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취한 날

by 구구

소파에 널부러졌다. 헬스장 트레드밀에서 정신이 아늑해질 때까지 뛰고 집에 오자마자 한 일이었다. 어제 나홀로 을지로에 가서 산 과일주도 한 병 꺼냈다. 알코올이 섞인 사과향 안개가 스멀스멀 온몸으로 스며들고, 나는 또 전화기를 들고야 말았다.

"여보세요"

슬픔과 짜증, 그리고 귀찮다는 마음을 억누르려는 인내심이 섞인 네 목소리... 작년보다 날 덜 동정하는구나. 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3년. 내가 이별통보를 고했던 그날마다 나는 네게 전화를 건다.

"목소리 듣고 싶어서."

"무슨 시 읽어줄까"

우리 통화는 언제나 시 한편으로 시작됐다. 국문학과를 정말 좋아서 들어간 사람이었다. 암기 한 시가 한 트럭이다. 그런 사람이 내 생일은 자주 잊곤 했었지.

"별헤는 밤"

토성의 고리같은 8차선 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보며 먼지가 돼 사라진 우리의 밤들을 그려본다. 낭송이 끝난 후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한참이나 기다렸다. 옅은 한숨소리가 들리자 취기로도 다스릴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시뻘개졌다. 다른 시도 읽어달라는 말을 계속 입안에 삼키고 있었지만, 무리였다

"잘 지내고"

그만 연락하란 말은 생략한 작별인사다.

단골 바에서 자주 쓰던 칵테일 하트 스트로우는 사람을 빨리 취하게 한다며 못 쓰게 했던 나의 옛 남자, 그리운 너의 이름. 취해야 잠이 들겠지. 빨대로 쭉 빨아서 단숨에 비워버려. 왜냐면 이토록 취한 날에는 당신 곁에 찾아가 기대고 싶어.

-------------------------------------------------------------------------------------------------------


작가의 말:

사진 올리면서 어울리는 글 뭐 쓸까 하다가 쓰게된 글 입니다. 뭐시냐고요? 인스타그램 맨 상단 좌편 고정 피드를 확인해보세요.^^ Pls! come! to! @nightynine_yo

----------------------------------------------------------------------------------------------------------

매거진의 이전글원치 않는 가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