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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Feb 22. 2023

미지근한 온도와 완만한 기울기

“남은 일정에 아쉬워하지 마세요. 안 그러면 감옥이 된대요.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곳에 갇히곤 하잖아요. 중간에 돌아간 여행객들이 그런다고 해서요.”     


  드라마 <더 패키지>에서 회사 일정 탓에 패키지여행 중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정용화에게, 여행가이드인 이연희는 이렇게 말한다. 가지 못했던 곳을 아쉬워하면, 그 순간이 바로 감옥이 된다고. 비단 여행뿐일까. 힘들고 지쳐 포기한 것들이, 눈여겨보지 못하고 지나간 것들이, 그래서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향한 미련들이 늘 우리의 발목을 붙잡곤 한다. 그렇게 지금의 내 선택과 방향을 의심하고 자책하며, 놓쳐버린 것들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곤 한다. 나 또한 그랬다. 아쉬움과 후회로 점철된 순간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르거나, 느슨한 삶을 살아온 건 아니다. 주어진 시간을 조각 조각내서, 분 단위의 삶을 바쁘게 꾸려왔다. 내 휴대폰 다이어리에는 빈틈이라고는 없는 각종 일정이 늘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다 해내지 못한다. 그렇게 어제의 일을 오늘로,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곤 한다. 매일매일을 미완성으로 내버려 두는 삶. 그게 당연한 걸 알면서도, 매번 스스로를 책망하고 만다.


  나는 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8시간의 노동과 8시간의 수면, 8시간의 여유로 구획된 시간이 불공평하다고도 생각했다. 나보다 더 넘치는 시간을 가진 사람들을, 그래서 언제나 여유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늘 조급하고 초조해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의 기사를 읽으며, 그들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얼마나 다른가를 고민했다. 물리적으로 똑같은 시간을 겪어 왔지만, 그 밀도가 다를 수밖에 없을 터인데, 나에게 주어진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 합리화하곤 했다. 그 조급함과 초조함이 늘 부족한 시간 안에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꾸역꾸역 욱여넣게 했다. 빈틈과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빽빽한 삶으로, 나보다 앞서 나가는 누군가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감추곤 했다.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덩어리 진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시간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교에 가면 너희가 하고 싶은 일을 언제든, 마음껏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얘기했던 선생님들의 말은 거짓이었다. ‘언제든’과 ‘마음껏’은 내가 누릴 수 없는, 누군가의 사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최대한 빨리 취직해야만 했다. 그래야 엄마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었다. 휴학은커녕 말년 휴가에 맞춰 복학했고, 이후엔 끝없이 용돈과 등록금을 벌어야만 했다. 등록금을 아끼기 위해 조기졸업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방학 때마다 계절학기를 가득 채워 수업을 들었다. 교사가 된 이후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에서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제거하는 순간, 나에겐 미혼 1인 가구가 감당해야 할 온전한 노동의 몫이 돌아왔다. 단 한순간도 노동을 멈출 수 없었다. 흔히 말하는 생계형 교사로 끝없이 가르치고 일해야 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덩어리 진 시간을 갖는 건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상도 마찬가지였다. 50분의 수업과 10분의 쉬는 시간이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의 집중력을 배려한 최선의 구획인 줄 알면서도, 늘 그 시간에 내 노동과 쉼을 배분해야만 하는 삶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하루하루의 삶은 늘 고단하기만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시간을 짜내야만 했다. 그런 초조함의 끝에는 늘 피곤함이 뒤따랐다. 해야 할 일들만 잔뜩 한 채,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바닥나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휴식이라는 이름으로 침대에 누워 허무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여유로 착각했던 것이다. 사유를 중지하는 것이 진정한 휴식인 줄로만 알았다. 요즘 유행하는 짧은 영상을 수십, 수백 개 감상하며 몇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지친 나를 위한 위로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흔히들 말하는 번아웃임을 미처 몰랐다.


  그래서 늘 덩어리 진 시간에 대한 욕망에 목말랐다. 시간을 마음껏 잘라 붙일 수 있는 자유, 나만을 위한 시간표를 만들 수 있는 자유가 간절했다. 하지만 나 같은 보통의 직장인들에게, 그런 선택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쓸모가 생산성이라는 가치로 환원되는 시대에, 정해진 시간에 따른 계획적인 삶은 암묵적인 계약과도 같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많은 사람이 열광했던 경제적 자유도 강제로 구획된 시간의 틀을 깨부수고,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속도에 맞게 누리고 싶은 욕망의 발현은 아니었을까. 정작 우리가 누리고 싶은 것은 경제적 자유가 아닌, 시간의 자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시간에 속박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아등바등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 선생님이 13년 동안이나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떻게 긴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냐 묻자, 그 선생님은 미지근한 온도로 꾸준하게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정한 온도로 완만하게 올라가는 삶. 난 지금까지 남들보다 뒤처진 거리를 따라잡기 위해 뜨겁고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제풀에 지치고 지쳐, 포기할 때마다, 그 선택들은 늘 나에게 감옥이 되고 말았다. 어찌 보면 내가 그토록 원했던, 시간에 구속되지 않는 삶은 시간에서 벗어나는 삶이 아니라 그저 식지 않는 열정으로 느릿느릿하고 완만하게 올라가는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조급해하지 말아야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미지근한 온도와 느릿한 속도로, 완만한 기울기를 만들어가야지. 흘러가는 시간만큼 아주 조금씩 성장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해야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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