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게 - 공기, 소원, 후회

미션캠프에게 사기 당하고 남기는 기록

by 고내

공기


날이 추워지면 코가 제일 먼저 안다. 비염인은 아니지만 숨을 들이쉬면 냉한 공기가 폐 안을 가득 채우고 입 밖으로는 하얀 김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며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체감한다. 아침 공기는 따뜻한 실내에서 추운 야외로 처음 발걸음 내딛을 때의 설렘이 가득해 좋고, 저녁 공기는 진득했던 하루를 정리하고 피곤함을 정리하는 차분함이 가득해 좋다. 낮엔, 그런 걸 느낄 새가 없다. 나는 환기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창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는데 봄에는 황사나 미세먼지로 쉽지 않다. 가을이나 겨울은 추위 따위에 굴하지 않는다. 추우면 추울수록 더 좋다. 손끝에 살짝 시릴 때 따뜻한 커피를 마셔주면 된다. 교실이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찰 때쯤 아이들이 오고 '선생님, 추워요.'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면 그제야 창문을 닫고 히터를 튼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 간 오후엔 히터를 끄고 다시 한번 창문을 연다. 후텁지근했던 공기와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까지 모두 창 밖으로 훌훌 나가면 난 책상에 앉아 하루를 정리하고 남을 일들을 해치운다. 아침에 타 놓은 따뜻한 커피가 아이스커피가 되어 있을 땐 조금 아쉽지만 입 안에 다 털어 마시고 새로 타면 그만이다.

휴직자였던 올해는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때도 종종 있었기에 새벽 공기를 마실 일이 썩 많진 않았다. 대신 유럽의 공기, 동남아의 공기, 강원도와 전라도 등 타 지역의 공기들을 다양하게 마셔본 기억이 있다. 비교하자면? 똑같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뭐. 하지만 종종 느낀다. 내가 깊이 숨을 들이마실 수 있는 날이 과연 얼마나 남았을까. 툭하면 불꽃 축제를 하고, 불이 나고, 자동차의 양은 늘어난다. 공장도 새로 짓고 더우면 에어컨, 추우면 히터를 빵빵 켠다. 정말 궁금하다. 내가 진짜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학창 시절 농담처럼 방독면 쓰고 살아야 할 날이 오면 어쩌지? 했던 말이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왜 아무도 노력하지 않을까. 공기가 언젠가 유료가 되면 어쩌려고.


소원


소원 딱 하나를 들어주신다고요? 그렇다면 세금을 비롯하여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400억 정도를 통장에 꽂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돈은 안된다고요? 그럼 죽을 때까지 마르지 않는 창의성으로 기가 막히게 글을 잘 써서 노벨 문학상 정도는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아, 그건 저더러 노력을 하라고요? 그럼 키 163에 몸무게 48, 근육량이 체지방보다 많고 등근육이 잡혀 있어서 어깨가 펴지고 허리가 튼튼하며 무릎도 안 아파서 각종 운동을 잘할 수 있는 건강을 주세요. 평소에 운동을 하라고요? 키는요? 성장판이 닫혀서 이미 늦었다고요? 흠, 그러면 이건 어때요? 돈이 안되면 강남에 52평 아파트, 아 부동산도 안 되나요? 문제가 될 수 있, 네, 그럴 수 있죠. 돌아가신 할머니를 다시 뵐 수 있나요?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산 사람을 죽일 수는 없군요. 하, 어렵네요. 소원이라는 게.

제가 피부가 안 좋은데 매끈매끈한, 밀가루 끊으라고요? 그게 어디 쉽나요. 탈모는요? 유전이요? 여성형 탈모도 유전이에요? 검은콩 많이, 아 많이 먹죠. 두유로 만들어서 주로 먹어요. 그러면 그쪽 소원은 뭔데요.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하시니까, 그러는 댁은 소원이 있으신가 해서. 아무도 소원을 안비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요? 어차피 소원을 안 들어주면서 무슨. 그럼 이건 되나요? 전쟁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거 봐요.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적은 없다는 게 무슨 답이에요. 소원은 안 들어주고 갑자기 뭔 역사 수업이야 진짜. 도대체 되는 소원이 뭔데요. 예를 들어봐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요? 정말 날벼락같은 소리 하시네. 그거 해서 제가 얻는 게 뭔데요. 무지개? 예쁘긴 하겠네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통일을 마음속 소원으로 품고 사는데 그걸로 해볼까요? 준비가 안된 통일은 혼란을 야기, 아 됐어요. 그럼 그냥 제 눈앞에서 꺼지세요. 소원을 들어준다고요? 아 씨 야 이 새끼야!


후회


1년 휴직을 했었다. 이제 곧 끝나간다. 11월이니 거의 다 지나갔다고 해도 무방하다. 3월부터 복직이지만 2월부터 미리 나가 내년 업무를 익히고 교육과정을 준비를 해야 하니 석 달 조금 덜 남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상하게 불안하거나 초조하진 않다. 내년에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크게 없다. 그냥 '시간이 빠르구나.' 정도의 감정. 나름 열심히 계획을 세웠고 바쁘게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부분도 있다. 그러다 모든 걸 내려놓고 게으름을 최대치로 피워봤던 기간도 있었다. 이룬 것도 있고 미처 이루지 못한 것들도 있으니 퉁 쳐도 괜찮을 것 같다.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은 후회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때 그럴걸.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것이 없다. 그 순간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 잊어버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후회라는 걸 많이 했었던 시절도 있다. 예를 들면 어제 치킨 괜히 먹었네. 사인회에서 내가 왜 그렇게 말했지? 이렇게 말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술 작작 마실걸. 내가 술을 또 마시면 인간이 아니다. 수업 준비를 더 했어야 했나? 애한테 큰 소리로 얘기한 것 같아서 속상하네. 내가 왜 그랬지. 화내지 말걸. 할머니랑 여행 한 번을 못 갔네. 뭐가 그렇게 바빴다고. 대부분의 후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연필로 잘 못 써서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것들은 후회하지 않는다. 시간, 말 그리고 건강과 같은 것들이 뒤늦게 나의 발목을 잡고 넘어지게 만든다. 어쩔 수 없다. 무릎에 피가 잔뜩 났지만 일어나야지. 그리고 다시 조심조심 걸어야지.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3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그나마 나아진 부분은 자잘한 것에 대한 후회를 덜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젊어서 운동 좀 할걸. 이 소리 백날 해봐야 소용없고 지금 당장 운동하는 게 더 낫다는 걸 깨달았다. 할걸, 하지 말걸. 이런 건 의미 없고 그냥 하거나, 아님 하지 말거나. 이미 한 건? 그냥 흘려보낼 것. 내 시간은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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