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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脫出), 그 막막하던 80년대 말을 생각하며

마흔 살이 되기를 거부한다

by 석운 김동찬

이곳은 아직도 여름이 한창이지만 지구 반대편 북반구엔 겨울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강원도 동해안에는 눈이 너무 내려 큰일이라는 소식이 들리고 또 러시아의 작은 도시 소치라는 곳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의 메달 소식도 연일 들려온다. 올림픽 하니까 문득 그 옛날 88 올림픽이 생각났고 그 88 올림픽이 열렸던 한국의 80년대 말이 생각났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까마득히 잊혀져 가는 시간이겠지만 80년대 말은 한국에 민주화의 봄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하던 때였고 88 올림픽의 열풍이 전국을 휩쓸던 때였다. 그때 나는, 언제나 이기적이었고 스스로 쌓아놓은 성(城)을 내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결코 허물기를 용납하지 않았던 나는, 마흔 살이 되어가고 있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마흔 살이 넘어서도 사는 것이 지겹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대단해. 무슨 재미로 저렇게 살아갈까?’ 우리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우린 대학교 2학년이었고 그때 동숭동 대학로를 같이 몰려다니던 우리 네 명 중 가장 조숙했던 한 친구(그는 69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아직도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이다)가 어느 저녁 술자리에서 음모를 꾸미는 모사처럼 눈초리를 빛내며 자못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우린 이미 너무 늙었어. 나이 사십을 뚝 꺾어 반이나 먹었으니 무슨 감수성이 남아있겠어’라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우린 모두 술잔을 들어 동의했다. 그리곤 입을 모아 말했다. 스무 살은 이미 먹었으니 할 수 없지만 마흔 살을 넘기지는 말자고. 그건 정말 너무 지루할 거라고. 사십 전에 할 일을 다하고 미련 없이 훌훌 뜨자고. 그리고 그때엔 결코 엠페도클레스처럼 신발을 뒤에 남겨두는 우(愚)를 범하지는 말자고.

그리곤 세월이 흘렀다. 우린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갈 길을 갔다. 스무 살 때의 우리는 이십 년의 세월이 그렇게 빨리 갈 것이라는 것을 결코 몰랐다. 그건 영원처럼 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세월은 결코 혼자 가지 않는다. 낙타처럼 굴곡이 있는 그 등허리 위에 우리 모두를 태우고 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우린 삶이라는 이름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바람에 묻어오는 모래가루가 얼굴을 때릴 때 사방을 둘러보아도 나아갈 곳이 없다는 막막함에 빠져버린다.

80년대 말 내가 그랬다. 밀려나듯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결혼을 하고 사업을 시작하고 바쁜 매일 속에서는 세월이 가는 것도 몰랐다. 그 사이에 프랑스에 유학 갔던 막내 여동생이 사고로 죽어 재가 되어 돌아왔고 그를 애통해하시던 아버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가슴속에 자식과 남편을 같이 묻고도 굳건한 모습을 보이셨던 어머님도 결국은 일 년을 못 버티시고 가슴을 앓다 돌아가셨다. 그리고 87년이었다. 노태우랑 두 김 씨가 서로 대통령을 하겠다고 물고 뜯고 있었고 88 올림픽만 열리면 세상이 곧 바뀔 듯이 사람들은 들떠있었지만 난 서른아홉이란 내 나이를 되뇌고 있었다. ‘이대로 마흔 살이 될 수는 없어. 난 결코 마흔 살이 되지 않을 거야.’ 난 정말 마흔 살이 되기 싫었다. 87년, 난 서른아홉이었고 마흔 살이 되기 싫은 나는 그때 사춘기의 소년처럼 열병을 앓기 시작했었다. 우리 모두 스무 살이었을 때 마흔 살을 넘기지 말자던 그 친구들은 그냥 잘 살고 있었다. 글을 쓰는 친구는 부지런히 글을 쓰고 있었고 대학 교수가 된 친구는 곧 주임교수가 될 것이라 했고 방랑벽이 유독 심했던 또 한 친구는 여전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나름대로 잘 살고 있었다. 아무도 마흔 살을 넘기지 말자던 그때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았고 나도 그 약속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87년, 그때에야 비로소 서른아홉 살이 된 것을 깨달은 나는, 세월의 낙타 등위에서 문득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사막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마흔 살이 되기를 거부한 나는, 다시 옛날 젊은 시절처럼 내 방으로 돌아와 칩거를 시작했다. 대학시절 내내 교수 연구실에 처박혀 있었던 것처럼, 군에 있으면서 내내 교수부의 내 방에서 음악과 책에 빠져있었던 것처럼, 서른아홉 살이 된 그 해 나는 할 수 없이 회사에는 나갔지만 직원들에게 모든 업무를 맡겨놓고 그 옛날처럼 내 방에 들어앉아 꽈리를 틀었다.

마흔 살이 곧 다가오는데 더 이상 다른 일에 시간을 뺏길 수는 없었다. 그 옛날 친구들과 약속했던 대로 마흔 살이 되기 이전에 삶을 마감하던지 아니면 세월을 붙들어 매서 서른아홉에 머물러 있던지 그도 저도 안되면 최소한 마흔 살을 넘어 살아야 할 궁색한 변명거리라도 만들어야 할 그 해 내내 나는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작은 내 방 안을 홀로 서성이는 몽유병자였다.

그래도 세월은 흘렀고 그 87년에도 가을은 왔다 갔고 이윽고 겨울이 왔다. 찬바람이 불고 간혹 눈이 뿌리기 시작하는 12월이 되었을 때 나의 조바심은 극에 달했다. 마흔 살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나는 의외로 허약한 내 존재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고 그 무능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비굴함에 치를 떨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나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밖으로 나와 어둠 속으로 내 존재를 감추고 무작정 걸었다. 연말이 되어 흥청거리기 시작하는 도시의 밤거리에서 나는 여전히 혼자였고 시끌벅적한 밤의 소음 속에서도 나를 감싸고 있는 나만의 세계는 적막이었다. 그 적막함을 메우기 위해서 때로는 친구들을 불러내 같이 마셨고 아닐 땐 혼자서도 마셨다.

탈출하고 싶었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픈 안타까운 몸부림이었다. 세월로부터의 탈출, 아니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아니면 무력한 나 스스로로부터의 탈출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날 초저녁부터 마셨던 어느 새벽, 머리가 아파 깨어보니 어느 허름한 여관방이었다. 몸서리치듯 별안간 한기가 느껴졌고 억지로 몸을 추스른 나는 탈영병처럼 그 여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미로처럼 엉킨 골목들을 빠져나와 집으로 왔다. 웬일이냐고 묻는 아내의 물음에 나 좀 자게 해달라고 말하곤 하루 종일 잤다. 그리고 저녁때 일어나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이 시(詩)를 썼다.


1. 탈출(脫出)

새벽녘에 도시(都市)를 탈출한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아직도 끈적거리는 지난밤을 빗어 넘기며

미로(迷路)처럼 엉킨 골목들을 헤치고

꿈속에서 보아둔 숲을 향해

비척비척 걸음을 옮긴다.

등 뒤엔 미명(未明) 속의 도시

그 사방의 벽(壁) 속엔

깊은 잠 속에 널브러져 있을 사람들 틈바귀에

어린 작부(酌婦) 하나

채 오므리지 못한 두 다리 사이론

고향의 실개천이 흐른다.

2. 방황(彷徨)

내 지금 걷고 있는 숲 속엔

훵 하니 키 큰 나무들

그 모가지들을 옭아 쥐며

바람이 음울한 목소리로 떠돌고 있다.

기억 속의 계절은 봄이어야 하는데

온통 겨울만 가득한 이 숲 속

무엇을 찾아 나선 길인가

떠도는 바람소리에 문득문득

피가 섞이듯 날 부르는 소리

돌아서면 숲 속 가득한 허공(虛空)

홀리듯

홀리듯

뒤돌아보며 비틀거리는 발걸음

3. 환영(幻影)

보이는 것은 보이기를 그쳤는데

눈 앞에 그득한 이 광경들은 무엇인가

춤추듯 율동하는 그대들은

과거인가 미래인가

말하라

두 손을 뻗어 휘저으면

두 손에 가득한 허공

꺄르르르

기억의 후두부(後頭部)를 울리는 저 웃음소리

부끄러움으로 온몸을 휩싸는 저 웃음소리

느낄 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오래인데

이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멈추라 춤추는 무리들이여 제발 그쳐 다오 그 웃음소리도

바람만 떠도는 겨울 숲 속 한가운데

식은땀 가슴으로 받아내며

홀로 서있는 사내 하나

4. 상실(喪失)

두 손을 들어 눈 앞에 모으면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

머릿속 그득했던 것들도

가슴속 그득했던 것들도

핏줄 속 그득했던 것들도

이윽고

겨울 햇볕 속에 투명한 두 손바닥

받쳐주던 뼈도 사라지고

감싸주던 살도 사라지고

돌고 돌던 피마저 사라지면

보이는 건 오직 사방으로 흩어지는 손금

세월의 앙금 인양 오솔길로 남아

나를 부른다

5. 독백(獨白)

바람만 떠도는 겨울 숲 속

소리쳐 내뱉어도 메아리도 남지 않는 내 목소리

뭉쳐진 가슴 입으로 튀어나오면

마디마디 갈라져 서로 부딪다

허공 가득히

떨어져 내리면 마른 잎사귀들

-겨울 땅 위에 얼어붙은 내 입술들-

숱하게 쏟아놓은 말들은 모두 어디 가고

언 땅 위에 형체만 남았는가

이 숲 속에 눈 내리면

골짜기 속으로 모두 묻혀버릴

내 입술들, 그리고 지나간 말의 파편들

6. 회한(悔恨)

맑은 햇살만 보아도

젖어들던 눈망울,

머리 딴 소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울먹이던 가슴

지금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나간 것들이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여

무엇을 찾아다녔는가

오, 그 긴 세월 동안 무엇을 얻었는가

텅 빈 가슴속엔 회한의 앙금

미로(迷路)처럼 복잡한 머릿속엔

떨어도 떨어도 떨리지 않는

환영(幻影)만 그득

현재(現在)가 싫어 떠나온 이 길

보여야 할 것은 보이지 않고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것은

지나가 버린 것들뿐.


지금도 이 시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혼자 웃는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고 웃는지 아니면 지금의 나를 보고 웃는지는 아직도 나도 모른다.

석운 김동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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