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나만의 나이테를 그리기 위한 시간들
이인아 작가님의 ‘잉아의 순우리말 그림 사전’에는 여러 그림들과 함께 다양한 순우리말이 등장한다. 갖가지 귀여운 그림들과 함께 서술되는 아름다운 순우리말.
그중, 내 눈길을 끈 단어는 ‘둥치’
[둥치]
: 큰 나무의 밑동을 나타내는 순우리말.
: 세월이 만들어낸 묵직한 힘을 담은 나이테가 드러나는 나무의 밑동.
가늠할 수 없는 세월 동안 묵묵히 한 자리를 지켜오며 굵고 단단한 둥치를 만들어온 나무의 인내심은 감히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선망이다. 세찬 바람에도, 몇 겹을 껴입어도 뼈속이 아려오는 추위에도 묵직하게 서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지나가는 동물들에게 안식처를, 때때로 자라나는 생명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준다.
감정을 드러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감히 고난의 연속이지 않을까 짐작하다 보니 어느샌가 나는 그러한 나무의 둥치를 닮아가고 싶다.
며칠 전, 4일 정도를 무기력과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오는 주체 못 할 고통으로 인해 누워만 있었다. 달력 속 무수하게 쌓여있는 계획들과 진행 중인 여러 일들이 움직이라고 소리쳤지만, 들을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외면했다.
지금 당장 내가 너무 힘들어서, 도무지 움직일 수 없어서 번뇌에 휩싸였다.
가까스로 움직여 약을 털어놓고, 평일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3년 전, 이유 모를 두근거림과 불안감에 초토화된 일상을 계기로 알게 된 우울증과 공황장애.
군대를 막 전역하고 꿈꿔오던 사랑의 대상들은 그렇게 무너졌다.
도전해보고 싶었던 모든 것들과, 되고 싶었던 또 다른 나의 이상향들은 하루아침에 노트 한 자리만을 차지할 뿐 그 자리에서 멈춰있었다. 끊임없이 소리치고 단전 끝에서부터 온 힘을 다해 악 질러보아도 고통만 아려올 뿐 바꿀 수 있는 게 없었다.
알 수 없는 원인을 알고 싶었고, 간절하게 제자리를 찾고 싶었다.
부모님을 설득해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그동안 나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습관들을 하나둘씩 고쳐나갔다.
아름아름 알게 된 원인들과 한꺼번에 몰려온 후회들이 휘감았지만, 그래도 주위에서 응원해 주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복용하는 알약 두 봉지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다.
그렇게 애써서 시간을 쌓아왔건만,
여전히 가끔씩 찾아오는 발작은 나를 꽁꽁 싸매버린다.
움직일 수 조차 없게 만들고, 생각조차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끊임없는 경계와 제자리를 지켜보려는 나의 노력들이 무너질 때면 특히 그렇다.
타인과의 비교, 무한으로 반복되는 SNS와 인터넷 속 자극적인 게시물들, 과로, 규칙적이지 못한 생활패턴은 조금만 경계를 풀면 느닷없이 나타나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의 나를 불러낸다.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스스로를 속이는 합리화와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차츰차츰 뿌리부터 좀먹는다.
썩어버린 부위를 잘라내지만 인지 못한 시간들과 패턴들이 또다시 곰팡이처럼 피어난다.
주변 상황 때문이 아닌 오로지 나의 행동과 생각들로 인해 고통이 찾아올 때면 그 아픔은 배가 된다.
일상으로 복귀해 숨통이 트인 날들은 오로지 제어하기 위해 온 신경과 힘을 집중한다.
생각을 가다듬고, 오로지 원하는 방향으로만 향하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애정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담는다.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고, 해야 할 일을 끝마치고, 운동까지 해낸다.
그렇게 잠자리에 들 때면 이렇게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내일을 온전히 보내기를 소망하고,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원한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씁쓸함과 울컥하는 감정은 그래도 하루를 잘 보냈다는 증거로 생각하기로 한다.
새빨간 배경에 귀여운 그림들이 그려진 이유로 구매한 이인아 작가님의 ‘순우리말 그림 사전‘
그 안에 숨겨진 수많은 보물들과 내게 남겨진 나무의 밑동 둥치.
나이테를 만들기 위한 고통과 번민의 시간이 지속될 테지만 한 자리에서 묵묵히 이겨내 온 둥치는 내게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나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
고통을 양분 삼아 나만의 나이테를 고요하게 만들어 나가고 싶다.
언젠가 누군가 양팔로 나를 휘감아 꽉 껴안아줄 때 든든함과 기댈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될 수 있도록.
현재의 노력과 고민의 시간들로 견고하게 다져진 둥치를 가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