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에 독일과 슬로바키아를 살짝
글을 쓰기에 앞서 부모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우선 아빠는 유쾌하고 재밌고 본인 스스로를 딸바보라 착각하는 가부장의 집합체. 잘 삐지고 욕 잘하고 폭력적이며 하루 세끼 밥에 집착하는 말 그대로 전형적인 한국 남자. 여행 경험은 매우 많고 가족 아닌 다른 사람들에겐 예의 사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으나 집에서는 그냥 한국 남자. 단순해서 칭찬을 자주 해주거나 무슨 말이든 맞장구만 잘 쳐주면 크게 불만은 없는 편이다. 엄마는 예민하고 짜증 많고 수시로 마음이 자주 바뀌며 가족, 특히 큰딸인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애용하는 사람. 자신이 남 흉보고 지적하는 건 괜찮지만 남이 그러는 건 무식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내로남불 스타일. 역시나 다른 사람들에겐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지만 가족에겐 '가족인데 그런 말도 못 해?'를 핑계로 상처 주는 말을 쉽게 쉽게 하는 편. 덧붙여 나에 대해 설명하자면 아빠를 닮아 단순하고 엄마를 닮아 예민하며 아빠를 닮아 욕 잘하고 잘 삐지지만 엄마를 닮아 수시로 마음이 바뀌어 하루에도 수십 번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조울증의 소유자. 잠 잘 못 자고 스트레스에 취약하지만 아주 약간 자극에도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 굉장히 피곤한 인간형. 장녀 콤플렉스가 있어 나만 참으면 된다 수시로 되뇌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다.
고로 위 셋이 같이 여행을 간다는 건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화가 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폭발시키는 동생과는 달리 나는 참았다가 혼자 질질 짜거나 일기를 쓰거나 화병으로 잠을 못 자거나 등등의 지질한 행동을 하는 유형이라 이번 여행에서도 난 그저 나만 참으면 된다를 수백수천 번 마음에 새겼던 것 같다.
여행의 시작은 늘 그렇듯 인천공항에서. 새벽 4시 50분에 일어나서 씻고 짐 챙겨서 나오자 때마침 택시가 바로 있었다. 캐리어 3개 싣고 공항버스 타는 곳에 도착하자 이미 하늘이 밝아져 오고 동생도 출근했다는 카톡을 보내왔다. 6시에 버스 타고 공항까지 가는 길.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탔고 해외에 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그것도 비수기에. 이런저런 맥락 없는 생각들을 하며 창밖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공항이 보였다.
미리 환전 신청을 해두어서 가자마자 돈부터 찾고 체크인을 했다. 요즘에는 무인 체크인도 많다지만 짐을 부쳐야 하기에 대면으로 했다. 티켓이 손에 쥐어지고 내내 끌고 다니던 캐리어가 손을 떠나자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한식당에서 아침도 배불리 먹고 짐 검사와 더불어 면세점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엄마와 아빠는 그제야 조금 신이 난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약국에 들러서 미처 못 산 비상약도 구매하고 면세점도 둘러보고 커피도 테이크 아웃해서 홀짝거리며 돌아다녔다. 분명 공항에 너무 일찍 왔다며 걱정했는데 탑승장에 도착했더니 금세 보딩 시간이 다가왔다. 지연되려나 싶었지만 시계의 나라 스위스의 항공은 꽤나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편이었다. 제 시간이 탑승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고 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tra legroom이라는 이름 아래 돈 더 주고 예매한 자리는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넓었지만 대단하게 편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족이 나란히 앉았기에 마음은 편했다. 내가 가장 안쪽에 앉고 엄마와 아빠 순서로 앉았다.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밥을 줬다. 파스타를 야무지게 챙겨 먹고 중간에 샌드위치 챙겨 먹고 누가 신라면 먹는다고 해서 신라면도 먹고 두 번째 식사로 가락국수 먹고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주길래 먹고 초콜릿의 나라 아니랄까 봐 스위스 초콜릿까지 먹고 나니 스위스 항공은 정말 좋은 항공사구나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먹을 거 많이 주는 곳 최고.
비행기에서는 잠을 잘 못 자는 편이다. 내 키가 워낙 작다 보니 성인 남성에게 맞춰진 의자는 불편하기 짝이 없고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서도 잘 못 자는 내가 의자에 앉아 잠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책 두 권을 챙겨 왔는데 당연히 13시간 비행이면 책 두 권 정도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내가 책을 빨리 읽는 편이라는 사실을 비행기에서 알았다. 순식간에 두 권을 다 읽고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모니터를 두드리는 데 당최 볼 작품이 없어서 봤던 영화를 또 보고 (그래비티 봤다.) 그럼에도 시간이 남아 가만히 있었다. 말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그냥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 한 권 더 챙겨 오는 건데 하는 후회를 하며, 그저 하염없이 비행기의 이동 경로를 영화 보듯이 보았다. 이제 중동 언저리를 날고 있구나. 유럽은 언제 도착할까. 오 처음 보는 도시다. 신기방기.
취리히에는 4시 50분쯤 도착했다. 입국 수속 밟고 짐 찾고 어쩌고 저쩌고 했더니 취리히 공항이 눈에 들어왔다. 15년 전 기차 타고 심야에 인터라켄에 도착하여 어둑어둑한 길을 하염없이 걸었던 기억 이후로 스위스는 오랜만이었다. 미리 예매해 놓은 인터라켄행 기차는 오후 6시 45분 출발이었기에 우리는 기차역과 연결된 쇼핑몰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에서 지켜보는 엄마와 아빠의 시선을 느끼며 되게 유창한 척 커피를 주문했다. 조악하기 그지없는 영어였지만 커피와 차는 무사히 잘 나왔다. 하핫 이 정도는 뭐. 엄빠의 칭찬은 날 나대게 한다. 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커피에 탈 설탕까지 받아와 긴 비행에 대한 피로를 음료에 호록 호록 타서 마시고는 근처 대형 마트에서 대충 장을 봐서 가기로 했다. 블루베리, 맥주, 훈제 햄 등을 사서 기차에 탔다. 1등석으로 예매해서인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편하게 캐리어를 놓고 기차에서 마음껏 떠들었다.
큰 건물들이 점점 사라지더니 그림 같은 풍경들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특히 좋아했다. 푸른 들판과 띄엄띄엄 있는 유럽식 전통 가옥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아름다운 호수까지. 엄마는 빈자리로 이동하여 말없이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난 그런 엄마의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았다. 5월 말부터 유럽의 긴 낮은 시작이었는지 인터라켄에 꽤 늦은 시간 도착했는데도 여전히 하늘은 밝았다. 인터라켄 동역에 내린 우리는 숙소까지 조금 걸었다. 거리를 한산했고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15년 전 내가 어디서 내렸고 어느 거리를 걸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 수월하게 체크인을 하고 생각보다 넓은 방에 만족하며 짐을 풀었다.
마트에서 사 온 과일, 햄, 맥주를 먹으며 이제 진짜 여행 시작되었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챙겨 온 일기장을 꺼내 하루를 기록했다. 몸은 천근만근 피곤했지만 뭘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미리 짠 일정표를 들여다보며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일 갈 곳과 예약한 투어들. 만나기로 한 장소와 시간들. 프런트에 발급받아야 할 게스트 카드, 조식 시간 등등 미리 체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첫 번째 숙소를 마음에 들어 하는 엄빠를 보며 나 역시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일단은 무사히 도착했으니 성공. 난 남은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