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나들이

캠브리지(Cambridge) 오가는 길

by 석운 김동찬

가을 나들이

아내와 같이 캠브리지(Cambridge, 뉴질랜드 북섬 중부에 위치한 영국풍의 도시)에 갔습니다. 캠브리지의 단풍이 아름답다고 해서 깊어가는 가을을 만나려고 일부러 차를 몰고 갔습니다. 결코 급히 가지 않았습니다. 가다가 공원 표시가 있으면 길을 꺾어 들어가서 천천히 돌아보고 나왔습니다. 다시 나와 차를 몰고 가다 길가에 그럴듯한 카페가 있으면 들려서 맛있게 커피를 마시며 아직도 맑기만 한 아내의 커다란 두 눈에 비친 내 얼굴을 드려다 보기도 하며 천천히 갔습니다. 고맙게도 아내의 두 눈에 비친 내 얼굴은 시종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다가 처음 들린 곳은 보타닉 가든(Botanic Garden, 시에서 운영하는 커다란 식물원)입니다. 시내에서 불과 20분 거리에 있는 보타닉 가든은 언제 들려도 다정하게 우리를 맞아주는 곳입니다. 약 삼십 분 동안 돌아보며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왔습니다. 모처럼의 가을 나들이라 그런지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시심(詩心)이 동해 떠오르는 대로 메모를 해봤습니다.

선인장


하늘을 향해 온 몸을 활짝 열었구나

선인장아

은혜를 갈구하는 겸허한 네 자세

뿌리는 땅에 박혔어도

온몸은 하늘을 향하고 있구나!


아스파라거스


그렇게 많은 팔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였나

오 안타까운 네 모습

그렇게 얼굴을 가려도

가을은 네 발끝을 타고 오른다

차라리 팔을 벌려 가을을 맞으라


연못

하늘엔 해가 없어도

연못엔 빛이 있었다.

빛을 향해 헤엄치는 오리들에겐

물에 비치는 빛이 태양이다

우리들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태양 빛은 놓치고 땅에 비치는 빛만 쫓아다니는……


캠브리지에 도착했습니다. 해밀튼과 로토루아는 자주 가면서 그 중간에 있는 캠브리지는 오히려 소홀히 했기에 캠브리지의 작은 호수를 금년에야 처음으로 들렸습니다. 해밀튼 호수보다 훨씬 작은, 그나마 너무 부끄러움을 심히 타 지면에서 푹 꺼진 저지대에 숨어있기에 여간해서 눈에 뜨이지 않는 캠브리지의 보석같은 호수 테 코우투(Te Koutu Lake)입니다. 너무 크지 않아 오히려 다정스럽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호수 주변으론 모든 나무의 나뭇잎마다 가을 색깔을 입었습니다. 제각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면서도 결코 요란스럽지 않은 뉴질랜드의 단풍이 호수를 한 바퀴 돌아 난 호반 길을 시골 색시처럼 그윽하게 치장했습니다.


단풍나무 사잇길


누굴까

이 가을에 단풍나무 사잇길을 혼자 걷는 저 여인은?

가을 색깔에 취해 걷는 발길 가볍지만

배낭 속에 들어있을 지나온 삶의 무게

알고 있을까

뒤에서 지켜보는 누군가의 그윽한 눈길


빈 의자


떨어져 쌓이는 나뭇잎 한가운데

호수를 향한 빈 의자 하나

단풍도 가을바람도 마다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빈 자세

허허로이 가을을 보내 놓고

계절의 추이를 담담히 기다리는 자세

너무도 의연한 그 자세에

차마 앉을 수가 없다

풍경화


어쩌란 말이냐

가을은 붓 한 자루 없이

절묘한

점묘(點描)의 풍경화를 그려내는데

나는 카메라 붙들고도

주어진 풍경마저 담아내지 못하니.


가을 호수


가을 호수엔 움직임이 없다

시간이 멈춘 듯

떠있는 오리들도

담겨있는 그림자들도 움직임이 없다

아 가을아

이 호수에서처럼 멈추어 줄 수 있겠니

너를 붙안고 밤이 이슥하도록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가을 나무

가을 나무는 잎을 떨칠 줄 알고

가을 잎은 나무를 떠날 줄 안다

떨칠 줄 아는 나무와 떠날 줄 아는 잎이 있기에

가을은 그렇게 아름다워진다

가을이 되면

우리도 떨치고 떠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호숫가의 가을 풍경을 만끽하고 난 뒤 우리 부부는 캠브리지를 떠났습니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캠브리지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다시 음미하면서 천천히 차를 몰았습니다. 돌아오는 차 속엔 가을 냄새가 가득했고 오늘 나들이가 즐겁기만 했던 아내의 기쁜 미소가 싱그러웠습니다. 저물어 가는 저녁 햇살이 돌아오는 내내 우리의 앞길을 비추어주었습니다. 오클랜드가 가까워졌을 때 오타후후의 월남 국숫집에 들러 맛있게 국수 한 그릇씩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 동네에 들어섰을 때엔 어둠이 제법 짙어졌습니다. 집 앞에 다 왔을 때 아내가 시내 쪽을 가리키며 "저기 좀 보세요,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했습니다. 차창 밖의 바다 건너 시내의 야경이 눈을 찌르며 다가왔습니다. 봄을 찾아 하루 종일 다니다 집에 돌아와 비로소 봄을 만났다는 어느 옛 시인의 시 구절이 문득 머리를 스쳤습니다. 아름다운 가을 저녁 풍경은 바로 우리 집 앞에도 있었습니다.


집 앞 야경

잠깐 차를 세우고 바라보다 카메라를 꺼내 한 컷 찍었습니다. 무심코 찍은 사진이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오히려 재미있게 나왔기에 끝으로 여기 올려봅니다. 이렇게 우리 부부의 가을 나들이 하루가 끝났습니다.



2015.5.20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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