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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적글적샘 Nov 03. 2022

이태원

  내가 이태원을 처음 간 건 2013년 어느 주말 밤이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나와 친구는 핫하다는 클럽을 갈 생각에 온 몸이 달아 있었다. 6호선 지하철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느릿하게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간마저 아까운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깊고 깊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그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누가 내 젊음을 뺏어가기라도 하는 것마냥, 이 순간의 즐거움이 조만간 달아날 것마냥, 나도 조급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번 출구로 나오면 그 유명한 해밀튼 호텔이 있었다. 그 앞으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환한 불빛이 뒤엉킨, 어지럽게 아름다운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를 채운 매혹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국적과 성별의 가림막이 붕괴된 채로 수많은 인종이 가지각색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겐 낯설고도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주말 밤마다 이태원은 이런 모습이겠구나. 넘치는 젊음을 마음껏 낭비하려는 청춘들이 가득하겠구나. 내 젊음도 이렇게 환하게 빛날 수 있을까.

  감탄과 의문을 뒤로한 채, 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 속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숨겨둔 욕망이 꿈틀대는 그곳에서, 유흥과 쾌락이 미덕처럼 소비되는 그곳에서, 인종과 성별을 캐묻지 않는 그곳에서, 마침내 나도 해방될 수 있었다. 이태원은 나에게 그런 공간이었다. 일상의 엄숙함과 지루함을 허물 벗듯 던져 버려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던 공간. 도덕과 윤리가 아닌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나를 긍정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에서 수많은 청춘이 죽어 나갔다. 모든 죽음은 애처로울 뿐인데, 어떤 사람들은 죽음의 이유를 따진다. 슬픔의 등급과 애도의 깊이를 나눈다. 철없는 젊은이들의 방종과 타락으로 인한 죽음을 추모하는 데 국가의 세금과 원인 규명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조용한 침묵만이 그들을 향한 진정한 추모라고 일갈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이 남긴 의문을 해결하는 건 살아있는 자의 몫일지 모른다. 실수와 잘못을 바로잡고, 책임과 역할을 따지는 게 남아 있는 우리들의 책무가 되는 이유다.

  수많은 청춘을 품기에는 너무나도 좁은 골목이었다. 부디 넓디넓은 하늘에서 마음껏 소리 지르며 자유롭게 날아다녔으면. 그렇게 영원히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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