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다육이, 춘봉이가 남긴 마음
'정말, 한 장도 없어.'
믿을 수가 없어서, 아니 믿고 싶지 않아서 찾고 찾고 또 찾았다. 그래도 두 달 넘게 같이 지냈는데, 사진이 한 장은 있겠지. 잠시 내 눈에 안 보이는 걸 거야. 불안함의 근원은 사진이 사라졌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었는지 기억조차 없다는 데에 있었다.
내 삶에 소중한 한 부분이 된 다육이와 관련된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나와 다육이의 인연이 처음 시작되었던 3년 전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다육식물에 무지했던 그때, 나의 첫 다육이 춘봉이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사실 그다지 내게 큰 의미가 아니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이별의 슬프다.
춘봉이의 흔적을 찾으려고 나의 모든 아카이브를 뒤졌다. 그런데 폰에서도, 클라우드에서도, pc에서도 춘봉이의 사진을 한 장도 찾을 수 없었다. 산호와 닮은 춘봉이의 정체가 궁금했던 내가 그 학명인 ‘유포르비아 락테아(Euphorbia Lactea)’를 찾아내 스크린 캡처한 이미지만 남아있었다. 지금 내 폰의 사진첩에는 내 사진보다 다육이 사진들이 훨씬 더 많은데. 난 그때 그 아이에게 얼마나 무심했던 걸까.
최근 몇 달 동안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김창옥 교수님의 강연으로 자주 이끌었다. 내게 마음의 토닥임이 필요함을 알고리즘이 느꼈던 것일까. 웃음을 놓지 않으면서도 쉽고 따뜻한 말로 마음을 전하는 교수님의 강연은 눈물과 함께 내 마음속 응어리를 흘려보내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중에서도
“상처받았다는 것은 당신이 진심이었다는 뜻이에요.”
라는 말씀이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사람과의 관계든, 일이든 진심이 아닐 때는 절대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한 번 친해져 볼까? 저거 한 번 해볼까?라는 마음으로 대한 관계나 일에서는 ‘상처’라는 마음의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나 상처투성이인 것은 그래도 내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진심으로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나았다.
그런데, 3년 전 춘봉이가 떠났을 때 난 어땠나. 지난 글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역시 난 식물이랑 안 맞아’ 라며 왜 그 아이가 떠났는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이나 아쉬움, 속상한 감정이 그다지 크지 않은 상태로 그냥 그렇게 잊었던 것 같다. 나는 춘봉이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부름으로 갔던 꽃시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가 예쁜데 살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데려왔다. ‘예쁘게 찍을 배경이 없어서’라는 건 핑계였겠지. 사진 한 장도 찍지 않을 만큼 내 마음속에 그 아이의 자리가 없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많이 미안하고 더 많이 슬퍼졌다.
어떤 마음은 이별한 후 시작되기도 한다. 이렇게나 뒤늦게 다 끝나버린 후에 깨닫고 진심을 담아 후회하지만 전할 수 없다. 나의 진심이 외면당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차갑고 딱딱한 마음들에 나는 상처받고 아파했었다. 그래서 나는 타인에게 따뜻한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삶의 어느 순간에 나는 춘봉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진심이 빠진 빈껍데기처럼 행동했을지도 모르겠다.
다육이들을 키우다 보면 하루아침에 손 써볼 새도 없이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너무 속상해하고 마음 아파하면 이 취미생활을 계속하긴 어렵다. 최대한 그런 경험을 줄이기 위해 더 공부하고 미리 예방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순간에는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춘봉이와의 이별이 지금에서야 이렇게 마음 아파진 건, 내가 진심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별 후에야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언가에 진심을 다하는 것은 결과가 좋을 때는 그만큼 행복과 성취감을 높여주지만, 반면 그 대상으로부터 상처받을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것은 몸이 다치는 것만큼이나 두렵고 아픈 일이라, 이를 피하기 위해 상대와의 관계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일을 할 때 적당히 상황을 조절하는 것은 어쩌면 현명한 자기 방어일지도 모르겠다.
프로 운동선수의 무리한 훈련이 부상으로 이어지면, 잘했다고 칭찬하는 사람보다 무모하다고 질책하는 이가 많을 수 있는 것처럼, 진심을 다한 이가 상처받는 건 마음의 농도를 조절하지 못한 마음 주인의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마음의 농도를 조절하는 기술을 나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나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게 많은 나인데도, 그것만큼은 별로 배우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밀당의 기술은 남녀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관계 사이에는 에너지가 존재한다. 그 에너지의 법칙을 세밀하게 계산해서 유지해야 하는 관계는 내겐 너무도 버겁고 힘들다. 지나온 삶과 현재의 내 주변을 돌아보니, 마음의 농도에 물 한 방울 안 탄 원액의 관계들이 나를 지켜주고, 또 내가 지켜온 관계들이다.
프로 운동선수가 부상을 입으면 질책받는 이유는 부상 때문에 한동안 운동을 쉬거나, 부상으로 예전보다 기량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진심을 다한 결과가 상처로 끝났을 때, 그 관계는 끝이 나더라도 새로운 관계에 시작을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여전히 마음을 다해 살아갈 수 있다면 괜찮은 것 아닐까.
한동안 잊고 있었던 후회, 미련이란 감정이 춘봉이를 통해 되살아 난다. 그것은 진심을 다하고 잘못되었을 때 마음을 찌르는 상처만큼 통증이 강하진 않지만, 더 묵직하고 오래도록 씁쓸한 불편함을 남긴다. 진심을 다하고 얻은 상처는 세상에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고 나를 위로할 수 있지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관계에 대한 미련과 후회는 원망의 화살이 나에게 향한다.
"여보, 첫 춘봉이 어떻게 생겼었나 기억 나?"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지금 키우는 춘봉이보다 그 춘봉이가 더 예뻤었다고 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랬었던 것 같다. 키핑장에 가서 다육이들을 돌볼 때마다 나는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은 그 아이의 얼굴을 그리며 생각하겠지. 내 마음을 가득 채운 이 미안함이 조금씩 희석되어 나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해 준 고마움으로 완전히 치환될 때쯤, 나는 다육이들만큼 더 성장해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