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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주 Jan 03. 2022

문학이란 무엇인가 - 문학의 역할

장 폴 사르트르

총평: 실존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 (1905 ~ 1980)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쓴 책이다. 사르트르는 이 책을 통해, 그리고 그의 족적을 통해 문학은 모름지기 현실의 사회적, 정치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참여문학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이 책에서 제기하는 여러 질문들 - 문체의 중요성, 작가의 의도, 독자의 해석, 시와 산문의 구분 등 - 을 되짚어 보는 것만으로도 발매한 지 75년이 지난 지금에도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작가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글쓰기는 독자에 대한 작가의 호소이다. 독자의 자유를 향해, 자유로운 세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작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글쓰기는 결코 선전이나 오락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억압에서 만인이 해방된, 자유로운 목적의 왕국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1947년 지금 작가는 자본주의의 미국이나 공산주의의 소련을 택하는 것이 아닌, 사회주의적 유럽의 건설에 이바지해야 한다.”




문학을 사랑하고 즐기는 수많은 사람들 중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학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고민을 할만한 사람들은 작가와 문학 비평가들 중 극소수에 그칠 것이다. 그렇다면 사르트르는 왜 이 책을 통해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했을까?

 사르트르는 이 책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쓰기 이전부터 문학은 참여문학이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문학은 '예술을 위한 예술'로 존재해야 한다는 비판, 문학을 정치에 복속시키려고 한다는 비판, 심지어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몸으로 노력하지 않고 앉아서 글이나 쓴다는 비판까지도. 사르트르는 그런 비판을 받아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당신들은 문학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가르쳐주겠다, 라는 위에서 쳐다보는 느낌으로 말이다.

비평가들이 문학이라는 말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 전혀 밝히지도 않고 문학의 이름으로 나를 단죄하는 이상, 그들에 대한 최상의 대답은 글쓰기의 예술을 편견 없이 검토해 보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쓰는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사실, 아무도 이런 물음을 스스로 제기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책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1.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2. 무엇을 위한 글쓰기 인가

3.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4. 1947년 작가의 상황

1~3장에서 자신의 문학관에 대해 설명하고, 4에서 그 문학관을 바탕으로 지금 어떠한 책을 써야 하는지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 글의 목적은 ‘문학은 참여 문학이어야 한다’라는 것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간략하게 요점만 써보려 한다. 논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전적으로 내 탓이며, 실제 책을 읽어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책의 내용이 아닌 내 의견은 //- 뒤에 서술했다.


1.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산문과 시, 음악, 회화를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음악가나 화가는 기호를 사용하여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사물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시 또한 음악이나 회화와 유사하다. 음악이 소리로, 회화가 색채로 사물을 창조해내 듯이 시 또한 '말'을 사용한다. 이때 시인은 말을 '기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 자체를 사용한다. 반면에 산문가는 말을 기호로 하여 작품을 써 내려간다는 점에서 음악가나 화가, 시인과는 다르고, 이러한 차이로 인해 오직 산문이 참여적이다.

//- 이러한 시와 산문의 구별은 이 책의 작품 해설에서도 지적하듯, 그리 명확하지 않고 비판의 여지도 많다. 산문적인 요소를 가진 시나 시적 요소를 가진 산문도 존재한다. 이 책 이후 사르트르는 참여적 시와 음악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아마도 사르트르는 이 텍스트 내에서 논리의 빠른 전개를 위해, 시와 산문의 구별은 부수적인 문제로 취급한 듯하다.

새로운 사물을 창조해내는 다른 예술가들과 산문가는 다르다. 산문가는 '명확성을 기하면서 낱말들을 문장으로 엮는다'. 이러한 행위에는 무언가를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결의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작가가 세계의 어떤 모습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것은 세계의 특정 부분만을 콕 집어서 독자들 눈앞에 드러내는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왜 그 부분에 대해서 글을 썼는지, 다른 부분에 대해서 쓰지 않았는지 작가는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글쓰기는 참여적 글쓰기다.

//-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 텍스트를 읽고 난 이후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모든 행위를 의식적으로 조직하지는 않고, 모든 행위에 근거를 마련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그냥 시간이 남을 때 바로 옆에 종이와 펜 혹은 노트북이 있어서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선천적으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별다른 감각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작가든 글을 쓸 때 작가 자신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글에 큰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또한 대다수의 작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물과 사건들을 관찰하고 보여주는 사람들이기에 사회적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러한 점이 자신의 작품에도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의 참여라면, 모든 글쓰기는 참여적 글쓰기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2.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창조는 오직 읽기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술가는 자기가 시작한 것을 완결시키는 수고를 남에게 맡기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오직 독자의 의식을 통해서만 자기가 제 작품에 대해서 본질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문학 작품은 호소(呼訴)이다.  쓴다는 것은 내가 언어라는 수단으로 기도한 드러냄을 객관적 존재로 만들어주도록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의 <무엇에> 호소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미적 대상이 출현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는 책에도 없고(책에는 다만 그 출현에 대한 요청이 있을 뿐이다), 또한 작가의 마음에도 없다. 작가는 그의 주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 주관성이 객관성으로 이행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술 작품의 출현은 그 이전의 여건으로서는 <설명될 수 없는>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다. 그리고 이 인도된 창조는 절대적인 시작이기 때문에, 가장 순수한 상태의 독자의 자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렇듯 작가는 독자의 자유에 호소하여 그의 작품의 산출에 협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각할 때마다 무엇을 드러낸다. 그리고 드러난 사물에 대해서 우리의 존재는 본질적이 아니다. 창조된 것은 창조 행위에 대해서 비본질적인 것으로 옮아간다. 창조된 사물이 남들의 눈에는 결정적이지만, 창조자의 눈에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창조자는 작품을 만든 수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것은 창조자가 주관적으로 고안해낸 것일 뿐이다. 따라서 창조자는 창조물을 볼 때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성이 보일 뿐이다. 자기의 문장이 자기의 눈에 결코 사물로 비칠 수는 없다. '독자의 미래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말들이 가득 차 있는 200페이지인 반면에, 작가의 미래는 백지일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은 작가의 손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동시에 독자의 읽기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작가가 독자에게 호소하여 내 작품을 완결시켜달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독자를 자유로운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독자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통해 작가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작가가 자유로운 독자에게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의 모습은 자유로 충만한 세계다. 따라서 작가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작품을 써야 한다.  

그러므로 독자의 자유를 생각하지 않고 어떤 특수한 감정 - 분노, 공포, 욕망 등 - 을 강제로 전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독자를 목적이 아닌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독자에게 무언가를 제시하는 데에서 그쳐야 한다. 독자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독자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급한 문학, 혹은 선전물이 될 뿐이다. 마찬가지 기준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굴종을 찬양하는 좋은 소설 또한 있을 수 없다.

//- 작가는 자유로운 독자를 상정하고 독자는 자유로운 작가를 상정한다. 따라서 작가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작품을 써야 한다. 전자와 후자 사이의 연결에 대해 잘 모르겠다. 몇 번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사르트르와 나 사이에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별다른 합의가 없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전자와 후자 사이의 연결고리가 현실이 전제되는 조건에 의해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에 있지 않고, 응당 이래야만 한다라는 ‘당위’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에서는 동의한다. 작가는 자유에 대해 말해야 한다. 작가가 억압되는 사회를 묘사한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그 사회 속에서 자유가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를 더 잘 나타낼 뿐이다. 여러 디스토피아 소설들, 특히 <시녀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하지만 자유와 같은 가치의 문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원하지 않고 피곤해하는 독자들도 많다. 그럼에도 자유에 대해 말해야 할까? 오늘날에는 이 책의 시기(1947년)와는 달리 작가보다 독자가 더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책은 수 없이 많고, 팔리지 않는 작가는 사라진다. 대다수의 독자가 자신에게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 주는 문학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만약 독자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문학, 자신이 가진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문학을 더 선호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유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응당 그래야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책은 독자에게 닿기 전에 사라질지도.​


3.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어떤 한 시대의 문학이 그 자립성에 대한 또렷한 의식에 이르지 못하고 세간의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에 굴종할 때, 요컨대 문학이 무조건적인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그 자신을 생각할 때, 그것은 소외되었다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 문학이 아직도 그 본질을 완전히 내다보지 못했을 때, 다만 형식적인 자립성의 원칙만을 내세울 뿐 작품의 주제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때, 그런 문학은 추상적이라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글쓰기는 독자에 대한 호소이며, 모름지기 자유를 향한 호소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독자에 대한 호소인가? 보편적인 모든 독자에 대한 호소인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영원한 가치라는 말처럼 관념적인 말일뿐이다. 작가는 궁지에 빠지고 기만당하고 부자유한 동시대의 사람들을 위해서 작품을 써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리처드 라이트 (Richard Wright, 1908-1960)라는 위대한 흑인 작가가 있다. 그는 백인에 의한 흑인의 억압을 고발하기 위해 훌륭한 소설들을 썼다. 만약 보편적인 독자라면, 20세기 초의 흑인 문제와 로마 시대의 노예문제에 대해 동일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단은 같은 문제에 직면한 동시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써야 한다. 하지만 (리처드 라이트의 경우에) 백인 독자들을 포기하고 흑인 독자들만을 대상으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먼저 흑인 독자들에서 시작하되, 백인 독자 또한 포섭하여 책임을 깨닫게 하고 수치심을 자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 분열된 독자들을 모두 겨냥할 때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있다. 즉 작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직면한 자유를 억압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되, 최종적으로는 만인의 자유에 호소하여 모두가 자유로운 사회를 실현하고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의 인용문에서 말한 것처럼) 소외되지 말아야 하고 추상적이지 않아야 한다. 문학은 해방되어야 하며 구체적이어야 한다.

//- 자유에 대해 말하면서도 강요하지 말 것. 구체적인 독자를 겨냥하면서도, 최종적으로는 전 세계를 향할 것. 해방되어있고, 구체적일 것. 말은 좋지만 과연 가능할까?

4. 1947년 작가의 상황


우리(현재 유럽의 작가들)에게는 두 선택지가 있다. 자본주의의 미국과 공산주의의 소련. 어느 쪽을 선택하고, 한쪽이 승리하게 되면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전자가 승리하면 노동자는 원자화되고 자본주의는 무자비해질 것이다. 후자가 승리하면 독재와 빈곤이 무한정으로 연장될 것이다. 우리는 제3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주의적 유럽이다.


문학의 가능성은 사회주의적 유럽의 도래 -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적이며 집단주의적인 구조를 갖추고, 더 좋은 제도가 마련될 때 까지는 각각의 나라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주권의 일부를 할애하는 국가들의 집단의 도래와 결부되어 있다.


//- 현재의 유럽 공동체를 어느 정도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선택과 문학 사이의 연결이 이렇게 까지 견고할까? 사르트르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문학의 가능성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견고한 상관관계라기보다는 사르트르의 바람이지 싶다. 만인이 자유로운 목적의 왕국이 건설되고, 문학이 그 건설에 일조하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



작가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글쓰기는 독자에 대한 작가의 호소이다. 독자의 자유를 향해, 자유로운 세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작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글쓰기는 결코 선전이나 오락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억압에서 만인이 해방된, 자유로운 목적의 왕국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1947년 지금 작가는 자본주의의 미국이나 공산주의의 소련을 택하는 것이 아닌, 사회주의적 유럽의 건설에 이바지해야 한다.

하지만 7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목적의 왕국은 건설되지 못했고, 공산주의는 독재로 멸망했다. 결국엔 자본주의가, 시장원리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문학은 그 흐름을 막지 못했다. 2022년의 지금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영상 매체에 뒤처져서 매니악한 일부 괴짜의 취미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누군가는 문학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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