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암스트롱
총평: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며 문명과 종교 그리고 폭력의 관계를 탐구하는 두꺼운 책이다. 종교라는 키워드로 인류사를 보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며, 독자로 하여금 인간과 문명에 내재된 폭력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두껍지만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며, 종교가 인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746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워낙 책 자체가 두껍다 보니 리뷰글도 다소 길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다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짧게 요약하여 말하려 한다.
이 책은 '종교는 본디 폭력적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며, 책 전체를 통해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행동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며, 종교는 편리한 의미부여 수단이었다. 역사 속에서 종교는 수없이 수정되고 재해석되었다. 똑같은 종교적 관행이나 믿음이 폭력적인 사건을 불러올 때도 있었고 평화와 자비를 가져올 때도 있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종교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체계화된 폭력이 내재된 농업사회에서 종교와 신화는 수직구조의 농경 사회 이데올로기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중세에 일어난 이단 사냥, 십자군 전쟁 등은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위해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난 살육이다. 근대에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 노예제도, 식민지배 등은 모두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지만 그 실제 목적은 땅, 노동력, 돈이었다. 이렇듯 종교는 폭력에게 명분을 제공했다. 동시에 종교는 폭력과 전쟁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사람이 나아가도록 도왔다. 탐욕이 사회를 지배할 때에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폭력 없이 유지될 수 있는 국가는 없었기 때문에 종교 이상이 그대로 실현된 적은 거의 없지만, 종교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폭력을 줄이는 데 기여를 했다. 종교 교리에서 말한 대로 한 적은 역사 속에서 거의 없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근대 이전 모든 국가 이데올로기는 종교적이었고, 국가가 하는 모든 폭력에 종교는 관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근대화가 찾아왔다. 근대화에 앞장선 몇몇 국가들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근대화는 천천히 사람들에게 스며들기보다는 폭력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은 기술과 자원으로 어떻게든 급격한 근대화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지만 개발도상국은 그렇지 못했다. 선진국은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강제적인 근대화를 강요한 후 산물은 모두 가져갔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근대화와 세속화는 학살과 굶주림의 형태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중 일부는 종교의 이름으로 근대화를 거부했으며, 선진국에 대한 혐오감과 적개심을 물리적으로 표출했다. 현재 우리는 다양한 지역에서 종교의 이름을 빌린 폭력을 마주한다. 그들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이유는 종교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그런 선택을 내린 테러리스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마땅히 그 행동의 이면을 생각해야 한다. 폭력의 원인을 순전히 종교에게 돌리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옳은 행동도 아니다. '종교는 본디 폭력적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한 후 작가는 다른 질문으로 책을 끝낸다. '누가 세계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문명의 혜택을 누린 자, 모두 유죄.'
저자의 생각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지점에서는 생각이 같다. 문제를 단순하게 보지 말아야 한다, 라는 것이다. 문제가 막 발생했을 때는 놀란 나머지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자들이 여러 나라를 장악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전체주의자들이 악마라고 생각했으며, 그들의 뒤틀린 심성이 전쟁의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연구들을 통해 그런 전체주의에 다른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발생하는 중동의 테러와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사이코패스로, 악마로 생각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부족하다. 그들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9·11 테러를 당한 후 미국은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했고, 2011년에는 빈 라덴 암살에 성공했다. 물론 많은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간인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미국의 대응은 전 세계에 '고통받는 무슬림'의 이미지를 각인시켰으며, 이후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최근 탈레반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에 의해 점령되었다. 일부 사악한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종착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시작은 사건의 이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아닐까.
덧붙여서, '종교는 폭력적이다'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신, 만들어진 위협> 들과 같이 읽는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종교는 본디 폭력적인가? 사람들은 쉽게 '그렇다'하고 대답할 것이다. 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부 종교인들도 일신교의 배타성에 대해서 동의한다. 그들은 십자군 전쟁, 중세 유럽의 이단 심판, 탈레반의 테러를 예시로 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먼저,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종교가 폭력적인가에 대해 말하려면 그것부터 말해야 한다. 현대 서양에서는 '초자연적인 신을 중심으로 한 의무적인 믿음과 제도와 의식의 일관된 체계'라고 정의하곤 한다. 과거에도 그랬을까? <옥스퍼드 고전 사전>은 그리스어나 라틴어에 영어의 '종교'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고 말한다. religion(종교)의 유래인 라틴어 religio는 '의례적 준수사항들을 주의 깊게 수행하는 것'과 관련된 단어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종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것은 근대 이전에 삶과 종교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교를 일상, 정치와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특이한 사건이다. 근대 이전에는 종교는 인간의 모든 생활에 함께했다. 그렇다면 종교는 '본디' 폭력적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종교를 다른 것들과 똑 떼어서 볼 것이 아니라 인류사와 함께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고대 문명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역사 속의 문명, 종교, 폭력의 관계에 대해 다룬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수메르, 인도, 중국의 고대 문명에 대해 다룬다. 2부에서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발전에 대해 다루며, 3부에서는 근대 이후의 종교에 대해 다룬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시기는 언제인가? 바로 수렵채집 시기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 등장했고, 농경사회는 약 1만 년 전에 시작했다. 인류는 수렵채집 시기에 적합하게 진화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오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폭력적인 부분이 내재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생존과 재미를 위해 사냥이나 전쟁 등의 폭력적인 행위를 한다. 그와 함께 감정을 담당하며 협동과 배려를 유발하는 부분과 추상적 사고력을 담당하는 부분이 뇌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활동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앞으로의 인류사에서 계속해서 목격할 것이다.
가장 오래된 문명인 수메르 문명부터 시작해보자.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5500년, 그러니까 약 7500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수메르 문명의 왕조는 약 기원전 30세기쯤에 시작되었다. 특히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28세기 즈음 수메르 남부 도시국가 우르크의 왕인 길가메시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다. 이 서사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기록에서 이 5천 년 전의 국가에서 비교적 최근인 약 500년 전까지 지구를 지배한 체제와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지구라트로 상징되는 수직적이고 폭력적으로 다수를 지배하는 농경 국가 시스템이다.
수메르는 농업이 문명의 경제적 기초 역할에서 물러나는 근대에 이르기 전까지 모든 농경 국가를 지배하게 될 구조적 폭력 체계를 만들어냈다. 그 엄격한 위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상징인 거대한 계단형 신전 탑인 지구라트로 상징되었다. 수메르 사회 또한 위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가장 높은 귀족의 첨탑에서 절정에 이르는 층층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개인은 모두 자기 자리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런 잔인한 구조가 없었다면 인간은 진보를 가능하게 해 준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문명 자체가 계발되기 위해서는 유한계급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우리의 가장 훌륭한 성취는 수천 년 동안 착취당한 농민의 등 위에 세워진 셈이다. 수메르인이 문자를 발명한 목적이 사회 통제였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인도나 중국 등 다른 고대 문명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고대 문명에서 인간은 수렵 채집 시기를 벗어나 농경사회로 들어가면서, 계급이 발생해 귀족과 대중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소수의 귀족은 대다수의 대중을 억압하며 잉여 자원을 탈취한다. 그리고 그 자원들이 현대 문명을 만든 기반이라 할 수 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귀족은 대중을 최저 생활 수준에서 살도록 강제함으로써 인구 성장을 억제하여 인간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 농민에게서 잉여를 빼앗지 않았다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근대 문명을 이끌어낸 기술자 과학자 발명가 예술가 철학자를 뒷받침할 경제 자원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사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 지적하듯이 이런 체제 폭력에서 혜택을 본 우리는 모두 5천 년 동안 대다수 사람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과정에 연루되어 있다. 또는 철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의 말을 빌려올 수도 있다. “문명의 증거는 동시에 야만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소수는 어떻게 다수를 효과적으로 억압했을까? 물론 제도나 군대를 통해 폭력적으로 통제했다. 그렇다면 그 제도의 근거는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종교와 신화다. 두 가지를 떼어 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문명의 지도층은 언제나 자신들의 제도 - 대다수를 억압하고 소수에게 자원을 집중하는 제도 - 를 합리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킨다. 그것이 종교가 된다. 예를 들면 인도에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카스트 체제가 존재한다. 사람은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라자냐): 전사, 바이샤, 수드라의 네 계급으로 나뉜다. 각 구성원은 전체를 위하여 개인을 희생해야 하며, 각 구성원에는 신이 부여한 신성한 의무가 존재한다. 인도 신화 (리그베다)에서는 최초의 사람인 ‘푸루샤’의 몸이 세계를 만드는데, 네 계급이 각각 몸의 다른 부위에서 나왔다.
그들이 푸루샤를 나눌 때 몇 조각을 만들었던가?
그의 입, 그의 팔은 뭐라고 불렀는가?
그의 허벅지와 발은 뭐라고 불렀는가?
사제(브라만)는 그의 입이었다.
그의 두 팔로 전사(라자냐)를 만들었다.
그의 허벅지는 평민(바이샤)이 되었고, 그의 발에서 종(수드라)이 나왔다.
- 리그베다
따라서 브라만 계급은 사회의 제의를 맡았고, 라자냐는 전쟁을 담당했으며, 바이샤와 수드라는 농경국가의 생산 업무를 담당한다. 이러한 의무는 우주의 질서이며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신화는 폭력적인 농경사회의 제도를 합리화해 모든 사회 구성원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왔다. 피지배계층인 바이샤와 수드라의 고통을 합리화해 그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배계층인 브라만과 크샤트리아의 죄책감 또한 덜어주었다. 이 중 전사 계급인 크샤트리아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폭력이 일상이었으며 전쟁은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은 이렇게 설명한다. “전쟁은 아마도 어떤 지배 계급이 경제를 확장하고 잉여를 추출하려 할 때 이용할 수 있는 단일한 방식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신속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지배 계급은 늘어나는 인구를 위한 새로운 경작지를 확보해야 했으며, 목축민의 습격을 막아야 했다. 따라서 전쟁을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수메르 문명에서는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났고, 인도나 중국 문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 문명은 예외였다. 나일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목축민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윤의 원천이었으며, 또한 명예와 영광, 그리고 쾌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농업은 다수를 강압적으로 착취해야 하므로 신화와 종교를 통해 합리화가 필요하지만, 전쟁은 정신과 물질 양 쪽 측면에서 모두 합리화가 필요 없는 매우 당연하고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명에서는 모든 건강한 남자가 전쟁에 참여했다. 귀족들을 부유하게 만들 전쟁이 너무 잦아 귀족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 때 조차도 전쟁은 지속되었다. 반복된 전쟁은 모두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는 모든 고대 문명의 공통된 문제였다.
시간이 지나며 훌륭한 해결책이 한 가지 출현했다. ‘농경 제국주의’이다. 한 지역이 많은 국가들로 쪼개져 서로 수많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가 그 지역을 재패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을 최소한으로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이 해결책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발생한다. 인도에서도 그렇고 중국에서도 그렇다. 제국의 지도층은 잦은 전쟁이 국가에 손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무분별한 전투를 막아야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전쟁은 합리화가 필요 없는 당연한 행위였기 때문에, 전쟁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합리화가 필요했다. 제국은 종교와 신화를 통해 폭력을 억누를 수 있었다. 앞서 본 것처럼 인도 신화에서는 크샤트리아 계급에게만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중국 문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문명에서도 한 국가로 통일되기 이전부터 ‘예’라는 규범이 국가법처럼 존재했고, 이를 통해 무분별한 폭력이 억제되었다.
예는 전쟁의 폭력을 정중한 게임으로 바꾸어 통제하려 했다. 많은 적을 죽이는 일은 천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은 ‘오랑캐의 길’이었다.
여기까지 고대 문명에서 신화와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구조적인 폭력이 체계화되었고, 신화와 종교는 그것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동시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잦은 전쟁을 억제하고 되도록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고대 문명 이후 지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종교라고 생각하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등이 출현한다. 이들 종교는 어떻게 출현했으며, 어떤 역할을 수행했을지에 대해 알아보자.
히브리 성경은 기독교의 구약성경이며 유대교의 성전이며 이슬람교에서도 인정되는 성서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였으며 예수 사후 완전히 갈라진다. 후에 서술할 이슬람교 또한 구약성경을 인정하지만, 다른 상황에서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구약성경은 기원전 1750년경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농경사회와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라고 명령하는데서 시작되며, 중간에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로 이주했다가 기원전 1250년경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고고학적 기록으로 검증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역사서라기보다는 민족 서사시다. 이 서사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민족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떠나라고 하며 시작하는 점, 가나안 도시국가는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점 등을 미루어보면 이 서사시는 농경사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서사시적인 이야기 (구약)는 초기 이스라엘 백성이 억압적인 농경 국가에 등을 돌리겠다는 원칙적인 결정을 했다고 암시한다. 고지대 촌락에 있는 그들의 집은 수수하고 균일했으며, 궁궐이나 공공건물은 없었다. 이곳은 평등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관습적으로 계층화된 국가에 대한 사회적 대안을 창조하기 위하여 부족 조직으로 돌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구약성경은 기원전 6세기경 이스라엘 백성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의해 추방당했을 때 최종 편집되었다. 이 성경의 메시지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거대 국가에 맞서서 작은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에 대한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지도층은 자신들이 주변 민족들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귀족에게 착취당하지 않기 위해 땅의 대가족 소유를 유지하고, 사회적 취약층을 지원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이자 대출을 하는 등의 정책을 실행했다. 이러한 여러 방법을 통해 그들은 억압적인 농경사회를 벗어나려고 했다. 성경 속에서 야훼는 계속해서 농업 문명을 비판한다. 바벨탑 이야기는 그들을 지배하던 메소포타미아의 국가 바빌론이었으며,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바빌론을 떠나라고 명령한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 생활의 자유와 평등을 얻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여기서 나온다. 이스라엘 민족은 농경 국가를 떠나고자 했지만, 농경 국가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이집트로 피난한 이야기는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인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지만, 실행 가능한 대안을 만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정착 후에도 초반에는 계급이 나누어지지 않은 평등한 국가를 만들었지만, 농경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강한 국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왕을 세운다. 이상과 현실에서 타협점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는 유일신교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바알과 같은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유일신교가 된 것은 그 후에 일어난 일이다. 이스라엘은 네부카드네자르나 다리우스 등 강력한 군주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그 이후 로마 제국에게 점령당해 식민지가 된다. 로마 제국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는다. 예수는 바로 이때 태어났다. 이때 이스라엘은 높은 세금과 전쟁에 의한 초토화 및 토지 몰수 등으로 매우 가난한 사람들과 극소수의 매우 부유한 사람들로 나뉘어있었다. 예수는 맨 처음 기독교의 이상이었던 자유, 평등, 베풂, 사랑을 토대로 로마 제국에 맞선다. 중국의 공자, 인도의 붓다와 마찬가지로 귀족에게 맞서 '이타'라는 이상을 계발한 것이다. 예수 사후, 로마 제국의 억압 속에서 암암리에 기독교는 퍼져나간다. 로마 제국의 억압 속에서 은밀하고 고립된 공동체 속에서 기독교가 퍼져나간다. 그런 고립된 공동체 속에서 퍼져나간 기독교는 이전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게 된다. 특히 신약성경 중 <요한계시록>은 그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요한은 예수를 '대량 살육과 유혈을 불사하고 로마를 물리칠 무자비한 전사'로 표현한다. 이러한 폭력성과 함께, 자신들이 생각하는 관점과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을 '이단자'로 여기는 배타적인 면모를 가지게 된다. 이때 우리는 역사적으로 되풀이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을 마주하게 되면 배타적인 특성이 생기며, 자신들의 땅이 식민지가 된 민족은 종교적 관행에 심하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의 마지막에서, 그리고 바로 현실에서 이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지배 권력의 호전적인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전통에 맞추려다가 그 과정에서 전통을 왜곡한 것은 이들이 마지막이 아니다. 여기에서 원래 제국의 폭력과 잔혹성에 격렬하게 맞서던 야훼는 첫째가는 제국주의자로 바뀌게 되었다.
그 후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고, 교황을 수장으로 둔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형태가 완성된다. (이런 변화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 또한 많았다. 예수의 말을 지키기 위해 출가하여 자급자족하며 잉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평등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수도자(monachos, 현재는 monk)라고 부른다.)
그다음은 이슬람교에 대해서 말해보자. 이슬람교는 유대교나 기독교와 같은 뿌리인 구약성경에서 유래한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예수 사후 갈라지게 되며, 이슬람교는 기원후 7세기쯤 메카에서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에 의해 출현한다. 메카는 농사를 짓기 적합한 땅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부족민들은 목축을 통해 살아갔다. 여러 부족들은 언제나 기아에 허덕였고 식량과 물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전쟁을 통해 낙타나 소 식량 노예 등을 전리품으로 얻었지만 피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살상은 최대한 피했다. 농경사회가 아니었기에 잉여자원을 축적하는 귀족들은 없었고, 얻은 물자를 공평하게 나누며 생활했다. 그러다 기원후 6세기 경이되자 메카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몇몇 부족들은 이제 사적인 재산들을 축적하며 귀족이 되었다. 물자를 공평하게 나누던 이전과 달리 귀족들은 고아와 과부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했다. 또한 부족 간의 전쟁이 심화되면서 살상 또한 서슴지 않는 풍조가 생기게 된다.
무함마드는 이런 메카 자본주의의 탐욕과 폭력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에 맞서 공동체를 만들었다.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쿠란(=암송)'이라고 불리는데, 쿠란은 이슬람교의 기초가 된다. 쿠란은 특별하지 않다. 이미 이 지역에 퍼져있던 고대 기독교에 대한 내용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이슬람교인은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으며, 알라(=하느님)를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과 동일한 신으로 생각했다. 부를 축적하지 않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으며, 반격하지 않고 복수를 알라에게 맡기라는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유일신 교적인 성격 때문에 메카의 기성 권력자들의 반감을 사고, '메디나'라는 오아시스 도시로 이주하게 된다. 그 후 다양한 이민자들을 수용해 메디나는 단일 부족이나 민족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 아랍인과 유대인 부족이 모두 존재했다 - 원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술도 땅도 없던 메디나는 약탈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 점점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 과정에서 내적인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무함마드는 한 부족의 남자 700명을 죽이고 여자와 아이는 노예로 팔았다. 이것이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무함마드가 말하던 것과 사상과는 다른 잔혹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 후에는 대부분 평화적인 협상으로 제국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쿠란은 무함마드의 메시지를 암송하던 것으로, 고정된 텍스트가 존재하지는 않았다. 무함마드 사후 20년쯤 뒤에 표준화되었다. 따라서 모순적인 부분도 많이 존재한다.
쿠란은 원래 구전되고 암송되고 외우던 것이었다. 그 결과 ‘예언자’가 살아 있는 동안, 또 사후에도 텍스트는 유동적이었으며, 사람들은 자신이 들은 각기 다른 부분을 기억하고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쿠란은 일관된 계시가 아니다. 계시는 특정 사건에 대응하여 무함마드에게 하나씩 찾아왔기 때문에 여느 경전이나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모순이 있다. 특히 전쟁과 관련된 부분이 그렇다. 지하드(‘투쟁’)는 쿠란의 주요 주제로 꼽히지는 않는다. 사실 이 말과 그 파생어들은 겨우 41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그 가운데 10개만이 분명하게 전쟁을 가리킨다. 이슬람의 ‘내어줌’은 우리의 내재적 이기심에 맞선 끊임없는 지하드를 요구한다. 이것은 때로는 ‘싸움’을 포함하지만 시련을 용감하게 견디고 곤경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 또한 지하드로 묘사된다.
신은 때때로 공격을 요구했지만 어느 경우에는 방어적 전쟁만을 허용했고, 자비를 베풀 때도 무자비할 때도 있었다. '지하드'라는 말은 요즈음에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 혹은 이슬람교의 성전(聖戰)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싸움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베푸는 것 또한 지하드이다. 쿠란 이외에도 하디스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반응 등을 기록한 책이다. 후대에는 하디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전쟁이 필요한 시기에는 "나는 민족들이 '알라'외에 다른 신은 없다'라고 증언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라고 하는 하디스, 혹은 전쟁이 다른 지하드 - 기도나 금식 - 보다 훨씬 귀중하다고 말하는 하디스가 퍼진다. 이 하디스들 중 일부는 위작으로 생각되는 것도 많다. 즉 종교는 정치적 경제적 목적에 따라 의도적인 도구로, 혹은 대중의 심리를 반영하는 창구로 사용된다. 이러한 광경은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종교에서도, 역사 속에서 수 없이 반복된다. 십자군 전쟁, 중세의 이단 사냥,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등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황과 왕 사이의 정치적 힘겨루기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도 신앙적인 이유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명성과 부 혹은 땅을 얻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 다양한 사료를 통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앙적 목표나 종교적 인식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속적인 이유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095년 11월 27일 역시 클뤼니의 수사였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프랑스 남부 클레르몽에서 열린 ‘평화 공의회’에서 연설을 하여 제1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그는 샤를마뉴의 후예인 프랑크족에게 직접 호소했다. 이 연설의 당대 기록은 없으며 우르바누스의 편지들로부터 그가 했을 법한 말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우르바누스는 그 무렵 이루어진 개혁과 보조를 맞추어 프랑키아의 기사들에게 같은 기독교인을 공격하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하느님의 적들과 싸우라고 촉구했다. 우르바누스는 그레고리우스 7세와 마찬가지로 프랑크족에게 형제, 즉 동방의 기독교인을 “무슬림의 압제와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라”라고 촉구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성지로 가서 예루살렘을 해방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평화’는 기독교 세계에 집행될 것이며 동방에서는 하느님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십자군 원정은 동방의 형제들을 위해 고상하게 목숨을 내놓는 사랑의 행동이 될 것이다. 그들은 집을 떠났기 때문에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세상을 버린 수사들과 똑같이 천상의 보답을 얻게 될 것이다. 우르바누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신앙적인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원정은 교회의 리베르타스를 확보하기 위한 우르바누스의 정치적 공작에도 필수적이었다. 그 전 해에 우르바누스는 하인리히 4세의 대위 교황을 라테란 궁에서 내쫓고, 클레르몽에서는 간통에 기초한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프랑키아의 필리프 1세를 파문했다. 이제 우르바누스는 양쪽 군주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고 동방으로 대규모 군사 원정단을 파견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의 군사적 방어를 통제한다는 왕의 특권을 찬탈한 셈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단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사건들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이 또한 종교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다분했다. 전염병과 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했을 때 다른 종교 공동체 (주로 유대인)의 탓으로 돌려 박해하는 이유는 명확한 악을 만들어 국민을 쉽게 안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카타리파는 떠돌아다니는 삶 속에서 청빈, 순결, 비폭력에 헌신하며 기독교의 이상을 실천했지만, 이들은 기성 가톨릭 체계가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주어 지도층에게 죄책감을 가져다주고 또한 국가에 정치적인 혼란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숙청당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예시들이 있다.
서유럽에서 이단은 늘 순수한 신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였으며, 공공질서를 위협했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억눌렀다. 따라서 엘리트 가운데 이단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이단은 자신들이 믿는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하거나 하지 않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16-20 세기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종교의 이름을 빌린 학살 행위가 있었다. 에스파냐의 남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 있었고, 17세기부터 최근까지 북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 있었다. 처음 몇 번에는 전투가 오고 갔다고 하지만, 기술의 차이로 인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들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러한 학살을 수백 년 동안 자행했다. 앞서 본 것처럼 그것은 종교의 가르침을 자기들 입맛에 맞춰 멋대로 해석한 결과다.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는 원주민을 죽이는 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 그들은 30년 전쟁 중에 잉글랜드를 떠났기 때문에 그 무시무시한 시기의 호전성이 몸에 밴 상태였으며, 성경을 매우 선택적으로 읽어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예수의 평화주의적 가르침은 무시하고, 히브리 경전 일부에 나오는 전투적 태도에 의존했다. “하느님은 탁월한 전사다.” 알렉산더 레이턴은 그렇게 설교했다. 성경은 “가장 훌륭한 전쟁 지침서다.” 존경받는 목사 존 코튼은 그들이 원주민의 영토에 대한 천부의 권리를 지녔을 뿐 아니라 그들의 땅을 차지하라는 “하느님의 특별한 위임”을 받았기 때문에 상대의 “도발이 없어도” 공격 — 정상적으로는 불법인 절차였다. — 을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여러 종교의 시작과 발전에 대해 알아보았다. 기독교, 이슬람교는 농경사회의 폐해에 반대하며 생겨나 평등과 자유, 베풂을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여러 요인들로 인해 쉽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주의와 만났으며, 이슬람교는 지도층이 입맛에 맞게 해석하며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종교는 폭력에 대한 대안을 제공했으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탐욕에 맞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일깨워 주는 역할도 했다. 종교의 폭력성의 근거로 흔히 사용되는 십자군 전쟁, 유럽의 이단 사냥,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의 경우에도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위해 종교의 이름을 빌려다 썼을 뿐이다. 그렇다면 현대에 발생한 종교적 문제인 근본주의는 어떨까?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는 용어 자체가 1920년대에 기독교의 ‘근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미국 프로테스탄트가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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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근본주의 운동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예를 들어 16세기 이전의 기독교인은 늘 성경을 우화적으로 읽으라는 권고를 받았다. 심지어 칼뱅조차 <창세기>의 첫 장이 생명의 기원에 관한 사실적 설명이라고 믿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믿는 ‘광신적 인물들’을 신랄하게 꾸짖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라는 주장에 비해 근본주의는 혁신적이다. 근대 이전 대부분의 신도들은 성경이 실제 일어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우화적이고 교훈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은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텍스트라기보다는, 추후에 재해석될 수 있으며 모순이 포함된 유동적인 텍스트였다. 그렇다면 왜 근본주의자들은 그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
모든 근본주의는 현대의 전쟁과 폭력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곤 한다.
미국에서 근본주의가 탄생하던 시기는 근대성이 낡은 진리를 부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다. 종교가 정치적 영역에서 추방되고 사적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저항 중 하나가 근본주의 운동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은 세계대전 동안 발생한 학살이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한 전투라고 생각했으며, 자신들이 세계를 파괴할 사탄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일으킨 것이 과학 때문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진화론조차 물고 늘어졌다. 다행히도 미국이 비교적 안정된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의 편집증적 망상은 폭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물론 학교에서 창조론을 의무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도 만만찮은 폭력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의 중동에서는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미국과 대조적으로 무슬림 근본주의는 종종 물리적 공격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 또한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결과는 이슬람이 체질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보다 폭력적인 성향이 강해서가 아니라 무슬림이 훨씬 가혹하게 근대성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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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단체)은 근대성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에게 근대는 결국 소련의 총과 공습의 형태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전통적인 부족 규범으로 통치했고, 이것을 신의 통치와 동일시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근대화는 정치적 독립을 가져왔고, 기술 혁신을 통해 개선된 생활환경을 가져왔다. 하지만 식민지의 사람들에게 근대화는 총칼을 앞세운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500년간 진행되어 정착된 근대화를 수십 년 만에 강제로, 피상적으로, 폭력적으로 달성해야 했다. 책 속의 많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식민지 근대화의 산물은 서양 제국이 가져갔으며, 만약 식민지가 자립적으로 근대화를 하려고 했을 때 그것을 쉽게 수포로 돌렸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이 발생한 후, 제국들은 물러났지만 그 자리를 그 나라의 군인들이 차지했다. 그들은 유럽 지배자들보다 더 강제로, 더 피상적이고 더 폭력적인 근대화를 추진했다. 결국 근대화는 식민지 국민들에게 재앙이었으며, 그들이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 과정 속에서 탈레반과 같은 테러단체들이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종교는 본디 폭력적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며, 책 전체를 통해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행동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며, 종교는 편리한 의미부여 수단이었다. 역사 속에서 종교는 수없이 수정되고 재해석되었다. 똑같은 종교적 관행이나 믿음이 폭력적인 사건을 불러올 때도 있었고 평화와 자비를 가져올 때도 있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종교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체계화된 폭력이 내재된 농업사회에서 종교와 신화는 수직구조의 농경 사회 이데올로기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중세에 일어난 이단 사냥, 십자군 전쟁 등은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위해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난 살육이다. 근대에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 노예제도, 식민지배 등은 모두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지만 그 실제 목적은 땅, 노동력, 돈이었다. 이렇듯 종교는 폭력에게 명분을 제공했다. 동시에 종교는 폭력과 전쟁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사람이 나아가도록 도왔다. 탐욕이 사회를 지배할 때에 사람들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폭력 없이 유지될 수 있는 국가는 없었기 때문에 종교 이상이 그대로 실현된 적은 거의 없지만, 종교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폭력을 줄이는 데 기여를 했다. 종교 교리에서 말한 대로 한 적은 역사 속에서 거의 없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근대 이전 모든 국가 이데올로기는 종교적이었고, 국가가 하는 모든 폭력에 종교는 관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근대화가 찾아왔다. 근대화에 앞장선 몇몇 국가들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근대화는 천천히 사람들에게 스며들기보다는 폭력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은 기술과 자원으로 어떻게든 급격한 근대화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지만 개발도상국은 그렇지 못했다. 선진국은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강제적은 근대화를 강요한 후 산물은 모두 가져갔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는 종교의 이름으로 근대화를 거부했으며, 선진국에 대한 혐오감과 적개심을 물리적으로 표출했다. 현재 우리는 다양한 지역에서 종교의 이름을 빌린 폭력을 마주한다. 그들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이유는 종교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그런 선택을 내린 테러리스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마땅히 그 행동의 이면을 생각해야 한다. 폭력의 원인을 순전히 종교에게 돌리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옳은 행동도 아니다. '종교는 본디 폭력적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한 후 작가는 다른 질문으로 책을 끝낸다. '누가 세계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문명의 혜택을 누린 자, 모두 유죄.'
우리 시대의 폭력과 직면할 때는 우리를 불편하고 우울하고 좌절하게 하는 세계적 고통과 박탈 때문에 마음이 무정하게 굳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대적 삶의 이런 괴로운 사실을 묵상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인간성의 가장 좋은 부분을 잃어버릴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종교가 가장 훌륭했을 때 수백 년 동안 해 온 일을 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세계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구축하고 모두에 대한 존중과 평정의 감각을 계발하고 우리가 세계에서 보는 고난에 책임을 져야 한다. 역사상 아무리 훌륭한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전사의 오점에 물들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종교적인 사람이든 세속주의자든 우리 모두 현재 세계의 상태에 책임이 있다. 마마나 비비의 아들이 “아주 간단히 말해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은 국제 공동체의 오점이다. 희생양 의식은 공동체가 그 비행과 맺고 있는 관계를 끊으려는 시도였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저자의 생각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지점에서는 생각이 같다. 문제를 단순하게 보지 말아야 한다, 라는 것이다. 문제가 막 발생했을 때는 놀란 나머지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자들이 여러 나라를 장악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전체주의자들이 악마라고 생각했으며, 그들의 뒤틀린 심성이 전쟁의 큰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많은 연구들을 통해 그런 전체주의에 다른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발생하는 중동의 테러와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사이코패스로, 악마로 생각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부족하다. 그들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9·11 테러를 당한 후 미국은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했고, 2011년에는 빈 라덴 암살에 성공했다. 물론 많은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간인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미국의 대응은 전 세계에 '고통받는 무슬림'의 이미지를 각인시켰으며, 이후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최근 탈레반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에 의해 점령되었다. 일부 사악한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종착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시작은 테러의 이면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