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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Dec 21. 2022

담대하고, 의연하게

교지편집부의 귀여운 학생이 부탁해서 쓴 글. 졸업식, 종업식에 나눠 줄 교지에 실릴 글이지만, 미리 올려둔다. 왜냐구? 그냥 내가 쓴 글을 올리고 싶은 밤이니까. 제목은 ‘담대하고, 의연하게’


11월 학력평가 영어 시험 감독을 들어갔어. 감독 시간에 밀린 업무를 할까 싶어 이것저것 챙겨 갔지. 그런데 갑자기 너희와 함께 영어 시험 문제를 풀고 싶더라. 졸업한 지 한참이나 지났지만, 가끔 너희를 보며 내 학창 시절을 떠올리곤 해. 학교 생활을 하다 보면 학생한테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참 많거든. 그때의 난 무슨 고민을 하며 살았는지, 거짓말하고 조퇴에 성공했을 땐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등을 생각하면서 지난 내 과거와, 나와 비슷했을 너희의 행동을 쓰다듬지. 그날은 갑자기 모의고사를 치던 고등학생 때의 내가 떠올랐어. 그래서 들고 갔던 업무를 덮어 두고 시험지를 펼쳤어. 그리고 너희와 함께 문제를 풀어나갔지. 처음엔 영어 듣기만 풀까 하다가, 독해에도 손을 댔어. 영어 독해에 손을 놓은 지 오래라 쉽지 않더라. 이 어려운 문제를 70분 만에 풀어내다니. 미동도 하지 않고 빠르게 지문을 훑어 나가는 너희를 감탄하며, 바라봤어.

  독해 문제를 풀다가 인상적인 지문이 있었어. 시험이 끝나고 한동안 그 지문의 내용을 되새김질했어. 그 지문에 이런 문장이 있었는데, 혹시 기억나니? ‘Over the years, I have consistently stuck to the habit of “eating my problems for breakfast.”. ’난 지난 몇 년 동안 고민을 아침으로 먹는(문제를 일찍 해결하려는) 습관을 꾸준히 지켜 왔다.‘라는 뜻이었지? 그런데 난 정반대였어. 힘들고 어려운 일, 하기 싫은 일을 항상 뒤로 미루는 버릇이 있거든. 복잡한 업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 (일반적인 표현으로) 문제 학생 지도, 학부모 상담 등등. 학교 일뿐만 아니라 삶에서의 고민거리들도 계획표의 저 뒤편으로 계속해서 미루곤 했어. 그럴수록 하루종일 그 일을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치고 힘들 때가 많았지. 예전엔 이런 상황에서 도망치고 회피하려고 발버둥을 쳤어. 아니면 일시적인 쾌락에 빠지곤 했지. 술도 많이 마시고, 놀기도 많이 놀았어. 성인이라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하는 그런 행동들 말이야. 그 순간은 즐겁고,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았는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알게 되더라. 내가 처한 현실이 그대로라는 걸. 바뀐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말이야.

 그런데 이 문장이 나를 보며 이야기하더라고.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만드는 일을 제일 빨리 삼켜버리라고 말이야. 불쾌함이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게, 짜증과 분노가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지 않게, 먼저 먹어버리라는 거였어. 고개 돌리거나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마주하라는 의미였겠지.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무 힘든 일이기도 하지.

  너희는 어떠니? 매일, 매주, 매달 너희를 힘들게 하는 많은 일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지는 않니?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로 스트레스 받는 건 아닌지, 그러면서 그 문제가 언젠가 잊히기를,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건 아닐지 걱정되네. 그러고 보면 너희도 참 마주하기 힘든 일들을 헤쳐 나가며 살 것 같아. 그게 공부일 수도, 오해로 틀어진 친구와의 화해일 수도, 아침에 말다툼하고 나온 부모님과의 대화일 수도 있겠다. 너희는 그 많은 일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니?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에 위아래가 없다는 말이 있잖아. 가끔 아무렇지 않게 담대하고 의연하게 학교 생활을 하는 너희를 보며 감탄할 때가 있어. 긴장되는 상황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씩씩하게 문제를 풀어내는 모습처럼 말이야.

  얼마 전에 칙센트 미하이의 <몰입>이라는 책을 읽었어. 그 책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 “역경이 우리를 마비시킬 정도로 위협적일 때에도, 우리는 심리적 에너지를 투입하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 외적인 힘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목표를 발견해 스스로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자아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라고 말이야. 요즘 들어 인생의 숱한 고민거리를 마주하는 세련된 자세를 생각해. 버티기 힘든 고난이 찾아와도, 내 삶을 무너뜨릴 위기가 엄습해도, 도망치지 않고 그 현실에 직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내면을 지킬 새로운 목표를 찾아낼 수 있을까. 너희에겐 너희의 내면을 지탱할 목표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겨울 방학 때 그 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나도 찾아보려고. 깊어지는 사색의 시간만큼, 우리는 더 성숙해지겠지? 지금보다 내년에, 내년보다 먼 미래에 더 단단해져 있을 너희를 기대하며 인사할게. 올 한 해 고생 많았어. 내년 봄에 따뜻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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