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왜 못 가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져 귀에 박혔다. 난 조용히 침묵했다. 13살(실제로는 11살이었지만)은 IMF를 알 만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가정형편은 알 나이였다. 기업 부도, 정리해고 같은 뉴스는 딴 세상 얘기처럼 들렸지만, 집안을 책임지는 엄마의 한숨은 내가 품어야 할 작은 세계였다.

  당시 한스밴드의 오락실이라는 노래가 꽤 유행했다. 출근한 척 가족을 속이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가벼운 멜로디에 얹혀 울려 퍼지곤 했다. 다들 돈 때문에 힘들던 시기, 유쾌하고 발랄한 멜로디와 슬픈 노래 가사가, 문학 시간에 배우던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돈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던 시대. 무너진 사회 안전망을 회복하기 위해, 국민연금이 도입되던 시대. 당시 구청 공무원의 국민연금 가입 권유 전화를 받고 화를 내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살아있을지도 모를 20년 뒤를 생각하면서 무슨 돈을 내란 말이에요?’

  그랬다. 지금, 당장의 먹을거리가 생존의 문제로 여겨지던 시대에, 나는 살았다. 매일 챙겨가야 하는 급식 도시락의 메뉴가, 소풍에 입고 갈 옷이 내 하루하루의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래도 견딜 만했다. 나는 하루에 몇백 원, 혹은 천 원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씀씀이가 작은 어린아이였으니까. 되돌아 생각하면 나는 키우는 데 돈이 들지 않는, 좋게 말하면 욕심이라고는 없는 마음이 작은 어린아이였다.

  유복한 집안도, 행복한 집안도 아니었지만, 나는 나를 알뜰히 챙기며 살았다. 다니고 싶은 학원도, 과외도 하지 못했지만, 곧잘 공부했다. 지금 생각하면 엉망이었던 학교 수업과, 강제로 해야만 했던 자습만으로 꽤 좋은 성적을 받았다. 엄마의 주문과도 같은 ‘넌 꼭 부산대를 가야 한다.’는 목소리에, 난 그 시절 대학교가 부산 대학교만 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지역 국립대 사범대에 들어가 4년을 좁은 세계에서 살았다. 좋은 학점을 받아, 한 학기라도 조기 졸업을 해서 150만 원 정도의 등록금을 아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라 생각하며 살았다.

  재수 끝에 임용고사에 합격했고, 이후 꾸준하게 노동하며 살았다. 공립 고등학교 교사의 월급이 얼마 안 된다지만, 그때만 해도 보충수업이다, 특강이다 뭐다 해서 26살 나이 치고는 꽤 많은 돈을 받았다. 무엇보다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게 행복했다. 내 지식과 가르침이 뿌듯함으로 돌아오는 건 다른 노동자들이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함이었다. 가치 있는 노동을 한다는 자부심. 내 가르침으로 언젠가 빛날 존재들을 세상에 내보낸다는 사명감. 누군가를 도우면서 느끼는 보람이, 내 노동을 아름답게 빛냈다.

  물론 과도한 노동으로 힘들 때도 많았다.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일하는 게 싫지 않았다. 내 삶을 갉아먹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수준의 노동은 나를 살아 있게 했다. 나를 바라봐주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내 행복의 8할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뉴스와 방송, 유튜브에서 각종 뉴스가 들리기 시작했다. 뉴스 속 세상은 내가 품지 못할 너무나도 큰 세계였다.     

“월급만으로는 노후를 보장할 수 없다, 경제적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 노동 수익이 아닌 불로 소득으로 현금 흐름을 만들어라, 부동산과 주식은 계층 사다리를 오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난 재테크 책의 정석이라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나오는 ‘가난한 아빠’의 전형이었다. 충직하게 자신의 노동만을 지켜 가는 사람은 결국 가난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 돈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학교 교육은 무용하다는 것. 세금은 최대한 덜 내야 한다는 것 등등. 어느 정도 공감이 가면서도, 가지 않았다. 아니 공감하기가 싫었다. 고도성장의 길을 걸어온 윗세대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축만으로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어쩌면 사회와 경제에 대한 치밀한 관심이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모니터 속 숫자 놀음이 나에게 안정된 노후를 책임져 줄 사다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런 노력에서 노동의 가치는 폄하되는 걸까. 부를 쫓으면서도, 부의 품격을 갖춘 사람들은 왜 이리 없는 걸까.

  절세가 곧 재테크가 되는 시대, 세금은 적게 낼수록 좋은 것이 되어 버렸다. 개인의 노후는 중요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노후는 관심 밖이다. 많은 사람이 국민연금을 비난한다. 그 돈을 시장 상품에 투자하면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소득 재분배 기능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알 바가 아니다. 공동체의 안전과 사회 안전망이 아닌 각자도생의 유용함을 외치는 시대. 투기가 투자로, 노동은 무가치한 것으로, 내 직장과 직업은 잠시 거쳐 가는 정류장으로 여겨지는 시대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래서 나는 돈을 가르치고 싶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돈에 대한 다른 가르침을 가르치고 싶다. 노동의 가치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세금의 역할을 가르치고 싶다. 무엇보다 자신의 , 노동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싶다. 돈을 벌기 위한 재미없는 노동을 해서는  된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수는 없다. 그리고  필요도 없다. 우리  누군가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리고 실패해야만 한다. 그러나 다시 일어설  있는 사회에 살아야한다. 개인의 부가 아닌 사회와 국가의 부로 다시 일어날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 그것이 내가 가르치고 싶은 전부다.

작가의 이전글 시간에 녹스는 마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