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총평: 1989년에 출판된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일러스트와 함께 그림책 느낌으로 재출판한 책이다. 짧고 심플하다. 요즘이라면 페미니즘 소설로 분류되었을지도 모른다.
경향이라는 말에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집안일이었다. 내가 아무런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하고 있는 온갖 집안일. 요리며 쇼핑이며 빨래며 육아, 그런 것은 참으로 경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략)… 그렇게 나는 구두 뒤축이 한쪽만 닳듯이 경향적으로 소비되어 간다. 그것을 조정하고 쿨 다운하기 위해 하루하루의 잠이 필요하다. …(중략)… 하지만 그렇다면 내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경향적으로 소비되고, 그 쏠림을 조정하기 위해 잠을 잔다. 그것이 매일매일 반복된다 …(중략)… 그 반복의 끝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뭔가 있기는 한 걸까. 아니, 아무것도 없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다 …(중략)… 나에게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나는 책을 읽을 것이다. 나는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잠을 17일째 자지 못하는 가정주부. 그녀의 일상은 요리나 빨래 등의 집안일, 육아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고 숨 쉴 틈도 없이 바쁜 것은 아니다. 매일 수영장에 다니는 등 여유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어느 날 가위에 눌린 후, 잠이 오지 않는다. 피곤한데 잠이 들지 않는 그런 불면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결혼 전에는 독서광이었고 단 음식을 좋아하던 그는 결혼 후에는 그 두 가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안나 카레니나’를 펴고 레미마틴(코냑)과 밀크 초콜릿을 곁들인다. 그러다 잠에 대해 어떤 책을 읽게 되고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잠을 자지 않는 인생을 택한다. 책을 읽고, 코냑을 마시고, 밤 드라이브를 즐기는 인생을. 그러다 어느 날 새벽, 어떤 남자 두 명이 그녀의 차를 양옆에서 사정없이 흔드는 장면으로 책이 끝난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육아와 집안일로 가득 찬 일상에 회의감을 느낀 어느 가정주부가 인생의 새로움을 찾으려다 위협에 맞닥뜨리다.>
짧고, 심플하다. 원래는 단편소설인 것을 삽화와 함께 번듯한 한 권의 책으로 재출판한 것이니, 다른 책들에 비하면 짧은 것이 당연하다. 순식간에 책으로 들어가고 순식간에 끝나버린다. 하루키의 장편소설은 다소 난해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을 받는다. 하루키 장편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현실에 없는 비현실적인 여러 가지 - 인물, 배경, 소재 등등 - 가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별 설명 없이 당연하다는 듯 서술된다. 독자가 그에 대한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특이함이 등장하면서 나아가고, 결국엔 그것들이 얽히면서 당최 무엇인지 모를 매듭같이 보인다. 그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 무엇인지 해석하는 방향도 있을 것이고, 그냥 그 매듭 그 자체로 즐길 수도 있다. 단편소설은 그런 매듭이 생기기에는 짧은 호흡이기 때문에 훨씬 더 명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책에서 ‘잠’이란 ‘경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특성 때문에, 한쪽으로 쏠린 육체와 정신을 조정하기 위한 행위’이다. 과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 책에서. ‘나’는 경향이라는 말에서 집안일을 떠올린다. ‘나’의 인생의 2/3은 집안일로, 그리고 1/3은 집안일로 인한 쏠림을 조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잠을 자지 않기로 결정한다. 적어도 인생의 1/3은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 결혼 전 까지는 대부분의 용돈을 책 구매에 쓸 만큼 독서광이었으며, 밀크 초콜릿 같은 단 음식도 즐기던 그녀는 결혼 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만두고 있었다. 이제 잠을 자지 않으면서 생긴 1/3이라는 시간을 자신에게 쓰기로 하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코냑과 밀크 초콜릿을 곁들인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밤에 드라이브를 나간 그녀의 차를 수상한 사람들이 가열차게 흔드는 장면이다. 언제나 평범함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채찍을 내려치기 마련이기에.
생활과 인생은 다르다. 돈을 벌고, 먹고, 자고, 육아, 청소 등은 생활이다.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고, 자신의 개성을 찾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인생이다. 누구든 정도는 다르지만 인생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인생을 추구하는 것은 어렵다.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도 24시간이 모자라게 느껴진다. 주인공은 결혼 전에는 취미가 있었지만 결혼 후 생활에 치이다 보니 하지 못하게 되고 24시간을 생활과 관련한 일들로 가득 채우게 되고 말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억눌려있던 것들이 분출한 것이다. 주인공은 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 문학적으로 해결책을 찾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다. 우리 개인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