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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으며

미라보 다리, 기욤므 아뽈리네르

by 석운 김동찬

새해를 맞으며


그 한밤중에 왜 갑자기 아뽈리네르의 시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바다 건너편 스카이 타워 꼭대기에서 터져 오르는 폭죽은 어두운 하늘을 아름다운 불꽃으로 밝히고 있었다. 스카이 타워에서부터 뻗어 올라간 폭죽이 하늘 한가운데서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요란스러운 소리와 더불어 밤하늘에 빛 잔치를 벌일 때마다 이쪽 편 바닷가의 사람들은 두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어둠을 뚫고 멀리서부터 와서 이곳 스탠리 베이(뉴질랜드 데본 포트 서쪽 작은 해안) 바닷가에 삼삼오오 가족들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그리고 다정한 연인들끼리 자리를 잡고 모여있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 이 저녁 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 축하의 불꽃놀이를 보려 온 사람들이었다. 바로 집 앞이 스탠리 베이 바닷가였기에 12월 31일 이번 해의 마지막 밤이 깊어지고 11시 반이 넘자 수도 없이 많은 차들이 이곳 바닷가를 향해서 몰려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곳 바닷가가 새해 0시를 기해 축하의 폭죽을 터뜨리는 스카이 타워의 모습을 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있는 일이지만 스카이 타워의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뻗어 올라 하늘에서 마음껏 자태를 뽐낸 불꽃들이 밤바다 위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꼭 연말연시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나가보자는 아내의 말에 나도 아내와 같이 집을 나와 바닷가 사람들 사이에 끼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곳에 사는 주민들도 편안한 옷차림으로 집에서 나와 바닷가를 향하고 있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바닷가에 나와 있었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손에 샴페인 병과 잔을 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새해를 여는 폭죽 소리에 맞춰 가족 친지와 더불어 축배를 들려는 모양이었다. 평소엔 사람의 인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용하기만 하던 바닷가 이 마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들뜰 수 있는 그런 정경이었다. 맞은편 도심 한가운데 우뚝 선 스카이 타워는 푸른빛 붉은빛을 번갈아 바꾸어 발하며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고 있었고 이곳 바닷가와 도심을 크고 너른 띠로 나누어 놓듯 바다가 잔잔한 검은 물결로 출렁였다. 바닷가 오른쪽 멀리로는 하버 브리지(오클랜드의 남과 북을 잇는 큰 교량)가 보였고 그 위로 띄엄띄엄 크고 작은 차들이 서서히 빛을 내뿜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오 분 전에요’라고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자 ‘우와’하며 몇몇 사람이 바다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오 분 만 있으면 해가 바뀌는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나도 차츰 무언가를 기대하며 첫 폭죽이 터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몇 사람이 입을 맞추어 ‘열 아홉 여덟 일곱,’하고 세기 시작했고 곧이어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맞추어 ‘셋 둘 하나,’하는 다음 순간 맞은편 스카이 타워 꼭대기 양 쪽에서 불이 튀어나왔고 튀어나온 불이 하늘로 올라가 꽃 모양으로 터지는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 ‘우와’하는 함성이 튀어나왔다. 곧이어 서로서로에게 주고받는 ‘Happy New Year’가 바닷가 어둠을 가득 채웠다. 맞은편 바다 건너에 선 계속해서 폭죽이 터져 올랐고 가지각색의 불꽃 모양들이 밤하늘에 퍼져 올랐다가 검은 바다 물결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늘의 불꽃 바다의 검은 물결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Happy New Year’,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별안간 해가 바뀐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도 계절도 해도 원래는 없었던 것인데 사람들이 편의상 만들었고 이제 와서는 그것이 바뀔 때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들자 그냥 피식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공연히 가슴이 더 허전해졌다. ‘왜 들어가시게요?’하고 아내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장난하다 들킨 어린애처럼 ‘아니 그냥. 당신 좋은 대로 해요,’하며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늘에서 터져 내리는 불꽃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고 그 흔들리는 손 너머로 멀리 하버 브리지가 보였고 그 다리 밑에서 이곳 바닷가까지 어둠을 따라 흐르고 있는 검은 바다의 물결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이 아뽈리네르((기욤므 아뽈리네르: 20세기 초 프랑스 시인)의 시의 한 구절이었다.


미라보 다리

기욤므 아뽈리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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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팔로 만들어진 다리 아래로

영원한 시선의 피로에 지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鍾)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터져 오르는 불꽃을 향하여 환호하는 사람들의 손이 만들어내는 손의 물결을 보면서 허공에서 터지는 불꽃도 마다하고 한밤중 어둠도 마다하고 묵묵히 흐르는 바다의 물결을 보면서 그리고 멀리 이곳 오클랜드의 남과 북을 잇는 다리 하버 브리지를 보면서 나는 문득 묵은해에서 새해로 바뀌는 세월의 물결을 느꼈던 것인가? 그 옛날 학창 시절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맨 처음 암송했었던 ‘미라보 다리’라는 시의 구절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금 이곳 허공을 향하여 흔드는 사람들의 손이 안으로 방향을 바꾸어 서로의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 보고 ‘Happy New year’를 주고받는다면 우리의 시선(視線)이 새로워지고 흘러가는 세월도 새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시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기에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했을 것이다.


사랑은 흘러간다 이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얼마나 인생은 느리고

또 얼마나 희망은 강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鍾)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지금 새해를 맞는 이 바닷가에서 나는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져본다. 그것이 실패한 사랑이었든 쓰라린 과거였든 혹은 가슴 아픈 회한이었든 오늘 저 물결 따라 흘러가게 놓아주자. 놓아주기 힘든 것들을 미련 없이 놓아줄 때 우리의 인생은 고삐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느려지고 그때 여유를 가지고 앞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주어진 희망은 강렬해질 수 있다. 가버린 시간도 그 시간 속에 녹아있는 과거도 훌훌 놓아주자. 어차피 시간이란 원래 없었다. 아니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은 무한대의 영원한 시간이었다. 그 안엔 날도 달도 해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필멸(必滅)의 인간들이 스스로의 유한성을 깨닫고 생활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고 그것들이 지나가버린다고 한탄하고 탄식할 따름이다.


시인은 계속해서 노래했다.


날이 가고 주일(週日)이 지나가지만

가버린 시간도

옛 사랑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江)이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鍾)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실패한 사랑 가버린 연인에 대해서 단념하듯 탄식하고 있다. 젊은 시절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던 그때엔 그냥 이 구절을 멋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읊었었다.


그러나 오늘 이 바닷가에서 문득 내게 떠오른 이 시는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내게 부각되어 왔다. 시인이 탄식했던 가버린 시간 돌아오지 않는 옛 사랑은 이제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이제는 놓아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벌써 오늘 내 앞에 흐르는 저 검은 바다의 물결 속에 놓아주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내 가슴을 흔들어놓는 구절은 오히려 이 시의 후렴이었다.


밤이여 오라 종(鍾)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제야(除夜)의 이 저녁 밤은 이미 와있었고 종(l’heure: 프랑스어로 시간)은 하늘의 불꽃이 되어 이미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흐르는 밤바다의 물결 속에서 세월은 이미 흐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내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남아있는 이 시간이 2016년이든 아니면 2017년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 안에 남아 있는 시간은 내겐 영겁의 시간이고 의미 있는 시간이며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새해는 이미 다가온 새해는 그 안에 내가 있고 그래서 의미가 있고 귀하다. 이제 더 이상 지난해를 아쉬워하지 않으리라. 오히려 다가온 새해를 향해 외치리라. 종(鐘)이여 울려라 나는 남는다 라고. 그리고 이 새해를 의미 있고 귀하게 보내리라.


‘이제 그만 들어가요. 추워요,’라고 아내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이미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바닷가는 썰렁했다. ‘아 그래, 들어갑시다,’라고 말하며 나도 아내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셨어요?’하고 아내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생각은 무슨. 그냥 새해엔 어떻게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해 줄까 하는 궁리를 했지,’라고 내가 빙글거리며 말하자 ‘아이구, 거짓말도,’하면서 손을 들어 나를 때리는 시늉을 하는 아내의 모습은 결코 싫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때 아내의 큰 눈에서 작지만 그윽하게 반짝인 빛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불꽃보다 아름다운 빛이었다.


2017. 1. 4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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