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모든 달력이 새로운 권의 첫 페이지로 펼쳐졌고, 스마트폰 화면 속 여기저기 '1'이라는 숫자가 박혀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만 할 것 같고, 희망차고 활기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은 연말로부터 이어져온 피로로 온몸이 무겁기만 한데 말이다.
평소 같으면 어디 훌쩍 멀리 놀러 나가거나, 왁자지껄 신년회를 하거나 떠들썩하게 보낼법한 연초지만, 올해는 신체 재정비 겸 좀 차분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묵은 옷가지들을 버리고, 냉장고 속 잠들어있던 음식들을 처분했다. 욕조와 가스레인지 주변도 땀이 나도록 닦아주었다. 한결 기분이 개운해졌지만, 우리 집의 평상시와는 다르게 반짝반짝 빛나는 주방을 보니 이걸 건드리고 싶지 않아 졌다. 저녁은 외식을 해야겠다. 남편과 함께 집 근처 순댓국 집에서 간단히 한 끼를 때우기로 했다.
동네에 생기고 난 후 한 번은 꼭 와보고 싶었던 순댓국집이었다. 인테리어랄 것도 없는 말끔한 실내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그 한편에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보니,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부속 고기의 비계까지 들어있는 것 순댓국과 비계를 모두 제거한 순댓국, 총 두 종류를 팔고 있는 것이었다. 비계를 포함한 순댓국의 이름은 '돈순대국', 비계를 제거한 순댓국의 이름은 '복순댓국'이라고 했다. 가격은 '복순댓국'이 천 원 더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품절도 더 잦다고 한다
호기심이 동한 우리는 각각 한 그릇을 시켜보기로 했다.
기본 돈순댓국과 비계제거 복순댓국. 복순댓국은 매진이라 붙었으나 다행히 주문이 가능했다.
천 원의 가격 차이가 나는 이 두 순댓국은 얼핏 보기에는 구별이 안 갈 정도로 동일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뽀얀 사골 국물 속 여러 가지 형태를 한 부속고기들이 들었고, 까만 피순대와 같은 모양새의 순대도 각각 서너 점 들어있다. 초록초록 선연한 빛깔 대파도 공평하게 송송 흩뿌려져 있다.
기름진 고기가 듬뿍 들어간 돈순대국
그 너머의 고기를 숟가락으로 몇 번 휘저어보면 그제야 차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름진 비계 부분이 붙어 탱글한 탄력을 자랑하는 고기들이 들어간 '돈'순댓국은 국물에도 그 기름이 녹아 입에 쩍쩍 붙는 느낌이 들었다. 비계가 들었을지언정 잡내 없이 고소하고 진한 국물이었다. 곱창과 머릿고기들이 함께 씹혀 식감도 다채로웠다. 이렇게 맛있는데, 굳이 천 원을 더 받아가면서 까지 이 비계를 일일이 제거할 필요가 있나. 다소 삐딱한 궁금증이 들었다.
살코기 위주의 복순대국
조금 전 먹은 순댓국과 달리 '복'순댓국은 일견 고기가 적게 들은 듯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비계들로 탱글거리던 이 전과 달리, 부드럽고 차분하게 국물에 잠겨있어 상대적으로 부피가 작게 느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국물 한 술 들이켜보니 좀 더 깨끗하고 담백한 맛이 났다. 분명 아까도 충분히 말끔한 인상이었는데, 조금 더 갈고닦아 핵심만 남긴 듯한 정돈된 국물이었다. 순댓국 자체나 아니면 기름진 고기를 선호하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듯해 보였다. 천 원의 차이, 비계를 모두 제거하는 추가 손질 작업의 차이는 분명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쩜 우리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르겠다. 기름진 것들은 생긴 것도 그 맛도 유혹적이고 그 자체로 맛있지만, 버릴 것은 모두 버리고 덜어낼 것을 모두 덜어낸 '살코기'는 보기에는 조금 더 단출할지언정, 보다 온화롭고 담백하다. 꼭 어느 하나만을 좇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기름진 것은 기름 진대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고, 담백한 것은 담백한 대로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살다 보면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과밀한 것보다는 온유한 것이 천 원어치만큼 더 가치를 발휘할 때가 있는 듯하고 말이다.
뚝배기 두 개를 남편과 서로 교환해 가면서 우리는 '돈'순댓국과 '복'순댓국을 모두 말끔히 비웠다. '돈'도 많이 벌고, '복'도 많이 받기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