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하다 Nov 18. 2022

묵둥이와 어른아이

다육이에게 배우는 세월의 가치

다육식물에 푹 빠진 초기의 내 모습은 사랑에 빠진 연애의 시작과 비슷했다.  

내 삶을 채우게 된 이 소중한 생명들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다육식물과 관련된 콘텐츠들로 가득 채워졌다. 좋아하는 다육이가 등장하는 영상이라 물론 재밌긴 했지만, 살아오는 동안 식물에 대한 관심도가 0에 가까웠던 나는 이 10분여의 짧은 영상 안에 이렇게나 모르는 단어가 많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었다.  


‘적심, 잎꽂이, 꼬집기’ 등의 다육식물 번식 방법, ‘철화, 생얼, 자연 군생, 묵둥이, 금품종’ 등 외형 모습이나 형질에 대한 용어, ‘마사토, 녹소토, 적옥토, 질석, 난석, 화산석, 상토’ 등 끝도 없는 흙 종류 등 난생처음 듣는 단어가 가득했다. 월세를 내고 비닐하우스 내 공간을 대여해서 다육식물을 키우는 키핑장 문화도 처음 알게 된 신선한 세계였다.  


어떤 단어는 그 생김새로 대충 뜻을 유추할 수 있었고, 조금만 찾아보면 뜻을 알아낼 수 있었지만, 어떤 단어는 그 뜻을 알아내기 쉽지 않은데 너무 자주 등장해서, 마치 다육맘들은 당연히 알고 있는 걸 나만 모르는 것 같아 답답했다. 수많은 영상을 찾아본 후에야 ‘아, 이걸 말하는 거구나.’ 이해하고는 기쁘기도 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단어를 배우며 세상을 알아가는 것처럼, 나는 새로운 다육이 용어를 배울 때마다 더 넓은 세상을 만나는 것처럼 신이 났고, 가끔 같은 개념을 조금씩 다른 맞춤법으로 사용하는 걸 보면 정확한 단어를 알아내기 위해 사전을 뒤지고 단어의 어원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전적 의미를 알아냈을 때보다 그 단어를 실제로 경험하고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더 깊었다. 낯선 단어였던 새로운 이름들은 나에게 따뜻하고 소중한 의미들이 되었다.  


‘묵둥이’ 혹은 ‘묵은둥이’는 내가 매일 접속해서 다육식물을 구경하는 식물 어플에 키워드로 등록한 단어다. 상점에서 이 단어를 검색어로 포함해서 식물을 업로드하면 내게 알림이 오게 된다. 현재 내가 키워드 알림으로 설정한 단어가 단 3개뿐이라면, 나의 묵둥이 사랑은 표현이 되었으려나.  

처음 묵둥이란 말을 들었을 때 ‘묵다’라는 단어가 들어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묵은 김치’를 떠올리며, 아, 갓 태어난 아기 식물은 아니겠구나, 뭔가 숙성된 어른 다육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여린 잎과 뿌리로 태어나 삶을 시작한 다육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하게 된다. 사람도 성장기가 끝나면 더 이상 자라지 않듯이 다육이도 다 자란 후부터는 다져지고 묵혀지기 시작하는데 어린 시절과 잎의 생김새, 빛깔, 잎장의 두께 등도 달라진다. 특히 다육 식물 중에 줄기가 긴 아이들은 초록 빛깔의 말랑하던 줄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한 분재처럼 목질화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티피 철화. 7개월 성장한 모습. 좌측에 비해 우측이 더 풍성해지고 잎장이 단단해진 모습이다.
텍사스로즈. 줄기가 나무처럼 딱딱해진 모습. '목질화'되었다고 한다.


성장기가 끝나고 다져진 다육식물을 묵둥이, 묵은둥이라고 부르는데 같은 품종의 같은 크기라도 묵둥이들이 더 귀하게 여겨지고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책정된다. 다육이들을 위협하는 요소인 고온 다습한 환경, 병충해 등에 묵둥이들은 어린 다육이들보다 강하고, 외적인 모습 역시 기품이 있으니 가치가 높은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키워내기까지 그 아이에게 쏟은 기른 이의 정성과 시간이 더해진 결과로도 합리적인 것 같다.  


그런데 오래된 것이 더 가치를 인정받는 이 시장의 법칙이 내겐 신선했다. 우리는 6개월이 멀다 하고 새로운 기종의 휴대폰과 전자 기기가 발매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새로운 기종이 출시되면 그 직전에 출시된 기종의 가격은 급격히 하락한다. 새로운 상품을 뜻하는 ‘신상’은 수많은 제품의 마케팅 키워드다. 명절에 세배를 하면 빳빳한 새 지폐를 주고 싶어 하는 어른도 아이에게 좋은 것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담은 것이겠지.  


나는 20대 때부터 신상보단 한정이었다. 새로 나온 것에 대해 관심은 있었지만, 만약 새것이 특별한 장점이 없이 그저 새것이라는 이유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 금방 오래된 것이 되어 그 가치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정판에는 욕심이 났다. 한 번도 한정판 제품을 나중에 되팔 생각으로 구매한 적은 없었다. 그저 지역 한정판, 수량 한정판은 지금 이곳, 지금 이 시기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이라서 소중한 그 느낌이 좋았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아니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더 해질지도 모를 내 만족의 가치. 


시간이 지난 것들이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제품에만 한정되진 않는 것 같다. 능력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경력이 쌓일수록 더 가치를 인정받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나이의 변화에 따라 가끔은 달라진 대우와 시선을 느끼며 살아간다. 생각해보니 능력과 관계없이 그저 나이에 따라 가치 평가를 받았던 문화도 있었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라 지금과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그 시절엔 대학 신입생은 예쁘고 반짝이는 존재였고 3, 4학년은 엄청 나이 들고 고루한 사람들로 구분 짓는 농담이 많았다. '새내기'와 '헌내기'라는 단어에서부터 느껴지는 표현. 고작 2-3년 차이인 너무도 젊은 청춘들인데, 그땐 그 시간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게 느껴졌었다.    


묵다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때를 지나서 오래된 상태가 되다.’라는 뜻이다. 내가 처음 묵둥이를 들었을 때 떠올린 ‘묵은 김치’는 내게 호감의 단어였지만 ‘묵은 때’, ‘묵은 감정’ 등 묵다라는 단어는 반드시 좋은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오래된 것은 털어내고 싶어도 잘 지워지지 않고, 지저분하고 낡은 이미지를 풍기기도 한다.  


그런데 묵둥이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묵다'와 합성된 '둥이'에 있다. '둥이'는 ‘그러한 성질이 있거나 그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라고 사전에 기술되어 있다. 귀염둥이, 막내둥이와 같이.  

묵둥이는 오래된 다육이를 사람처럼 의인화한 표현 같아 귀엽다. ‘둥이’라는 어감 자체가 가진 정감과 다육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육맘’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다육이는 일반 식물에 비해 내 새끼의 개념이 강한 것 같다.  다 자라 몸은 어른이 된 것 같지만, 여전히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새끼의 느낌이 묵둥이다. 

묵둥이 케빈카이저. 점박이 무늬들을 '피멍'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피멍을 올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 전 수의사 설채현 선생님의 영상에서 '반려견은 몸이 다 자라도 지능은 사람의 두 살 반 정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기 수준의 정신 연령인 반려견들을 죄책감이나 복수심 등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뭔가를 잘못해서 혼내면 숨어버리는 반려견을 보고 '지가 잘못한 줄은 아네'라고 생각한다거나 배변 실수를 하는 반려견에게 '일부러 나한테 복수하려고 그랬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보호자의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설명이었다. 


영상을 보면서 나도 갑자기 나의 반려견 레오에게 너무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올해 11살인 레오는 이제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심장질환도 있고 눈도 안 좋아 각종 약을 달고 산다. 그런데 나 역시도 반려견들의 평균 수명을 사람의 나이로 치환해서 나이가 들수록 정신연령까지 그렇다고 생각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레오는 신체의 나이만 노견이 되어버린, 실은 아직 두 살인 묵둥이였을 뿐인데. 나의 레오 사랑은 스스로 생각해도 하늘 높지만, 그 전보다 더 레오를 아기처럼 살뜰히 대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기. T_T 

레오 당황.  2021


실은 레오뿐만 아니라, 요즘은 내가, 우리 모두가 묵둥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진짜 다 컸다고 생각했던 시기는 일곱 살 때, 그리고 운전대를 처음 잡았을 때뿐인 것 같다. 마흔이 되면 정말 안정적이고 여유롭게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두렵고 어려운 일 투성이고,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좋은 가치 평가를 받고 싶지만, 오래되어 지워내야 할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군분투하고 있는, 묵어가지만 여전히 둥이인 어른 아이. 


다육이 묵둥이가 시장에서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고 인기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여전히 누군가가 사랑으로 보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 묵둥이들도 하엽 떼고, 분갈이해주고, 영양 주고 병충해 관리해주면 더 건강하고 아름다워질지도 모르겠다. 여보 우리 서로 잘 살펴줍시다. >_<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