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삶에 대하여

어딘가에 존재할 영케어러들이여 안녕하신가요.

by 구둘기


20대 때 아빠의 보호자가 된 가족 돌봄 청년이자 ‘아빠의 아빠가 됐다’, ‘새파란 돌봄’ 책의 저자 조기현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돌봄의 몫은 '가족' 뿐 아니라 '사회'의 '돌봄' 과 '일' 이 될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스무살부터 가녀장이자, 26살부터 7년차 영케어러인 나의 마음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영케어러’ , ‘돌봄 청년’ ‘코다’라는 말이 생겨나기라도 했지. 주변에 나와 코다(coda)인 나의 현 남편(구 남친)최씨와 같은 사람은 보기가 드물었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나는 그나마 다행인 케이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혁이씨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는 암이라는 병명으로 국가에서 산정특례 지원을 받아 병원을 다니며, 특별한 수술이 나 값비싼 임상약, 특정 mri, 도수치료가 아닌 이상은 진료비의 5퍼센트만 측정이 된다. 슬픈 게 있다면 그녀는 암에 걸릴지 모르고 실비보험 외에 암 보험을 들어놓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혁이씨에게도 질병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아무튼 혁이씨는 만 65년을 넘게 살았고, 그동안 열심히 일하며 들었던 고용보험료를 받으며 장기요양서비스를 하루 세 시간씩 이용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몸의 한계와 도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거의 없다시피 한데, 나에게 요구되는 병원비나 체력, 일터에서는 일을 하면서 웃어야 하는 마인드 컨트롤과 집중력, 집에 와서는 가사와 돌봄이 요구되었다. 일터에서의 내 자리도 지켜야 하고, 수술장도 지켜야 하고, 내 몸도 지켜야 하는데, 나에게 주어진 휴가일수는 1년 12번, 최대 15일. 너무나 귀여운 숫자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나마도 없고 있었다 하더라도 15일 중에 12번 정도는 병원에 동행하는 데 사용했었다.


나는 현 직장에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었는 사무실 폐쇄로 인해 재택근무로 일을 하고 있다. 덕분에 집에서 혁이씨와 함께 있을 수 있다.


남편 최씨는 어찌 보면 태어나자마자 영케어러가 되었다. 농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손으로 하는 수어를 보고 들으며 자랐다.

초등학생 때부터 은행에서 공과금을 처리하곤 하였다는 그의 어린 시절이 어땠을지 가끔 상상해보곤 한다.

그는 그래도 착실히 일하신 부모님 아래 장성하여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친정 부모님을 부양한다는 책임으로 27살 때부터 택배노동자가 되었다.

부모님은 기존에 다니던 공장에서 건강이 좋지 않아 지셨고, 남편은 부모님의 직장을 찾아 이력서를 대신 내보기도 했지만 더 이상 환갑을 앞둔 농인을 구인하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사업자가 되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5년째 택배 노동자의 일상을 보낸다.


영케어러들이 모두가 다 이렇게 돌봄과 일을 병행하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올해 1월,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굶겨 사망에 이르게 한 청년의 2심 재판이 열렸다. 우리 사회에 ‘간병 살인’이란 무거운 화두를 던졌던 그 청년은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은 어떻게든 잘못이지만, 간병이라는 키워드는 고령화 시대, 노령화 시대, 한 자녀 시대에 남 일은 아닐 것이다.


한겨레에 실린 작가 조기현의 ‘조기현의 몫’ 글 중에서 내용을 발췌해 옮겨본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은 주로 중장년 여성의 일처럼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과연 영 케어러의 문제는 기존에 아픈 가족을 돌보던 중장년 여성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을까?
영 케어러는 청소년, 청년 문제인 동시에 돌봄 문제다. 지금 우리에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저출생, 고령화, 만혼화, 비혼화 등 인구 변화는 우리 삶이 일찍 돌봄을 마주할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인구 변화 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부모나 조부모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형제가 적거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픈 가족이 생긴다면 아이는 영 케어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청소년을 돌봄 받는 시기로만 보거나 청년을 가정에서 독립하는 시기로만 본다면, 그들이 누군가를 돌보면서 겪는 어려움은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영 케어러는 청소년, 청년 시기를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해줄 듯하다.

영 케어러의 문제를 영 케어러‘만’의 문제로 여긴다면, 돌봄을 하는 청소년, 청년들을 돌봄에서 잠시나마 구해줄 수 있을지언정, 돌봄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불이익이 되는 세상은 변치 않는다. 하지만 돌봄은 우리 삶의 기반이다.

그 누구도 돌봄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백번 강조해도 모자람 없는 사실이지만, 백번을 강조해도 중요함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중장년 여성들의 돌봄 이야기 앞에서 입을 다물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을 생각이다. 돌봄의 사회적 인정을 위해 우리가 동료 시민으로 마주해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기고한 조기현 작가의 돌봄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선가 일하며 돌봄을 하고 있을 영케어러들은 괜찮은지 안부를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