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가을비

by 구구

모두가 원치 않는 가을비가 내리는 밤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비는 오지만 훈풍이 분다는 것이. 9년 만에 가는 특별한 고깃집이다. 왼발 위에 뭔가 똑똑 거려 우산에서 빗물이 새나 했더니 풀린 신발끈이다. 누군가 날 생각하고 있나.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발걸음은 너를 향한 추억 속으로 향해 가고 있다.


압구정로데오역 6번 출구 고깃집,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의 인연이 시작됐다. 우연인 듯 필연인듯 내 바로 옆 테이블엔 그때처럼 두 남자가 앉아 있다.


나 혼자 냉삼 2인분을 거의 다 먹어 가던 때였다. 친구 한 놈과 고기와 술을 먹던 너는 친구가 전화를 받으러 나간 사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고기 좀 드시겠어요? 이제 가져올 거라 그냥 접시 째 가져가심 돼요. 방금 1인분을 더 시켰는데 친구가 갑자기 간다네요. 저는 이미 너무 먹어서 저 혼자는 못 먹을 것 같아요.”


“어.. 1인분은 좀 많은데...”


평소라면 얼굴도 못 보고 “괜찮아요”를 시전했을 나인데 그날따라 내가 내가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같이 드실래요?”


그는 음식에 진심인 타입이었다. 이 일대 모든 고깃집에 자기 발도장이 안 찍힌 곳이 없다 했다. 먹는 얘기 같은 가벼운 주제부터 공략할 줄 아는, 대화의 기술을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신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내 질문을 하게 만드는 진행자랄까. 이름, 나이, 사는 곳 같은 중요한 정보도 내가 먼저 알 수 있게, 그것도 내가 질문하게 만들었다. 자꾸 선을 넘어올 수 있도록 자기 얘기를 풀었다.


가게 문이 닫을 때까지 떠들었다. 사업 확장 계획 같은 알맹이 있는 자기 얘기부터 어릴 적 외갓집에 가서 돼지가 따라온 게 너무 큰 공포였다는 시시콜콜한 추억까지. 그는 자기 삶의 크고 작은 얘기를 압축해 들려줬다.


구제 옷을 수입해 파는 사림이었다. 갈 시간이 다 되 가자 기가 막힌 에프터를 쳤다. 이번에 또 옷이 들어왔는데 자기가 보기에 팔기 아까울 만큼 좋은 게 있어 빼 놓은 게 있다고. 볕 좋은 날 입으면 좋을 원피스, 이렇게 술 마시러 나갈 때 딱인 투피스, 두 벌을 주고 싶다 했다. “다음에 나랑 만날 때 입어도 좋겠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술이 꽤나 취했는데도 만지작거린다던가 부담이 될만한 무거운 얘기는 않았다. 술집을 나와서도 쉬러 가자는 뻔한 제안 대신 다음날 옷을 주고 싶다고 했다. 무슨 왕자님인가 싶었다.


이튿날 점심시간에 회사 앞 먹자골목의 한 까페로 찾아왔다. 테이크아웃으로 커피를 사주더니 바쁠텐데 이것만 받고 가라고 하며 옷 봉투를 전해줬다. 너무 예뻤다. 헌 옷이 만나 싶을 정도로. 그 이후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옷을 받았다. 구색을 얼마나 잘 맞춰 줬는지 옷 살 일이 없어졌다. 반 년이 지나서야 그 옷들이 텍만 뗀 새 명품 옷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것도 회사는 재미로 다니는 패션왕 직원이 말해줘서. 우리 회사 월급이 빤한데 명품이 도대체 몇 개냐, 게다가 다 신상인 건 아냐고 말했다. 패션에 워낙 문외한인 데다가 라벨이 찢겨서 몰라 봤던 것이다. 그는 우리 삶의 격차가 관계의 부조화가 되지 않게끔 부담을 주지 않으려 신경을 많이 썼다.


사귀는 내내 최고만을 주려 노력했다. 매사 최선인 걸 하는 것에 익숙한 나같은 평민이 아니었다. 부자가 나한테 돈 좀 쓴다고 감동할 아기는 아니었다. 내가 더 반한 점은 비물질성이었다. 시간과 배려도 최고로 썼다. 어느 정도냐면 평소 대화 중에 어쩌다 이런 분야가 궁금하다 흘리면 며칠 내로 강좌 정보를 찾아왔다. 돈 줄테니 배우라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같이 등록해 배우는 면모를 보였다.


우리의 일주년이 불과 사흘 남은 때였다. 말레이시아행 비행기 티켓, 호텔과 투어 예약까지 모두 마치고선 첫 커플 해외 여행의 계획을 섬세하게 짜느라 매일 만나던 나날이었다. 근데 그날 아침에 만나 계획을 짤 때는 내일 보자던 그가 밤 10시 경 예고도 없이 내 자취방에 찾아왔다. 두 눈이 퀭한 채로 무릎을 꿇더니 미안하다, 그만 만나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심혈을 기울여 여행 계획을 짜다가 이별을 고한다? 앞 뒤가 안 맞는 얘기였다. 아무리 물어봐도 미안하단 말을 반복할 뿐 이유를 답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현관문을 닫고 그를 보냈다. 그 순간 누가 경찰을 부르지 않을까 싶었다. 문을 닫자마자 이 작은 빌라촌에 너무 크게 오열하는 소리가 나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멀리 사라졌다. 울면서 뛰어간 것이다.


제 정신이 아닌 채로 고민을 하다가 일주일 후 우리의 아지트이자 그의 주거지였던 옷가게를 찾아갔다. 철거까지 끝난 상태였다. 폰으로 전화를 거니 없는 번호라 나왔다.


이 모든 것이 최고만을 주려던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택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굉장히 많은 막장 시나리오를 그려봤지만 모든 결론이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으로 도출됐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미스테리한 증발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만남도 헤어짐도 어디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이랴.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존재다.


주문한 술과 고기가 다 떨어졌다. 옆 테이블 남자들은 계속 고기를 굽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산을 펴고 잔잔한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알고 보니 아까 기분 좋게 불던 훈풍은 꽤나 강단이 있는 성격이었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내 비닐 우산을 뒤집더니 저 먼 곳으로 날려보냈다. 내 것인 줄 알았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교훈은 이미 그때 배웠다. 그래서 괜찮다. 나는 다 괜찮으니 부디 잘 있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