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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순 Dec 28. 2023

한우가 숙성되는 200일 동안.

드라이에이징 한우



연말을 맞아, 올해 맛있게 먹었던 식당 중 한 곳을 다시 찾았다. 숙성 한우를 일식 베이스 코스 형식으로 구성하여 파는 곳이었는데, 접객도 음식 맛도 좋아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더랬다. 이곳의 경우, 드라이에이징 한우는 최소 150일 이상을 숙성시켜 내놓으신다고 하는데, 지난 방문 당시에는 아직 숙성이 끝나지 않아 맛보지 못했기에 재도전 차 다시 식당을 찾은 것이었다.

생고기를 바람, 온도, 습도 등을 조절해 가며 숙성시킴으로써 풍미와 식감을 증폭시킬 수 있는 드라이에이징은 다 좋지만 숙성이 되어 갈수록 고기의 중량이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다. 한 달 정도 숙성시켰을 때 최소 10%는 감소한다고 하니, 귀한 투플러스 등급의 한우를 150일 이상 숙성 시켜서 먹는 것은 참으로 호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연말이니까. 올 한 해도 고생했으니까. 그 사치스러운 경험 기꺼이 한번 해보자 하고 몇 달 전과 같은 자리를 찾았다.



이 날 우리에게 주어진 고기는 총 200일의 숙성을 거쳤다고 했다. 여름께부터 숙성이 시작되었어야 맞는 계산이다. 두 계절을 꼬박 보낸 등심 새우살과 살치살은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어서야 이윽고, 철판 위에서 섬세하게 구워지고 난 뒤 우리 앞에 다다랐다.

고기는 부드럽게 썰렸고, 입 안에 넣자마자,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응축된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치즈처럼 콤콤한 듯하면서도 지방질의 기름진 맛이 농밀하게 퍼졌다. 조직감은 생각보다 단단해지만 질기지는 않고 기분 좋은 치감을 안겨주었다. 풍부하면서도 동시에 산뜻한 육향은 한 접시를 말끔히 비우고 난 후에도 오래 입가를 맴돌았고, 그 잔향 만으로도 곁들이고 있던 말벡 와인을 풍성하게 돋워주었다. 200일의 시간을 먹는 듯한 맛이었다.



지난여름부터 한 해가 저무는 지금까지. 나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모든 순간마다, 이 한 덩이 고기는 얌전히 이곳에서 숨 쉬며 숙성이 되어왔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총 8개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동안. 약 40시간에 걸쳐 운동을 하며 지내는 동안. 30회 정도의 저녁약속으로 친구들과 모이고, 4번의 생일파티와 3번의 결혼식에도 참석하는 동안 말이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남편이 함께하는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에도 이 고기는 여기에 있었을 것이고, 무사히 비껴가나 싶었던 코로나에 걸려 끙끙 앓아누워있던 그때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심지어 8월에 태어나 새 식구가 된 조카가  제법 사람의 구색을 갖추는 동안에도..라고 생각하니 제법 경이로운 마음이 든다.



그 200일의 시간이 고기의 체적을 앗아가고, 대신 이 말도 안 되는 풍미를 선사한 만큼, 나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을 테다. 스스로 뾰족하게 판단하긴 어렵지만, 부디 어리숙함을 앗아가고 노련함과 현명함을 축적시켜주었기를 바란다. 숙성고의 고기가 견뎌낸 모든 시간, 부족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최대한 열심히 살아낸 거 같긴 한데. 숨죽여 버티는 동안 제 살을 잃을 만큼, 눈물도 흘리고 고심도 많이 한 것 같은데. 나도 이 한우스테이크 한 접시처럼 200일만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있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감히 욕심을 내본다.


올 한 해도 잘 숙성되느라 고생 많았다.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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