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게 - 음악, 씨앗, 책

미션캠프에게 사기 당하고 남기는 기록

by 고내

음악


첫 학교에서 교사 동아리를 활성화하라는 공문이 와서 느닷없이 기타 동아리에 가입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기타를 치고 나는 노래를 부르던 것이 워낙 익숙해 기타라는 악기를 꼭 배워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빌려준 기타를 가지고 하려니 팔이 짧은 나는 어깨가 여간 결려 힘들었다. 스트로크를 해야 하는데 아무리 팔을 길게 뻗어도 부드러운 움직임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 앞으로 계속할 건데. 하나 사자. 한 번 레슨 받고 기타를 산다고? 그랬다. 나는. 동생과 낙원 상가를 갔다. 악기는 자고로 낙원상가지.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당당하게 갔다. 어쿠스틱 기타 사실 건가요? 그건 뭐여. 기타가 다 같은 기타 아닌가요. 클래식 기타도 있어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걸로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사장님은 나에게 이것저것을 들려보더니 내 팔 길이에 맞는 작고 귀여운 기타를 추천해 주셨다. 후기 잘 남겨주시면 한 분 선정해서 우쿨렐레 선물로 드려요. 나와 동생은 그 말에 눈이 돌았다. 우쿨렐레를 공짜로 받겠다는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기타를 구매하고 인근 카페로 갔다. 기타를 품에 안고 사진만 오백 장을 찍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본격적인 기타 구매 후기를 남기기 시작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제목은 '세상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 음악'이었다. 미친 콘셉트로 간 게 맞다. 음악에 미친 사람 콘셉트로 우리는 후기를 쓰기 시작했다. 기타 막 사서 제대로 연주도 못하는 주제에 글을 쓰려니 정말 산으로 갔다. 그래서 그냥 산으로 글을 써서 올렸다. 그리고 우쿨렐레를 받았다. 사장님도 제정신이 아니셨던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됐건 기타와 우쿨렐레는 지금 드레스룸에 처박혀서 자고 있다. 언제 세상 밖으로 나올지는 모른다. 교사 동아리 활성화하라고 준 돈은 다음 학기부터 끊겼고 나의 의지도 끊겼다. 세상에 허락한 유일한 마약인데, 아쉽게 되었다.


씨앗


어렸을 때 꿈은 대통령이었다. 사실 내 꿈이라기보다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꿈이셨다. 내가 대통령이 될 정도로 똑똑하고 영리하다 생각하신 모양이다. 내 강아지는 대통령이 될 거여. 그래서 내 꿈은 대통령이 되었다. 살면서 생긴 첫 번째 꿈이었다. 그 이후 판검사로 바뀌었다. 이건 우리 엄마와 아빠의 꿈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입시가 코 앞으로 다가오자 엄마와 아빠의 꿈은 일단 내가 명문대에 가는 것으로 좁아졌는데 사실 그때 당시 나의 꿈은 방송작가였다. 아니, 방송은 사실 나중에 그냥 붙인 거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가'였다. 생각해 보면 난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작가라는 꿈을 언제부터 마음에 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글짓기 대회에 나가 소소하게 상을 받을 때부터였는 지, 아니면 공지영이나 신경숙,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고 나서부터였는지. 실수처럼 입 밖으로 작가라는 꿈을 내뱉으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썩 좋지 않았다. 특히 부모님이나 친척들은 정말 내가 실수로 그 꿈을 꾸었다고 여겼다.

수능을 망치고 두 번째 수능을 그럭저럭 본 후 나는 교대에 갔다. 국문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임용 공부 대신 신춘문예에 글을 내고 싶었지만 역시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난 임용을 보고 교사가 되어 10년이 넘도록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난 작가라는 꿈을 가슴속에 품고 틈만 나면 뭐라도 끄적이며 살았다. 그리고 올해 휴직을 하며 그 오래된 씨앗에 드디어 싹이 작게, 정말 작게 났다. 작은 독립서점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에 신청하여 A6 사이즈의 책을 내 손에 쥐게 되었다. 출판된 건 아니지만 오롯이 내가 계획하여 쓰고 제본한 내 책이었다. 군데군데 오타가 있고 문장 서술도 안 맞고 중간에 산으로 가는 부분도 있는 부족한 책이지만 오랜 시간 묵혀두기만 한 씨앗에 드디어 푸릇한 싹이 돋아난 것 같아 심장이 벅찼다. 두 번째 책이 나올 수 있을진 모르겠다. 싹이 났으니 물도 주고 햇빛도 보게 뭐라도 더 써보기로 다짐한다.



이사를 앞두고 이사 업체가 미리 와서 견적을 내는데 이런 말을 했다. "책이 정말 많으시네요. 글 쓰세요?" 아니오. 그냥 책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답하진 않았고 그냥 아니오 까지만 했다. 책이 좀 많다. 진짜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적고 적은 사람에 비하면 많은. 3칸짜리 대형 책장이 안방에 하나, 내 방에 하나, 동생 방에 하나 있고 침대 옆에 책들이 있고, 내 책상 위에도 책들이 있다. 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좀 많은 편인 것 같다. 어렸을 때 서점 주인이 꿈이었다. 책을 좋아한다. 책 사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안 읽고 사서 문제지.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바로 나다. 도서전이면 안 가리고 가서 무조건 뭐라도 한 권 이상 사고, 지금은 강원도 고성과 속초 지역 서점 투어를 목적으로 한 여행 중이다. 고성에서 한 권, 속초에서 두 권 사서 가방이 좀 더 무거워졌다. 아마 내일 방문하는 서점에서도 책을 구매할지도 모른다. 책방을 가는 이유가 뭔가. 책 사러 가는 거지.

책 그만 사라고 핀잔을 많이 듣는다. 내 집도 아니고 전세인데, 이사 갈 때마다 책 때문에 난리도 아니니까, 아무래도 책을 그만 사야 할 필요가 있다.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되고, 이북 사서 읽으면 되잖아.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방 투어까지 가는 나. 제법 말 안 듣는다. 이북 리더기도 있고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봤다. 근데 또 산다. 이쯤 되면 병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새 책을 구매하여 내 손에 쥐고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인가 보다 나는. 그래도 사놓은 책들을 꽤 많이 읽어서 책을 구매하는 속도를 얼추 따라잡고 있다. 조만간 사놓은 책들을 다 읽게 되면 당당하게 새 책을 구매할 수 있을 것 같다. 다 읽은 책들은 중고로 팔아도 되지 않아? 그래서 팔았었다. 그리고 팔았던 책을 다시 구매했다. 다시는 책을 팔지 않을 것이다. 집이 터지더라도 책 다 끌어안고 죽어야지. 말리지 마라. 언젠가 이 책들이 날 구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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