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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순 Dec 20. 2023

번거롭고 손 많이 가는 것들에 대하여

김밥과 수제비



요즘 즐겨보는 예능 프로마다 김밥이 화제다. 연예인들이 외국에서 한식, 정확히는 간단한 분식을 주력메뉴로 삼아 장사를 하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들이 성행 중인데, 여기에 요즘 미국을 필두로 한 해외의 '김밥 붐'이 맞물린 탓이다. 지하철 역에서도 단돈 이삼천 원에 팔고 있을 정도로 우리 눈에는 흔해빠진 음식이지만 막상 직접 만들어보면 품이 정말 많이 든다. 그런데 또 외국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니. 보는 프로그램마다 '김밥 지옥'에 빠져 허덕이는 모양새가 반복된다.

자칭 타칭 '김밥 마니아'로서, 내가 좋아하는 재료 잔뜩 넣고 김밥을 직접 말아먹는 데에 재미 들렸던 시기가 있었다. 잘 씻은 묵은지와 햄, 맛살, 통통하게 부친 계란 지단을 넣고, 오이와 참치는 넣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밥은 고슬고슬하게 지어 참기름과 소금을 넉넉하게 넣어 밑간 하기. 다량의 참기름은 늘 배신하지 않는다.


모양은 제각각이여도 맛은 남다른 집 김밥


나름 한동안 열심히 해 먹었었고, 그 맛은 좋아하지만 요즘은 더 이상 직접 김밥을 만들어 먹지 않는다. 들어가는 재료 가짓수도, 밑준비에 들어가는 시간도, 재료가 가운데로 오도록 꾹꾹 잘 마는데 들어가는 노동력도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옆구리가 터지고 속재료가 흩어져 한 줄 그대로 버리기도 하고, 배불러서 남겼다가 잘 만 김밥 그대로 쉬어버리기도 하고, 만들고 난 재료들 다 소진을 못해 모조리 상해버리기도 하고. 다양한 실패 끝에 이제 그냥 김밥은 사 먹기로 했다.

이 경험 이후로 나는 시중에 파는 김밥 가격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깨달았고, 김밥을 만들어 파는 모든 분들에게 존경심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오버스럽긴 하지만, 주로 김밥을 담당하시는 중년 여성의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생물 횟감, 튀김 등이 들어간다고 해도 일식 김밥 후토마키가 대여섯 배 훌쩍 넘는 가격을 호가하는 것만 보아도. 멋들어진 요리 축에 끼지 못해, 그냥 저렴한 가격에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해져 버린 음식. 범람하는 '김밥 지옥'이 김밥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일으켜주는 것 같아 나는 요즘 내심 반갑다.




동네에 한 오래된 실내포차가 있다. 간판을 단 시점에 따라 몇 년 된 집인지 숫자가 바뀌는데, 가장 높은 숫자가 35년인걸 보면, 그보다는 더 족히 긴 시간 이 자리를 지켜온 듯하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6-70대 연세 지긋하신 할머님 혼자서 손글씨로 메뉴판 빼곡히 적어가며 오고 가는 식객, 취객들을 속 따숩게 먹여보내신 곳이었다.

자작자작 국물과 함께 촉촉하게 지져 낸 고갈비, 폭삭 익은 묵은지를 넣어 닭볶음탕처럼 끓여 먹는 닭볶음탕, 파삭파삭 어찌나 맛깔나게 부쳐내셨는지 두 판 시켜 먹은 부추전까지. 모든 음식이 맛있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서비스로 내어주신 수제비 한 대접이었다.


서비스로 내어주신 수제비. 얇게 뗀 그 맛이 일품이다


멸치 국물에 아마 다른 요리에 쓰다가 자투리로 남았을 애호박과 감자 아주 약간을 넣고, 밀가루 반죽을 직접 뗀 손수제비가 듬뿍 들어갔다. 언뜻 보기엔 투박하지만, 수제비 두께가 얇아 입안에서 닿는 매끄러운 식감이 참 좋다. 한 번이라도 직접 수제비 반죽을 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밀가루 반죽을 치대어 이렇게 얇게 한 점 한 점을 떼어내는 게 얼마나 성가시고 번거로운 일인지. 게다가 적은 양 맛보기도 아니고 이렇게 한 대접 푸짐하게를 모든 손님에게 서비스로 주신단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닐 텐데 우직하게 이어 온 그 고집에 절로 감탄이 인다.



아마 할머님은 가게가 아마 앞으로도 가게가 문 닫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수제비를 내어 주실 것이다. 김밥도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여전히 저렴하고 흔한 먹거리로 남아있을 테다.


효율적이고 간편한 것을 추구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번거롭고 손 많이 가는 것들을 오늘도 변함없이 기꺼이 해내는 모든 분들을 존경한다. 우리가 호들갑떨기 전부터 '김밥지옥'에도 '수제비지옥'에도 묵묵히 갇혀오셨을 그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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