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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드시선 Mar 27. 2023

표트르 파벨 요새, 크셰신스카야 저택, 오로라 순양함

볼셰비키 혁명의 과정

마르스 광장에서 러시아 혁명의 전반부를 간단히 살펴 보았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이 혁명의 지도자인 레닌을 만나지 못했다. 이제 그를 만나러 핀란드역을 향해 가 보자. 다시 3번 트램을 탑승하여 네바강을 건너 간다. 차창 밖을 통해 우리는 시원한 네바강 풍경을 바라 본다. 여름이라면 수 많은 유람선들이 강물 위를 질주하고 있겠고, 겨울이라면 얼어붙은 네바강 위에 수북히 쌓인 눈 풍경이 삭막함을 전달할 것이다. 가끔 얼어붙은 네바강 위를 아슬아슬 걷는 이들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창 왼쪽 편으로 멀리 표트르 파벨 요새가 보인다. 표트르 파벨 요새는 감옥으로도 쓰였음을 '걸어서 상트페테르부르크'편에서 언급하였다. 레닌이 이른 바 봉인열차를 타고 러시아 국경을 넘는 순간, 그는 심호흡을 하며 역에 내리자마자 체포되어 저 표트르 파벨 요새에 감금될 것을 각오하였었다. 그의 앞길에 어떤 일이 기다릴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적국 독일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러시아로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감옥은 전에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르 울랴노프'가 투옥되었다가 사형 판결을 받은 곳이기도 했다. 너무나 존경했던 세 살 위 형이 인민주의자 활동을 하다가 처형당한 것은 레닌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이 혁명을 성공시켜려 했다. 그 자신도 형이 투옥된 그곳으로 보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혁명가가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은 사실 가시밭길이며, 알 수 없는 미래에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무모한 짓이었다.

표트르 파벨 요새 내에 있는 감옥


네바강을 다 건너면 트램은 우회전을 하게 된다. 회전하자마자 왼쪽 건물을 보자. 흔히 크셰신스카야 저택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곳으로서, 현재는 러시아정치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정치부터 시작하여 푸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정치사를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는 훌륭한 박물관이다. 이곳은 무엇보다 러시아 혁명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건물 밖에 보이는 발코니는 레닌의 연설대로서 유명한 곳이다. 1917년 4월 3일, 레닌이 봉인열차를 타고 핀란드역에 도착하여 연설한 후에 이 건물로 이동했다. 이곳이 볼셰비키당중앙위원회 사무국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코니가 있는 곳이 바로 레닌의 집무실이다. 수많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이 레닌의 연설을 들으려고 창문 아래에 모여 들었기 때문에 대중 선동을 위한 중요 장소가 되었다. 1917년 7월 4일, 레닌은 여기서 마지막 연설을 하였고, 7월 6일에 일어난 볼셰비키의 무력봉기에 대한 주동자로 몰려 임시정부로부터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 결국 임시정부 군대에 의하여 크셰신스카야 저택은 점령당하고, 볼셰비키 본부는 해체되었다. 이에 볼셰비키는 무력으로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음을 깨닫고 결전 태세에 돌입하였다.

크셰신스카야 저택, 저 발코니에서 레닌이 연설하곤 했다.


이 건물의 주인이었던 마틸다 크셰신스카야는 발레리나로서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연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저택은 황제가 크셰신스카야에게 하사한 건물이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난지 얼마 안되어 크셰신스카야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이곳을 떠났고, 그 자리에 볼셰비키 사무국이 들어섰다.


여기서 잠시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날 당시 니콜라이 2세의 처리를 둘러 싼 영국의 관심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왜 갑자기 영국일까? 얼마전 엘리자베스 2세 서거와 동시에 영국 왕실 뉴스가 전세계 방송을 도배하였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이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에 참석할 정도로, 전세계인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넷플릭스에서는 재빨리 다큐 시리즈 <윈저 이야기>를 재방영하기까지 했다.


윈저 이야기는 새로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지난 100년간의 왕실 역사를 되짚어 본 다큐멘터리이다.  이 시리즈는 영국 왕실이 치열한 권력 투쟁과 살얼음 같은 국제 정치 속에서 어떻게 지금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시리즈는 조지 5세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조지 5세는 엘리자베스 2세의 조부이자, 윈저 가문을 시작한 왕이다. 원래 윈저 가문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즉, 독일계 가문이었다. 독일계 가문이 윈저라는 영국의 유서 깊은 이름을 갖으며 지금까지 영국 왕실을 유지하고 있으니 이 또한 흥미롭다.


윈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조지 5세 때문이다. 조지 5세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쌍둥이처럼 닮았다. 윈저 가문과 로마노프 가문이 어떤 관련이 있으며, 그리고 그 관계에서 덴마크 왕실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잠깐 알아 보자.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2월 혁명과 함께 폐위된다. 1917년 3월 말, 러시아 임시정부 외무장관인 밀류코프는 영국의 조지 5세에게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을 보내기 위해 영국과 접촉했다. 영국 측의 사전 동의까지 얻었다. 하지만, 영국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으로 인해, 조지 5세는 당시 수상이었던 로이드 조지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러한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2006년 공개된 비밀 문서에 따르면, 1918년 5월까지 영국군정보국의 MI 1 부대가 로마노프 가족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실제 실행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니콜라이 2세(왼쪽)와 조지 5세(오른쪽)


하지만, 다큐멘터리 윈저 이야기에서는 다른 사실을 공개했다. 러시아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영국 망명을 거부한 것이 다름 아닌 조지 5세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충격적일까?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는 이종사촌지간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매우 친했고 외모도 닮아서 쌍둥이로 불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조지 5세가 니콜라이 2세의 뒤통수를 치고 배신한 셈이다.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의 DNA가 어떻길래 쌍둥이처럼 똑같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두 왕의 어머니들 때문이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1841. 11. 9. ~ 1910. 5. 6.)는 덴마크의 알렉산드라(1844. 12. 1. ~ 1925. 11. 20.)와의 사이에서 조지 5세를 낳았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1845. 3. 10. ~ 1894. 11. 1.)는 덴마크의 다우마(마리야 표도로브나, 1847. 11. 26. ~ 1928. 10. 13.)와의 사이에서 니콜라이 2세를 낳았다. 조지 5세의 어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다우마는 친자매지간이었다.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와 마리야 표도르브나가 같이 찍은 사진들을 보면 두 자매의 외모가 서로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닮았다. 쌍둥이같은 두 자매들에서 태어난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 또한 쌍둥이처럼 닮았던 것이다. 혈연으로 얽히고 섥힌 것이 유럽의 왕조들인 것은 익히 알았지만, 영국과 러시아의 왕실 또한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니콜라이 2세의 황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DNA에 있던 혈우병 인자가 황태자인 알렉세이에게 유전되는 바람에, 이것이 라스푸틴과 연결되고 결국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최후를 앞당기는데 일조하게 된다.


조지 5세가 니콜라이 2세 가족의 망명을 거부한 이유는 영국 왕실도 '내 코가 석자'였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 군주제에 일대 위기가 도래했다. 잘 알다시피 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서 독일, 터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제국의 왕조들이 일제히 몰락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폐위된 러시아 황제를 받아들이면 영국에서 왕정 폐지 여론이 조성될 수 있었다. 이에 조지 5세가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더구나 영국 왕실이 독일계라는 것이 결정타였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영국에서 반독일 정서가 극에 달하자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는 생존을 위해 개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차 세계대전 중에 왕실 비서관이었던 스탬포드햄의 제안으로 정복왕 윌리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윈저 성'의 이름을 받아들인 것이다. 스탬포드햄은 니콜라이 2세 망명 거부론자로도 알려져 있다. 조지 5세는 1917년 7월 17일 "윈저는 영국 왕가의 이름이 될 것이며, 모든 독일 칭호의 사용을 포기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영국 왕가의 이런 행보는 매우 독보적이다. 대중친화적 접근방식으로 태세전환에 성공한 케이스다. 특히 귀족도 중산층도 아닌 서민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친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대단히 영리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유럽 제국들이 다 사라지는 와중에도 영국 왕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찌보면 니콜라이 2세는 그들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이제 트램은 쿠이브이셰바 길을 따라 이동한다. 쿠이브이셰프는 러시아의 혁명가 중 한 사람이다. 지금 트램이 지나고 있는 페트로그라드 섬이 공산주의 혁명의 주요 장소이다 보니, 그와 관련된 명칭들이 적지 않다. 또 다른 예로, 핀란드역 앞의 도로 이름은 콤소몰스카야이다. 콤소몰은 공산주의청년동맹의 약자이다. 보통 표트르 파벨 요새를 관람하고 나온 여행자들은 식사할 곳을 찾게 되는데, 마침 쿠이브이셰바 거리에 한식당이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므로 여기서 시장함을 해결할 수 있다.


트램을 따라 가면 우리는 네바강의 지류인 발샤야 네브카 강을 건너게 된다. 강을 건널 때 우리는 오른쪽으로 회색의 오로라 순양함을 보게 된다. 그렇다. 러시아 혁명사에서 빠지지 않는 그 유명한 오로라 순양함! 볼셰비키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그 배이다.

오로라 순양함


이 배는 1897년에 건조를 시작하여 1903년에 완공되어 발트 함대로 인도되었다. 그리고 이 순양함은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전에 참전하였다. 이곳 발트 함대 기지를 떠나 33,000km를 운행하여 대마도 옆에서 일본 해군을 만났지만, 러시아 함대는 참패하고 말았다. 오로라 순양함은 전투 중 일부 파괴되었으나 올레그 순양함 및 젬축 순양함과 함께 러시아로 귀환한 3척의 배 중 하나로 남았다.


이후 1917년 10월 25일에는 트로쯔키의 명령을 따라서 겨울궁전에서 저항하던 케렌스키 임시정부 요인들을 향해 오로라 순양함에서 위협 포격을 가하였고, 결국 볼셰비키 혁명은 성공하게 된다. 오로라 순양함은 1948년부터 지금의 이 장소에 영구히 배치되어, 현재는 해군 박물관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트램은 이 투어의 하일라이트를 향해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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