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속담에 '가을비는 떡비고 겨울비는 술비다' 라는 말이 있다. 한가을 비가 오면 농사일을 못해도 이미 추수한 곡식들로 넉넉하니 집에서 떡이나 해 먹으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겨울은 어차피 할 일이 많지 않으니 비가 오면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하릴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술이나 마신다는 것이다.
올해는 유독 술비가 자주 내린다. 이상기온으로 유독 따뜻한 난동인 탓인지, 이제 12월 중순 눈이 올 법도 한데, 눈 대신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눈이 오면 하루종일 앞마당과 논밭에 눈을 치웠어야 할 그 시절 사람들은 겨울비가 오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처마 밑에서 마시던 술에는 그 기쁨마저 담겨 더 달았을 테다.
눈을 치우는 노동에 직접적으로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도시 사람이기에, 눈 대신 비가 내리는 겨울이 달갑지는 않다. 그저 여기저기 펼쳐진 우산으로 젖는 옷자락이 불편하고 귀찮을 따름. 이럴 때는 이동을 최소화하고 한 군데에 곰처럼 오도카니 들어앉아 오래오래 게으름 피우며 술을 마시는 게 최고지 싶다. 조상님들이 명명한 '술비'가 내린다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도 있으니 말이다.
양곱창이 들어간 전골. 국물이 텁텁하지 않아 좋다
그리고 그 안주로는 만두전골 만한 것이 없다는 데에 모두의 의견이 모아졌다. 각종 야채와 멸치 등으로 국물을 진하게 우려내고, 잘 익은 김치도 넣은 빨간색 만두전골. 거기에 오늘의 스페셜 게스트는 양곱창울 더해주자. 쫄깃한 양은 그 통통함으로 밋밋하지 않도록 식감을 더해주고, 곱창에서는 곱이 우러나와 국물에 고소함을 안겨준다. 포르륵 끓여내어 건더기들을 한차례 건져 먹고 나면 국물은 어느새 색깔부터 한층 더 진해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국물 한 술 다시 떠보면 초반에 맑고 개운하던 국물과는 어느새 또 다른 깊은 맛의 진국이 되어있는데, 만두를 넣어 줄 타이밍이란 신호다.
손만두는 반갑고 귀하다.
얇은 피로 송알송알 직접 빚어낸 손만두는 은근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손쉽고 맛도 좋은 냉동 만두가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 마트에 즐비한 가운데, 어여쁘게 매만져 빚어지고 난 이후 단 한 번도 냉동실에 들어간 적 없는 밀가루피 특유의 보드라움은 역시나 압도적. 어떠한 조리법을 거쳐도 특유의 식감이 무뎌지지 않는다. 전골 국물 속 데굴데굴 굴려가며 푹 익히니, 제법 고기가 실하게 든 만두소 사이사이로 진득한 국물이 스며들어 촉촉하면서도 녹진한 맛이 오롯이 살아있고, 입안에 매끄럽게 닿는 느낌에 온몸이 녹는 듯하다.
만두 몇 알까지 챙겨 먹고 나니 제법 배가 부르다. 평소 같으면 2차로 자리를 옮기겠지만, 밖에는 여전히 술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중. 겉옷을 챙겨 입고 몸을 일으키는 대신 야채와 만두 사리, 그리고 육수를 추가하기로 한다. 비어가던 전골냄비가 다시 풍요롭게 채워지면 우리들의 2차가 지체 없이 시작된다. 소란스러운 수다와 함께 뭉근히 끓이고 끓이며 시간이 쌓인 만큼, 우리의 만두전골은 이제 거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국물이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집 갈 때쯤에는 비가 그치면 좋겠다' 잔을 부딪히며 괜히 한마디 거들어본다. 하지만 집에 갈 마음이 언제쯤 들지는 잘 모르겠다. 술비가 내리는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