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묻다]: 책을 읽고 발제문으로 리뷰하기 26.02
매달 읽은 책들을 간단하게 리뷰합니다. 그중 한 권에 대해서는, 그 책으로 독서 토론을 한다는 생각으로 발제문을 작성하고 그에 답하면서 리뷰를 하려고 합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발제문 - 아래의 내용을 기반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해 봅시다.
1.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전체적인 감상평을 말해봅시다.
2. 텍스트 내적 화자와 실제 작가의 동일시 문제 :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투영된 작품을 읽을 때, 독자나 관객은 텍스트 내적인 의미와 작가의 텍스트 외적 삶(사생활)을 과연 완벽하게 분리하여 해석할 수 있을까요?
3. 예술의 독자성은 어디까지 보호받아야 하는가? 19세기 예술지상주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성취는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문학 비평의 한 축을 담당해 왔습니다. 성취를 이룬 텍스트가 작가의 중대한 범죄나 비윤리적 행위와 엮여 있을 때, 비평과 분석의 영역에서 이 작품의 '미적 가치'는 작가의 과오와 무관하게 온전히 옹호되어야 할까요?
4. '맥락화'는 현실적으로 유효한 비평적 실천인가? 사피로는 문제적 작가의 작품을 무조건 삭제하고 퇴출하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 대신, 비판적 주석이나 경고 표지(Paratext)를 달아 텍스트 내의 상징적 폭력을 가시화하고 분석하는 '맥락화'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이 대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5. 문제적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독자의 책임 작가의 이름이 단순한 서명을 넘어 거대한 사회적 권력이자 경제적 자본(브랜드)으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문제적 작가의 작품을 소비(독서, 관람, 구매)하는 행위는 개인적인 감상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없다'는 사회학적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이 논란의 텍스트들을 곁에 두고 읽고 해석하려는 독자(수용자)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윤리적 태도와 책임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책을 다 읽고 난 후 발제문에 대해 생각해 보고, 맨 아래의 글을 읽어주시면 됩니다.
이번 달 읽은 책
이번 달도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었다. <속죄>, <스위트 투스>, <이런 사랑> 이후 네 번째로 읽는 이언 매큐언. 집요하게 인물을 파고들지만 직설적이지 않고 우아하게 표현하는 문체가 마음에 든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주인공인 피오나 메이는 가정법원 판사, 그중에서도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재판을 주로 맡는다. 사회적으로도 명망이 높다. 이 책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그녀가 맡은 한 재판이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국내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기독교의 한 종파 집안의 아들이 백혈병에 걸린다. 치료를 위해서는 수혈을 해야 하는데, 종파의 가르침 상 수혈은 배교 혹은 파문에 해당하는 행위다. 이를 두고 재판이 벌어진다. 부모는 수혈을 반대하고 아들인 애덤도 부모에게 동의한다. 의료인들은 애덤의 죽음이 뻔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를 해결해 달라 법원에 청구한다.
의료 선택의 자유는 성인의 기본 인권이다. 그렇지만 애덤은 성년까지 몇 달 남지 않은 미성년자이다. 법적으로는 보호자인 부모와 당사자가 동의한다면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아동 보호가 국가의 의무이기에, 이 둘이 충돌하며 재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피오나 메이는 병동의 아이를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강제 수혈을 판결 내린다.
이 중심 사건만 보면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며 저 판결 또한 책의 결말이 아니다. 조금 더 상세히 이야기해 보겠다. 피오나 메이는 50대 정도의 여성이며 엄청난 워커 홀릭이고 완벽주의자이며 아이가 없다. 소설의 첫 장면은 남편과 다투는 장면이다. 남편은 갑자기 죽기 전에 한 번은 '진정한 사랑'을 해보겠다며 (어린) 여성과 사랑을 나누고 싶으며 그렇지만 결혼은 지금처럼 유지하자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고는 집을 나가버린다. 위에 서술했던 중심 재판과 함께 피오나 메이를 둘러싼 가정 불화 스토리 그리고 법원 내의 다른 일정들이 동시에 진행되는데, 개별적이지 않고 나선처럼 꼬이며 복잡하게 얽혀있다.
예를 들면, 피오나 메이에게는 아이가 없다. 그렇지만 아이를 참 좋아하며 집에는 조카들을 위한 방과 장난감들도 있을 정도다. 그녀가 미성년자 재판 담당 가정법원 판사가 된 이유도, 남편과의 불화가 생긴 이유도 아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애덤에 대한 판결도, 그리고 그 후의 행동들도, 이와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건과 감정들을, 집요하고 그렇지만 우아하게 풀어나간다.
소설에 익숙하든 익숙하지 않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추천할만한 소설. 아니, 이언 매큐언.
저널리스트 출신이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 장강명의 에세이. 신문에 쓰던 칼럼들을 모아서 내서 그런 것인지 딱히 일관성이 있는 책은 아니다. 책이라고 하기보다는 글 모음. 가볍게 읽으며 시간을 때울 정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3권짜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 1권만 읽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일어난 유럽의 대격변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19세기 시절의 소설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그때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큰 흥미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빅토르 위고나 발자크, 그리고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들. 시대 배경에 대해 거의 묘사를 하지 않지만 독자들이 유럽 전반의 정세에 대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가정하고 서술하는 것이나, 자신들이 시대와 세계의 중심인 듯 구는 태도가 약간 오만한 듯 보인달까.
이번에 그 선입견을 타파하고자 읽기 시작했다. 1권에는 본격적으로 내용이 안 나오고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3권까지 일단 다 읽어보려 한다.
100여 년 전, 경제학자 케인스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향후 노동 시간이 크게 줄어들리라 예측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많은 시간 일을 하며 살아간다. 한국은 평균 노동 시간이 가장 긴 나라 중 하나이며, 노인 중 노동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우리는 왜 그렇게 일을 많이 해야 할까? 우리가 하는 일들이 모두 사회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 맞기는 할까?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한 회의, 꺼지자마자 잊어버릴 프레젠테이션,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을 모두가 아는 보고서, 일이 잘못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감시와 관리 등등. 이런 가짜 노동들이 너무나 많지 않을까?
<불쉿 잡>이나 그런 류의 책들 읽어봤다면 기시감이 드는 내용들일 수 있다. 이런 류의 책들의 주장, 그리고 발단과 전개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일들, 일부러 효율을 낮춘 일들이 많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해결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책들은 대부분 - 이 책도 포함해서 - 노동 시간을 줄일 수 있으며 줄여야 하고, 사람들에게 더 많은 휴식과 기본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노동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과연 그렇게 흘러갈까? AI와 로봇이 등장한 지금 2026년에도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까? AI와 로봇이 등장해 가짜 노동을 없애고 극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고용이 필요 없어지는 시대가 오면,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리소스를 내어 보편 복지를 위해 힘쓰게 될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고, 그렇게 된들 희망적인 방향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 전반적인 구조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앞이 막막해질 때가 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앞이 막막해진다기보다는, '내가 정말로 그것이 궁금하고 신경 쓰이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대답은 부정이다. 나는 국가, 사회, 지구가 경쟁적으로 앞다투어 나아가는 것을 모두가 알아야 하고 참여해야 하는 당연한 흐름이라 여기지 않으며, 그저 나와 다른 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게임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그럴 때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다고 알지만, 참여가 필수는 아니다. 나는 나만의 게임을 하면 된다. 이런 생각도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전 세계 70억 인구 중에, 상위 5%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내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이런 책을 읽고, 나는 가짜 노동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수준까지만 생각하려 한다. 그리고 내 주변에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메이저 게임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해 뒤쳐진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신경 끄고 너의 게임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사회가 바뀌지 않을까. 참으로 느긋한 생각이다.
1.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전체적인 감상평을 말해봅시다.
: 최근 영화배우들이나 흑백요리사 등을 보면서 생각하던 주제라서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이 책은 결론보다는 이 주제로 토론할 때의 근거를 말해주는 책이다. 작가와 작품 사이의 여러 관계에 대한 이론들과 작품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 사례를 들어 알려준다. 그 사례들이 (저자의 국가인) 프랑스가 중심이 되기에 그다지 와닿지는 않지만 말이다.
책은 총 6장으로 이루어지며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장, 환유관계 : 작품은, 작가를 지칭하는 다른 말이기도 하다. 즉 작가는 자신의 스타일을 지닌 자신의 작품들을 총합해 일컫는 말이다
2장, 유사관계 : 작품 속 인물, 혹은 작품 그 자체가 작가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3장 : 작품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도적으로, 혹은 내적 동기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바로 이해된다.
4장 : "예술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이, 작가 혹은 예술가들에게 독자적인 위치를 부여했다.
5장 : 작품은 작가가 현실참여를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6장 : 페터한트케의 사례에 대해서.
2. 텍스트 내적 화자와 실제 작가의 동일시 문제 :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투영된 작품을 읽을 때, 독자나 관객은 텍스트 내적인 의미와 작가의 텍스트 외적 삶(사생활)을 과연 완벽하게 분리하여 해석할 수 있을까요?
: 1인칭 주인공 소설을 읽을 때, 특히 배경이 현대라면 독자들은 작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게 된다. '실제로' 작가가 겪은 일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고 (특히 어린 독자들의 경우에는), 혹은 화자의 생각과 행동이 작가의 생각과 행동을 어느 정도는 모방한 것이라고 여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은 픽션으로 보아야 한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소재를 찾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이 일정 수준을 넘어갈 때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뿐이지, 모든 작품들은 작가의 사생활이 어느 수준으로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소설을 읽고 해석할 때 작가의 최근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안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해석할 때는 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으나, 작품이 아닌 독서 활동 그 자체에는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은 뒤 질문에서 답하겠다.
3. 예술의 독자성은 어디까지 보호받아야 하는가? 19세기 예술지상주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성취는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문학 비평의 한 축을 담당해 왔습니다. 성취를 이룬 텍스트가 작가의 중대한 범죄나 비윤리적 행위와 엮여 있을 때, 비평과 분석의 영역에서 이 작품의 '미적 가치'는 작가의 과오와 무관하게 온전히 옹호되어야 할까요?
: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다가 잠정적이지만 유효한 대답 하나를 얻었다. 작가의 과오와 작품의 가치는 분리될 수 있는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는 있지만, 작가와 독서, 독서와 작품은 분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작가의 과오는 작품의 가치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주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줄 수밖에 없다. 작가의 작품이 독자에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독자는 그 책을 읽어야만 한다. 독서는 작가-작품과 독자를 잇는다. 작품의 성취와 작가의 과오는 분리할 수 있다. 인성은 나쁘나 요리를 잘하는 셰프의 식당이 미슐랭 스타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작가의 과오에 대해 알게 되면, 그것이 작품을 읽기 전이든 후든, 독서 활동 그 자체가 영향을 받게 된다. 손버릇이 나쁜 것으로 알려진 셰프가 나와서 서빙을 한다면,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될 것이고 음식 맛에도 영향을 주지 않겠는가. 말장난으로 안전지대를 만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4. '맥락화'는 현실적으로 유효한 비평적 실천인가? 사피로는 문제적 작가의 작품을 무조건 삭제하고 퇴출하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 대신, 비판적 주석이나 경고 표지(Paratext)를 달아 텍스트 내의 상징적 폭력을 가시화하고 분석하는 '맥락화'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이 대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5. 문제적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독자의 책임 작가의 이름이 단순한 서명을 넘어 거대한 사회적 권력이자 경제적 자본(브랜드)으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문제적 작가의 작품을 소비(독서, 관람, 구매)하는 행위는 개인적인 감상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없다'는 사회학적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이 논란의 텍스트들을 곁에 두고 읽고 해석하려는 독자(수용자)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윤리적 태도와 책임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두 질문을 묶어서 답해보자. 문제적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을까? 저자인 사피로는 작품을 없애고 퇴출하기보다는 그 문제를 드러내는 방법을 제안했다. 나는 그전에, 누가 무슨 권리로 누군가의 텍스트 선택권을 좌지우지하는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누구도 그럴 권리는 없다. (다만 딱 한 가지 신경 쓰이는 부분은 미성년자의 접근에 대한 부분인데, 이 부분이 포함되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제외하겠다.)
문제가 되는 작가의 텍스트라고 해서, 퇴출한다거나 비판적 주석을 단다거나 하는 의무나 규칙은 필요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어떤 출판사에서 그렇게 한다면 출판사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말이다.)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작가의 작품을 소비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면 될까? 철저하게 개인의 선택이며, 그러한 선택들이 모여서 사회적 결정이 내려진다. 재미가 없거나, 작가의 문제가 드러나서 흥미가 떨어진다면, 자연스레 사회에서 도태되고 사라질 것이 뻔하다. 소비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고 효과도 없다. 요약하자면,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이 모든 것을 정리해 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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