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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Jun 03. 2023

45년 만의 해후

내 친구 김 목사

2008년, 만 육십 세가 되던 해

2008년이 지난 지 벌써 7년이 되었다. 지금 와서 새삼 2008년을 떠올리는 것은 그 해가 무슨 특별한 해였기 때문은 아니고 내가 만 육십 세가 되던 그해에 그걸 빌미 삼아 아주 많은 여행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2008년 2월엔 큰 딸 작은 딸이 맞춰놓은 환갑여행 스케줄에 따라 세 가족이 모두 호주 포트 더글러스(Port Douglas)를 다녀왔고 5월엔 한국에 있는 가장 친한 동갑내기 친구 전박사가 부인과 함께 뉴질랜드로 환갑여행을 왔기에 같이 돌아다니기 바빴다. 그리고 9월이 되자 전부터 계획해왔던 장기 해외여행을 떠났다. 무엇보다도 그 해엔 가을철을 한국에서 보내며 한국의 가을을 만끽하고 싶었고 또 나간 김에 미국에도 들려 몇 년 동안 뵙지 못했던 형님도 만나면서 뉴욕의 맨해튼 거리도 거닐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떠난 2008년 가을 여행이었다. 여행을 떠나면서 마음속에 살며시 접어 놓은 계획 하나는 시간만 허락된다면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옛 친구 김 목사를 만나는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김 목사이지만 그 얼마 전부터 셰어 플라자(Share Plaza: 믿음의 친구들이 만들어 놓은 인터넷 광장)를 통하여 그의 근황을 접하고 또 그가 올린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들을 읽으면서부터 어릴 적 친구, 그러나 이제는 참으로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뚝 선 그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커져서 한 번 꼭 만나보고 싶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초가을 고국의 가을을 마음껏 누린 뒤 예정대로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 도착해 형님 댁에서 며칠을 지낸 뒤 토론토에 있는 김 목사의 집으로 전화를 했을 때 김 목사는 없었고 대신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내 이름을 말하고 내가 뉴저지에서 전화드린다고 말하자 김 목사 부인은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평생을 가까이 지낸 친구처럼 밝은 목소리로, “오셔야지요 장로님, 저희가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와 전화를 하면서 나는 미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변경해서라도 이 사랑스러운 부부를 만나기 위하여 토론토로 가야 하겠다고 마음을 결정하였다. 


전화가 끝난 뒤 김 목사의 이야기를 형님께 간략히 설명을 해드렸다. 내 중학교 동창이라는 것, 캐나다 토론토에서 캐나다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 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못 만났지만 셰어 플라자를 통해 글을 주고받으며 하마터면 과거 속으로 묻혀버릴 뻔했던 우정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어떻게 토론토를 가는 것이 가장 좋을지를 의논드리자 형님은 한마디로, “그런 분이라면 나도 뵙고 싶은데 같이 가면 안 될까? 같이 가도 좋다면 내 차로 모시지,” 하였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 아마도 불감청(不敢請)이지 고소원(固所願)이란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형님께 고맙습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였고 더더구나 마침 집에 있던 큰 조카가 아버지 혼자 운전하는 것이 힘들다고 동행하기로 하여 우리 내외와 형님 그리고 조카까지 4명이 왕복 장장 20시간이 넘는 1박 2일의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뉴저지를 출발하여 허드슨 강을 건너고 펜실베이니아 주의 변두리를 가로질러 뉴욕 주를 타고 올라가며 캐나다를 향하는 10월 중순의 드라이브 길은 아름답기만 했다. 내가 살고 있는 뉴질랜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고 큰 미국이라는 나라를 실감하며 달리는 고속도로의 양쪽에는 한참 무르익기 시작하는 단풍나무들이 사랑하는 친구를 만나러 먼 길을 달려가는 우리들을 반겨주듯 가을바람 속에서 색깔 잔치를 열어주었다.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의 크고 오묘하신 창조 역사를 칭송할 때 조카가 소프라노 신영옥 씨의 찬양 CD를 틀었다. 우리 모두는 눈으로는 창 밖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귀로는 신영옥 씨의 아름다운 찬양을 들으며 기쁘고 즐거운 여행을 계속했다.


저녁 6시쯤 캐나다 국경을 지나 해 질 무렵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람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감탄할 뿐이었다. 문득 로마서 1장의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찌니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눈을 열어 제대로 보면 온통 천지사방에 드러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손길인데 어찌 아직도 완강히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을까 생각하며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찌니라’를 입 속으로 되뇌고 있는데 형님이 재미있는 농담을 알려 주셔 다 같이 파안대소하며 폭포를 뒤로하고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나이아가라’의 본 이름이 ‘나이야 가라’ 이기에 이곳에 왔다가 나이를 놓고 가면 누구나 원하는 만큼 젊어진다는 농담이었다. 우리 부부는 욕심부리지 않고 15년의 나이만 ‘나이야 가라’ 폭포에 두고 떠났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서 우리 부부를 만나는 사람들은 15년 젊어진 우리 부부를 아마도 몰라볼 것이었다.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삶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집에 오셔서 저녁 드세요,”라고 김 목사 부인이 며칠 전 전화로 내게 부탁했지만 4명이 저녁 늦게 들어가며 그렇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날 아침에 떠나면서 전화로 “우리는 저녁을 먹고 들어갈 터이니 준비하지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김 목사 집 근처 The Bay라는 캐나다의 쇼핑몰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김 목사 댁을 찾아 들어선 것은 이미 저녁 9시가 다되어서였다. 차를 세우고 차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대문이 활짝 열리며 집 밖으로 튀어나온 김 목사와 서로 손을 마주 잡은 우리의 감회는 참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45년 만의 만남.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크고 뚜렷한 믿음의 인도를 통한 만남이었다. “나를 기억하겠나?”라고 내가 말문을 트자 “기억하고 말고,”라고 대답하며 잔잔한 미소로 잡은 손에 힘을 주는 그에게 이끌려 우리 모두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서 전화로만 만났던 김 목사 부인의 해맑은 얼굴과 엄마 뒤에 숨어 있는 늦둥이 막내아들 늘빛(Noel Bright)을 만났다.


“시장하시지요? 저녁 잡수세요. 저희도 아직 안 먹고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김 목사 부인의 말에 “아니 저희들 먹고 들어온다고 말씀드렸는데요,”라고 내가 말하자, “여하튼 또 잡수셔야 해요. 우린 준비해 놓았는데요,”라고 말하며 식탁에 앉히고는 손수 준비한 캐나다 특산 ‘연어 덮밥’을 내놓기에 우리 모두는 저녁을 한번 더 먹었다. 비록 배는 불렀지만 다시 한번 맛있게 먹으면서 오랜 세월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며 이를 실천하는 이 아름다운 부부의 따뜻한 사랑과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도전하는 삶

맛있는 식사가 끝난 뒤 김 목사와 나는 지나간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여러 친구들의 소식도 주고받고 또 학교 졸업 후의 우리의 지나간 이야기도 주고받았지만 나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김 목사가 어떻게 머나먼 이국 땅 캐나다에서 우리 교민들도 아닌 캐나다 현지인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게 되었나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곳 캐나다에서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소명감을 갖고 기도로 어려움을 이겨낸 김 목사의 지나간 이야기는 현실에 쉽게 안주하려고만 드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 큰 도전이 될 것으로 믿는다. 토론토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끝내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한국의 큰 교회에서 아주 좋은 조건으로 김 목사를 초빙하였고 만일 그 초빙에 응하였으면 훨씬 편하게 그리고 안락한 생활터전 위에서 쉬운 길을 갈 수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하나님이 주신 길을 택하여 캐나다의 현지 교회에서의 목회자의 길을 택한 것은 고생을 자초한 것이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기도와 노력과 지혜로 뛰어넘고 이제는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청지기가 된 김 목사에게 친구이지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또한 많은 캐나다 현지 목사들을 마다하고 말의 억양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피부 색깔도 다른 동양의 작은 남자를 자기들 교회의 담임목사로 받아들여 같이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나간 캐나다 성도들의 겸허한 자세에도 마음속으로부터 박수를 보낸다. 그 교회에 부임하기 직전 김 목사가 그들 캐나다 성도들에게 왜 자기를 택했느냐고 묻자, “We need a challenge(우리에게는 도전이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또 한 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 도전을 필요로 하는 캐나다 성도들, 그 도전을 기꺼이 받아 드린 김 목사, 이 양쪽이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루었을 때 오늘과 같은 아름다운 결실이 이루어졌다고 나는 생각했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대해주는 김 목사 내외의 정성 어린 친절과 또한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배어 나오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에 흠뻑 취해버렸다.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고 헤어지는 우리들 손에 김 목사 내외는 또 이것저것을 정표로 쥐어주었다.

떠나기 전 김 목사 집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다시 미국 뉴저지로 돌아오는 10시간의 자동차 여행 내내 나는 사랑하는 친구 김 목사 내외에게서 풍겨 나오든 그리스도의 향기를 기억하며 머릿속에서 성경구절을 되뇌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린도후서 2장 14-15)’. 


앞으로 살아가면서 나도 김 목사 내외처럼 구원받은 자들이나 앞으로 구원받을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삶을 살기를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캐나다에서 돌아온 뒤 나는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어 하나님께 편지를 썼다.


하나님 전 상서


그 아득한 옛날 

아담을 지으시고 

혼자 있는 아담이 마냥 안쓰러워

돕는 배필을 지어주셨던 

사랑의 하나님 


그리고 육십 년 전

저를 지으시고

그 모자람이 마냥 안쓰러워

아름다운 친구들을 보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모자라고 미욱해도

저도 누군가에게 

보내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제게 보내준 친구들 마냥

저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2008.10.8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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