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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삶은 죽음의 이면이다

by 석운 김동찬

삶은 무엇일까?


철이 들면서부터 언제나 내 머릿속을 감돌고 있던 가장 큰 의문은 ‘삶은 무엇일까’였다. 그리고 그 의문은 조금도 풀리지 않은 채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세상에 풀리기 힘든 의문이 꽤 많겠지만 대부분의 의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삶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은 내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고희(古稀)가 가까워 오던 어느 날 나는 그 의문을 풀리지 않은 채 내려놓기로 했다. 그때의 내 마음은 마치 영원히 미궁에 빠진 어떤 사건을 미제(未濟)로 처리하고 수사를 종결할 수밖에 없는 수사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감성(感性)이 이성(理性)을 앞지르던 젊은 시절엔 삶에 대해 낙관적 견해를 갖기보다는 오히려 비관적 견해를 갖기 쉬웠다. 꿈과 포부는 마냥 크기만 한데 현실이 받쳐주지를 못하기에 그 괴리의 한가운데에서 빠져들기 쉬운 생각이 비관적 혹은 염세주의적 인생관이었을 것이다.


삶은 비눗방울


쇼펜하우어의 ‘인생론(人生論)’이란 책을 읽었을 때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신조문화사(新潮文化社)에서 나온 하드 바운드의 이 책은 아마도 내가 구입한 최초의 철학책으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내 서가 한구석에 꽂혀있다. 왜 그 많은 철학자 중에 하필 쇼펜하우어의 책을 골랐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해 여름방학에 열심히 그리고 심각하게 읽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공감되는 구절들이 많아 줄을 쳐가며 읽었지만 그중에서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구절의 하나가 다음이다.


‘삶이란 마치 비눗방울을 내뿜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중에는 파열할 것을 빤히 알면서도 아이들은 열심히 될 수 있는 대로 큼직하게 오래가도록 하려고 애를 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무릎을 쳤다. 맞다. 삶을 산다는 행위는 비눗방울을 부는 것과 같다. 크든 작든 우리는 나름대로의 방울을 불어내려고 애를 쓴다. 자칫 과도한 욕심을 부리다가는 우리가 불던 거품은 방울도 못되고 터져서 땅 위에 떨어져 말라버리고 만다.


대학교 1학년, 입시지옥과 미성년의 제약에서 풀려나 맘껏 자유를 구가하며 부풀어 오르는 꿈꾸기에 바빠야 할 그때에 쇼펜하우어나 집어 들고 도서관에 틀어박혔던 나는 어쩌면 문제가 있는 청년이었다. 도서관 한구석에서 여름내 나는 조심스레 비눗방울을 불었지만 ‘삶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은 여전히 숙제로 남은 채 도서관을 나와야 했다. 삶이 무엇인지 몰라도 나는 삶 속에 있었고 시간은 그 무정한 손아귀로 나를 붙잡고 앞으로 끌었다. 해가 바뀌고 3월 새 학기가 되자 나는 지난 여름 도서관에서 풀지 못한 숙제를 풀기 위해 휴학계를 내고 학교 강의실을 떠났다.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세월에 떠밀려 학년만 올라간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삶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


하지만 1년간의 방황은 별 소득이 없었고 삶에 대한 의문은 더욱 깊어만 진 채 나는 학교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읽은 것은 다시 학교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어느 날 강의 시간에 그 유명한 맥베스의 독백을 읽으면서 나는 이번엔 가슴을 쳤다.


"우리의 모든 어제(지난날)는 바보들에게

죽음으로 가는 길을 비춰 주었을 뿐. 꺼져간다, 꺼져간다, 짧은 촛불이여!

삶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

뽐내며 걷고 안달하며 자기 시간을 보내다

사라지는 서툰 배우. 소음과 분노로 가득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백치의 이야기" (맥베스 5막 5장)


‘삶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Life’s but a walking shadow)’라는 구절이 아프도록 가슴에 와 닿았다. 삶은 실체가 아닌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그나마 우리의 삶을 존재하게 만드는 빛은 펄럭거리고 흔들거리며 꺼져가는 짧은 촛불이었다. 무대 위에서 걸어 다니는 배우는 자기의 삶을 살지 않는다. 각본에 주어진 타인의 삶을 산다. 그렇기에 맥베스는 아니 세익스피어는 삶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라고 했다.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주어진 삶을 어설프게 흉내 내다 사라지는 서툰 배우는 촛불에 흔들리는 그림자일 따름이었다.


이 독백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짧은 나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학생이 된 그때까지의 나의 삶이 그림자였고 서툰 배우는 바로 나였다. 집에서는 착한 아들이 되기 위하여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기 위하여 밖에 나와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나는 살아왔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각본에 맞추어 나는 그때까지 아주 서툴면서도 그럴듯한 연기를 해온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나의 삶이 아니었다. 그때까지의 나의 삶은 맥베스의 독백처럼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가깝건 멀건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사실은 나의 그림자를 만드는 촛불이었다고 깨달아지자 나는 정신이 나가는 듯한 혼란을 느꼈다. 앞에서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도 열심히 경청하는 학우들도 내 시야에서 희미하게 번져나갔다. 얼마 후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강의는 어느 사이에 끝났고 모두가 떠나버린 빈 강의실에서 나는 혼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의문은 풀지 못했지만


‘삶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은 풀지 못했지만 나는 삶 속에 있었고 세월은 지나갔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신분도 못 됐지만 취직이나 결혼 또는 장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젊은 시절 내내 나는 이 의문을 입에 물고 살았다. 하지만 세월은 내 삶의 고뇌와 상관없이 나를 태우고 흘러갔고 나는 그 흐름 속에서 학교도 졸업하고 취직도 하고 또 결혼도 했다. 삶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래도 살아야만 하는 삶은 그 자체가 모순인 무엇이었다. 삶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오히려 아주 바쁜 삶을 선택하였다. 삶 속으로 빠져들면 오히려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나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바쁜 삶 속에서도 틈틈이 책을 읽었고 특히 삶에 관한 책이 눈에 뜨이면 부지런히 읽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그런 모든 책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삶에 관한 책 대부분 아니 전부가 삶 자체가 아니라 삶의 길(道), 또는 삶의 방법에 대해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삶 자체였지 결코 삶의 길이나 방법이 아니었다. 문학도 철학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하려는 시도는 했어도 삶 자체를 설명하지 못했다.


삶은 계란


고 김수환 추기경이 ‘삶은 무엇일까’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가 홍익회 판매원이 ‘삶은 계란 있어요,’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삶은 계란’이라는 내용으로 강의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 나이가 고희가 되기 얼마 전이었다. 계란이 스스로 껍질을 깨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껍질을 깨면 계란 프라이가 된다는 내용의 강의였다고 했다. 누구든 참된 삶을 살려면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일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 스스로 고독한 싸움을 통해 부화해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자신의 껍질 속에 갇히면 삶은 부화할 수 없다. 그 안에 계속 웅크리고 있다가는 누군가가 대신 껍질을 깰 때엔 계란프라이와 같은 ‘죽은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이 강의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김 추기경의 번뜩이는 해학에 박수를 보냈지만 마음 한구석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의미 있는 좋은 말씀이었지만 이 또한 삶 자체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관한 방법론적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김 추기경처럼 종교적 깨달음이 높은 분도 결국 ‘삶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에 정면승부는 피하시고 ‘삶은 계란’이라는 해학으로 임기응변을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나는 ‘삶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내려놓기로 했다. 고희가 가까워져 오자 철이 들었나 보다.


삶은 알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삶은 알아야 할 대상이 아니고 살아야 할 대상이었다. 태어나는 순간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우리는 고고한 울음소리와 더불어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 삶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그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 살까 말까를 선택할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장 지오노(Jean Giono, 1895~1970)가 그의 소설 ‘둥근 하룻날’에서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그냥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다. 산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매일매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참다운 목표를 시시각각으로 달성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버렸다.’고 말한 것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픈 진실이었다.


삶이 길다고 생각할 때 삶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이 생각될 때 사람들은 삶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땐 심장에 뜨거운 피가 흘러넘치고 힘이 남아돌아 무엇에라도 도전해 보고 싶을 때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세월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어느덧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지고 겨울이 춥게만 느껴질 때 삶이 무엇인가 알고 싶어 방황하던 젊은이는 이제 삶이 무엇이든 그 삶의 꼬리라도 붙잡고 싶어 안간힘을 쓴다. 나이가 든 것이다, 그리고 늙어가는 것이다. 그땐 삶이 날계란이어도 상관없고 삶은 계란이어도 상관없다. 비눗방울이어도 걸어 다니는 그림자여도 상관없다. 삶은 이제 그냥 계속만 되어주면 좋은 것으로 바뀌었다.


늙는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누구도 늙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따라서 늙는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것이 될 수 있다. 젊었을 때 우리는 육신에 매여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육신에서 벗어나 육신의 정욕과 헛된 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어졌음을 느끼는 어느 순간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계속해서 그때까지 붙들고 온 것을 꼭 잡고 놓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모두 훌훌 놓아주고 남은 삶의 나날을 숫자로 세지 말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것인가를. 이방인의 작가 카뮈가 즐겨 쓰는 단어 중에 CONSOMMATION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완성과 소모라는 이중의 뜻을 지닌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또 소모되는 것이다. 소모되는 것을 아쉬워 말자. 대신 완성의 길을 간다는 것을 기뻐하자. 그때 우리의 늙음은 노쇠가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과정이 된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서정주의 시(詩) ‘국화 옆에서’는 늙음의 아름다움을 가을의 꽃 국화 한 송이로 축약시켰다. 그 꽃은 누님이어야만 했다. 누이 동생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곱게 늙어가는 누님이어야만 했다. 거울 앞에 선 누님은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모습 너머 거울 속으로 난 새로운 길을 보며 꽃으로 승화한다. 하지만 꽃은 결국 시든다. 그러나 꽃이 아름다운 것은 활짝 핌의 완성 뒤에 시듦이 있기 때문이다. 카뮈가 즐겨 쓴 완성과 소모라는 이중의 뜻을 가진 CONSOMMATION이라는 말이 역시 꽃과 맞아떨어진다. 우리의 늙음도 완성되며 소모될 때 아름다움으로 승화한다.


삶은 죽음의 이면이다


젊었을 때는 삶과 죽음이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은 점차 삶과 가까워진다 어느 순간 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 뒷면처럼 하나가 된다.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한 처음에는 죽음은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은 오히려 삶의 일부가 된다. 삶이 갖고 있는 최고의 문제는 그 유한성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유한의 길이를 조금 늘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무한이 될 수는 없다. 어떤 형태로든 이 땅에서의 삶은 끝이 있고 그렇게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가? 다행히 많은 사람이 죽음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이 이 땅에서의 삶의 끝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끝은 이 땅에서의 삶과는 다른 삶으로 넘어가기 위한 시작이라는 이야기이다. 아무도 죽음 너머의 세계를 갔다 온 사람이 없기에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죽음은 오히려 담담한 마음으로 맞을 수 있는 미래가 된다. 그때 죽음은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우리의 삶은 너무도 허무하다. 죽음이 끝이라면 우리 모두는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죽기 위해 사는 것이 된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수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좋은 자녀를 갖기 위해 등등 넘어야 할 관문이 너무도 많다. 그럭저럭 그 관문들을 넘고 나서 좀 쉬었으면 싶은 어느 순간 죽음은 이미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만일 그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우리의 삶은 마치 준비하다 막도 못 올려보고 끝난 연극에 불과하다.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die Welt)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eine Welt)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Gott)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ΑΒΡΑΞΑΣ)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구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알을 깨고 나오려고 끈적거리는 알 속에서 투쟁하는 새는(사실은 아직 새가 못되었지만) 삶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들 인간이다. 그 알을 헤세는 정관사의 세계(die Welt) 즉 우리 모두의 세계로 표현했다. 깨어져야 하는 세계는 우리 각자의 세계 즉 하나의 세계(eine Welt)로 우리 개개인의 삶이다. 그 세계를 깨뜨리고 나왔을 때 새는 비로소 새가 되어 신(Gott)에게로 날아간다. 알 속에서 꿈틀거리던 새가 나는 새가 되기 위해서는 알 속의 삶을 끝내고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새는 알 속의 삶이 끝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깨어버리고 통과해야 할 관문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렇기에 알을 깨고 나와 신에게로 날아갈 수 있다. 우리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세계(eine Welt)가 깨지는 것을 죽음이라 생각하지 말고 신에게로 날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관문이라고 생각할 때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이 되고 삶과 죽음은 하나가 된다.


헤세는 신의 이름이 아브락사스(ΑΒΡΑΞΑΣ)라고 했지만 그것은 헤세의 선택이지 우리의 선택일 필요는 없다. 아브락사스(ΑΒΡΑΞΑΣ)는 그리스어로 된 주문(呪文)의 일종이다. 그리스어는 각각의 알파벳이 숫자를 나타내는데 아브락사스(ΑΒΡΑΞΑΣ)의 숫자를 합하면 365가 되기에 수비학(數秘學) 상으로 신비하게 느껴졌기에 헤세가 사용한 것 같은데 이는 헤세의 지적 유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신은 그냥 대문자의 신(Gott)이면 될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끈적거리는 알 속에서 꿈틀거리는 새의 투쟁과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아직 새가 되지 못한 새처럼 불완전한 사람일 수 있다. 알을 깨고 나갔을 때 새는 비로소 온전한 새가 되어 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여 새 삶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어 신에게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이 땅에서의 삶을 열심히 살자. 때가 되어 죽음이란 관문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관문을 통과하자.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단계이니 날개를 마음껏 펴고 우리가 선택한 신에게로 힘껏 날아가자.


2021.6월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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