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4-7장
폭력의 역사를 검토하는 작업은 오늘날 우리가 개탄하는 폭력들을 과거에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알고서 도저히 못 믿겠다며 고개를 젓는 일의 반복이다.
이 책에서 결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은 고통스럽다. 당연하게도 ‘폭력’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을 읽는 것이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결론의 감동과 강렬함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리뷰에서는 제외했다. 하나하나 쓰기도 번거롭고, 읽는 것도 힘드니까. 거기다 그것까지 다 쓰면 책을 살만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난 부분 요약 및 예고
1장에서 간단하게 폭력의 역사를 살펴보았고, 2장에서는 국가가 폭력을 감소하는 <평화화 과정>에 대해서, 3장에서는 법과 경찰, 상업으로 촉발된 <문명화 과정>으로 인한 폭력의 감소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평화화 과정은 살인과 전쟁에서 절대적인 통제와 착취로 폭력을 이동시켰고, 문명화 과정은 폭력을 사회의 변두리로 몰아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절대적인 폭력의 수는 대폭 감소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다음 4-7장에서는 기분 좋은 소식이 우리를 기다린다. 앞서 <평화화 과정>과 <문명화 과정>에서는 국가의 보복이나 상업적인 이득이라는 미끼가 인간의 폭력을 감소시켰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그런 폭력 제동장치가 사라졌을 때 언제나 상대방을 거꾸러뜨릴 기회만 엿보는 인간이 도사린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4-7장에서는 상대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생명을 존중하고, 여성과 아동, 동성애자와 동물에 대한 권리를 존중하는 조금 더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4장 인도주의 혁명
: 수천 년 간 문명의 일부였던 폭력적 관행 (마녀 화형, 고문, 노예제 등)이 최근 수 백 년 사이에 폐지되었다.
5장 긴 평화
: 세계 대전 두 번 이후 50년간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6장 새로운 평화
: 냉전 종식 후 20년 간 전쟁, 집단 살해, 테러 등의 폭력적 사건이 꾸준히 감소했다.
7장 권리 혁명
: 최근 들어 인종, 여성, 아동, 동성애, 동물에 대한 폭력이 감소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2-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문명이 만들어진 이후 폭력이 점차 감소했다. 그 근거로는 살인율의 감소를 들었다. 살인율은 일반적으로 다른 중범죄율과도 비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범죄로 간주되지 않는 다양한 폭력이 존재했다. 인간 제물, 마녀사냥, 신성모독-이단-배교를 이유로 하는 학살, 다양한 고문, 사형, 노예제, 정치적 폭력, 주요국 사이의 전쟁 등이다. 현재는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범죄인 행위들이지만, 문명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수천 년 간 당연한 행위였다. 너무 옛날에 일어난 일들 아니냐고? 인도에서는 1829년에 미망인이 남편의 시체를 태우는 장작더미에 몸을 던지는 풍습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1716년은 영국에서 최후로 마녀를 교수형에 처한 해고, 1749년은 유럽 전역에서 마지막으로 마녀를 화형에 처한 해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종교재판소는 18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1834년과 1821년에 문을 닫았다. 유럽인들은 1764년 <범죄와 처벌>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다양하고 끔찍한 고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 수십 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고문이 사법제도 내에서 사라졌다. 노예제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끝난 후인 1865년 폐지되었고, 유럽에서는 1860-1870년 사이에 채무노예 제도가 대부분 폐지되었다. 카타르에서는 1952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은 1962년, 모리타니는 1980년에 폐지했다.
문명이 생기고 법이 확립되고, 또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앞의 여러 폭력들도 감소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18세기가 되기 전 고문제도를 비판하는 여러 책들이 나오기 전까지 문제의식도 크게 없었다. 특히 노예제에 대해서는 경제적 이득때문에 이 제도를 포기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문명이 생긴 후부터 노예제는 ‘궁극의 노동 절약 장치’였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노예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했다. 애덤 스미스는 1776년 노예제가 고용 노동보다 비효율적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면 무력이 필요 없이 노예제가 점진적으로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가 생겼을까?
인간 제물이든 피의 비방이든 마녀 박해든, 제도화된 미신적 살해는 결국 두 가지 압력에 굴복했다. 하나는 지적 압력이었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당사자에게는 중대한 의미가 있더라도 다른 의식적 존재가 꾀한 짓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물리적 힘과 순전한 우연에 의해 벌어진 일일 수도 있음을 깨우쳤다. ······ 두 번째 압력은 설명하기가 좀 더 어렵지만 못지않게 강력했다. 사람들이 인간의 생명과 행복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환경에서 과연 무엇이 바뀌었기에 인도주의 혁명이 시작되었을까?
하나의 후보는 문명화 과정이다. 근대로의 전환기에 사람들이 자기 통제를 더욱 연마했음은 물론이고 감정 이입 능력도 키웠다는 엘리아스의 주장을 떠올려 보자. 사람들은 도덕적 개선을 꾀했다기보다, 농업이나 약탈 대신 상호 교환 그물망에 의존하도록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번성하기 위해서 관료와 상인의 머릿속을 짐작하는 능력을 키우려고 했다. 잔인한 취향은 분명 협동의 가치와 충돌한다.안타깝게도, 문명화 과정과 인도주의 혁명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문명화 과정을 추진했던 정부와 상업의 등장, 살인의 급격한 감소가 이미 수백 년 동안 진행된 와중에도, 사람들은 야만적 처벌, 왕의 권력, 폭력을 동원한 이단자 억압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는 강력해질수록 더 잔인해졌다.
한 대안은, 삶이 편해지면서 사람들이 좀 더 연민을 품게 되었다는 가설이다. ······ 그러나 생명이 값싼 것이었다는 가설에도 문제가 많다. 당대에 부유한 편이었던 나라들 중에서도 가학성의 온상인 곳이 많았다. 로마 제국이 그랬다. 그리고 요즘 절단이나 돌로 쳐 죽이기 같은 가혹한 처벌을 행하는 나라들은 중동의 부유한 석유 수출국일 때가 많다. 더욱 큰 문제는 시기가 어긋난다는 점이다.
연민은 다른 생명체 앞에서 자동적으로 솟구치는 반사적 반응이 아니다. 9장에서 자세히 말하겠지만, 모든 문화는 제 친족, 친구, 아기에 대해서는 공감으로 반응하면서도 그보다 더 넓은 범위의 이웃, 낯선 사람, 외부자, 그 밖의 감각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그런 반응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철학자 피터 싱어는 <확장하는 원 - 사회 생물학과 윤리>에서 인류가 자기 못지않게 소중하게 여기는 대상의 범위를 역사적으로 점차 넓혀 왔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흥미로운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무엇이 감정 이입의 범위를 넓혔을까? 문해 능력의 확장이 좋은 후보다.
독서는 관점 취하기의 기술이다. 당신의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어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셈이다. ······ 누군가의 관점을 채택한다는 의미의 '감정 이입'은 그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는 의미의 '감정 이입'과는 다르다. 그러나 전자는 자연스럽게 후자로 이어진다. ······
도덕심이란 웬 복수심 강한 신이 불러 주었거나 어떤 책에 적혀 있는 임의적인 규제들의 집합이 아니다. 특정 문화와 부족의 관습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관점을 바꿔 본 결과이다. 이 세상에 허락된 포지티브섬 게임*의 기회이다.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발견한 여러 형태의 황금률에 이런 도덕의 기초가 드러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한 영원의 관점, 칸트의 정언 명령, 홉스와 루소의 사회적 계약, 로크와 제퍼슨이 말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자명한 진실'에도 드러나 있다. *포지티브섬 게임 = 행위를 함으로써 총 재화가 늘어나는 게임. 따라서 자신의 이득을 생각하는 게임 플레이어 간에 협동을 하게 된다.
문명화 과정이나 상업적 요인 때문도 아니고, 더 잘 살게 되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스티븐 핑커는 그 이유로 <독서>를 꼽는다. 구텐베르크가 1452년 인쇄기를 발명한 이후 수 백 년간 책 생산 효율과 출판수가 증가했다. 특히 1700년부터는 책 생산효율이 정점에 달해 출판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여러 폭력적 제도들이 철폐된 시기와 일치한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과학 혁명과 해상 경로 개척을 통해 읽을 만한 콘텐츠들도 많아졌다. 독서는 사람들의 ‘관점 취하기’ 능력을 향상했을 것이며, 감정 이입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독서 열풍에 힘입어, 그 시대의 철학자들 - 홉스, 스피노자, 데카르트, 로크, 칸트, 제퍼슨, 존 스튜어트 밀 - 이 이성의 힘, 도덕성, 보편적 본성, 평등론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인도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많은 폭력적 악습들이 철폐되었다.
지금까지는 너무나 좋다. 문명과 상업의 힘, 출판계의 발전과 여러 철학자들의 등장에 힘입어, 인류는 수천 년간 그들 곁에 존재하던 폭력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19세기까지는 너무나 그럴듯하다. 그런데 20세기는 어떤가? ‘긴 평화’란 2차 대전 이후 냉전이 끝날 때까지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기간을 의미한다. 그 앞의 50년은? 두 번의 끔찍하고 거대한 전쟁이다. 이렇게 큰 전쟁이 두 번이나 연달아 일어났는데, 스티븐 핑커는 무슨 배짱으로 ‘폭력은 줄어든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인가? 물론 스티븐 핑커도 그러한 비판이 올 것을 잘 알기에, 최대한 방어하려고 애쓴다. 그러기 위해 전쟁이라는 현상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한다. 이 챕터에서는 루이스 리처드슨이라는 통계학자의 데이터를 주로 활용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리처드슨은 전쟁 통계에 대해서 두 가지 광범위한 결론에 도달했다. 전쟁의 시기는 무작위적이라는 것과 전쟁의 규모는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전쟁의 시기는 무작위적이다. 현대를 제외하면 전쟁은 언제나 일어났다. 가끔 계속해서 전쟁이 일어난 시기도 있었지만, 수백 년간을 합쳐보면 별다른 경향은 없이 무작위적이다.
두 번째. 전쟁의 규모는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 가우시안 분포(정규 분포)는 평균값이 중앙에 존재하고 양쪽으로 갈수록 빈도가 감소하는 분포이지만, 멱함수 분포는 규모가 클수록 빈도가 줄어드는 분포다. 사람의 키는 가우시안 분포다. 키가 10미터이거나 키가 1센티인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전쟁의 규모는 그렇지 않고,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 10명 죽는 전쟁도 있을 수 있고 불행히도 1000만 명 죽는 전쟁도 있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결과를 종합하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은 ‘안타깝지만 있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규모의 전쟁들은 존재했다. 이 두 사건들이 수천 년간의 폭력의 경향을 돌릴 만큼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소리다. 우리가 20세기의 두 전쟁을 크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가까운 시기에 일어난 일이라 잘 알고 있으며, 둘째로 18-19세기에 인구가 급등해 절대적인 규모가 커졌다. 이전에도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비슷한 규모의 전쟁들은 종종 있었지만, 앞선 두 가지 이유로 과소평가되었을 뿐이다.
두 전쟁보다 ‘긴 평화’, 그러니까 전쟁 후 50년간의 평화가 더 주목해야 할 만한 사실이다. 어떻게 그런 큰 전쟁 이후 다시 큰 전쟁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 후 냉전시대의 대립이나 핵 개발, 자원을 둘러싼 대립 등을 보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실제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전쟁이다 싶은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강대국들은 전쟁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 일까? 아래의 인용 안에 저자의 답이 있다. 감정이입 범위의 확장, 그것이 긴 평화를 가져온 놀라운 힘이다.
무엇이 제대로 되었던 것일까? 음울한 전문가들, 종말의 날 시계, 수 백 년의 유럽 역사가 무색하게 시리, 왜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지 않은 것일까?
제1차 세계 대전은 서구 주류의 낭만적 군사주의를 끝장냈고, 전쟁이 궁극에는 바람직하거나 불가피하다는 생각마저 끝장냈다. 루어드는 이렇게 지적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전쟁에 대한 전통적 태도를 바꾸었다. 더 이상 고의적인 개전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생각이 역사상 처음으로 거의 보편적으로 퍼졌다." 유럽이 막대한 인명 및 자원 손실로 비틀거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뮬러가 지적했듯이, 이전에도 유럽에는 이에 비견할 만큼 파괴적인 전쟁들이 있었지만 그때 국가들은 툭툭 털고 일어나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듯이 재깍 새로운 전쟁에 뛰어들었다. ······ 제1차 세계 대전은 최초의 '문학적 전쟁'이라고도 불렸다. 씁쓸한 회고담들이 몰려나와, 1920년대 말에는 이미 전쟁의 비극성과 헛됨이 상식이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진국들로 하여금 전쟁을 인도주의적으로 피하도록 만들었을까? 그 외생적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4장에서 인도주의 혁명을 가속한 요인으로 출판, 문해력, 여행, 과학, 그 밖에도 사람들의 지적 지평과 도덕적 지평을 넓힌 세계주의 세력들을 꼽았다. 20세기 후반에도 분명 이와 비슷한 요인들이 있었다. 텔레비전, 컴퓨터, 위성, 원격통신, 제트기 여행, 과학과 고등 교육의 유례없는 확장이다. 소통의 권위자 마셜 매클루언은 전후의 세계를 '지구촌'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평화란 냉전 종식 후 20년 넘게 전쟁, 집단 살해, 테러가 가끔 덜컥거리면서도 꾸준히 정량적으로 감소한 현상을 말한다. ······ 그렇다면 지금부터 새로운 평화에 대한 네 가지 주된 위협을 살펴보자. 이슬람 문명과의 충돌, 핵 테러, 이란의 핵, 기후 변화이다.
6장은 간단하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난 후, 이 책이 출판된 2011년까지 20년간 전쟁, 집단 살해, 테러라는 대표적인 3종의 현대 폭력이 감소했다는 내용이다. 그 당시 예상되는 네 가지 주된 위협(이슬람, 핵 테러, 이란의 핵, 기후 변화) 또한 폭력적 추세를 반전시킬 정도는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앞으로의 미래에 폭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테러는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공포를 불러오는 전략이기에, 테러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다. 다른 폭력들도 이유는 다르지만,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빈도와 심각성을 줄일 수는 있다. 저자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시작된 평화 이론을 발전시킨 새로운 이론을 소개한다. 이 이론은 평화의 세 기둥이 민주주의, 세계 경제에의 개방성, 국제기구라고 말한다. (국제기구= 유엔, 아프리카연합, 각종 평화 유지군 등) 이 세 가지는 폭력의 빈도와 심각성을 크게 감소시켰다. 이 세 기둥이 갑작스레 무너질 가능성은 크다고 보지 않기에, 앞으로도 폭력은 감소하는 추세를 보여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소수인종, 여성, 아동, 동성애자, 동물’은 20세기 이전에는 전혀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그들의 권리는 조금씩 상승되었다. 그것이 권리 혁명이다. 권리 혁명이 지금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오히려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라는 말이 요즘은 종종 조롱의 의미로 사용될 때도 많다. 또 어떠한 폭력의 위험성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역효과가 발생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빈 서판>에서 나는 우리가 인종적 적대감의 복귀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바람에 본성-양육 척도에서 양육 쪽에 인위적으로 힘을 실어 사회 과학을 왜곡시켰다고 주장했다. 인종적 차이와는 무관하고 종 전체에 보편적인 측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면에는 우리 본성에서 무엇 하나라도 선천적인 것이 있다면 인종이나 민족 간 차이도 선천적 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거꾸로, 우리가 태어날 때 마음이 빈 서판과 같다면 모든 마음이 동등하게 텅 빈 채 태어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이유에서 본성을 부정하는 태도는 본성에 대한 어두운 이론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이란 자나 깨나 인종적 적의에 빠져들려고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문화 자원을 총동원하여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
예를 두 가지만 들자. 부모들이 자식을 학교에 데려다주려고 모는 차에 치여 죽는 아이의 수는 다른 교통사고로 인한 아동 사망자의 두 배이다. 그러니 자식이 납치범에게 살해되는 것을 막고자 직접 차로 학교에 데려다주는 부모가 늘수록, 더 많은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범죄 통제 극장의 또 다른 예로 고속도로에 전광판을 설치하여 실종 아동의 이름을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감속을 유발하고 운전자의 주의를 흩뜨려 사고를 낳기 쉽다.
폭력을 줄이고 위험을 최소화하는 행위는 훌륭하지만, 통계를 제대로 보지 않고 할 때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감정 이입 범위의 확장’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른 제도적 변화는 다양한 범위에서 폭력의 감소를 가져왔다. ‘폭력과 위험의 최소화’라는 업적은 세상의 수많은 일들 중 감히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몇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을 인류는 이루어냈으며, 현재에도 수많은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다만 통계가 따르지 않는 행위, 결과만을 지향한 강압적인 행위는 어리석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8, 9장에서는 인간 내면의 공격성과 이타심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폭력의 역사적 감소를 말하는 이 책의 주제와 약간 어긋난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의 역사적 감소 추세에 대해 말하다 보면 결국엔 인간 본성의 문제, 즉 인간은 폭력적인가 아닌가라는 질문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러 과학을 동원하여 인간 본성에 대해 탐구한다. 10장에서는 몇 개의 키워드로 간단하게 앞선 내용들을 요약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다음 리뷰글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작가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를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