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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Jun 03. 2023

한국의 슈바이처 자랑스러운 내 친구

친구 찾아가는 길

친구 찾아가는 길


2008년 10월 미국에 갔을 때에는 10시간 넘어 자동차를 몰고 캐나다 토론토에 가서 그곳 캐나다 사람들을 섬기며 목회를 하고 있는 친구 김 목사를 만났다. 


지구 어디에라도 만나고 싶은 친구가 있고 또 그 친구도 나를 보기 원한다면 달려가든 날아가든 어디라도 가서 만나고 싶은 것이 요즈음의 심정이다. 참으로 훌륭한 나의 친구들이 지구 곳곳에서 꽃보다 아름답고 보석보다 귀한 삶을 살고 있는데 왜 그동안 제대로 만나보지 못하고 환갑이 지난 이제야 그 소중함을 깨달았는지 모르겠다. 비록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가까이하며 그들의 삶을 배우고 또 할 수 있다면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짧고 아쉬운 만남이었지만 토론토에서의 김 목사 내외와의 45년 만의 재회의 기쁜 감회를 간직한 채 미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살고 있는 큰 딸 집에 여장을 풀자마자 동해시에 있는 친구 최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최박사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 서 사모아에서 지난 14년 동안 부인과 같이 의료 선교로 섬주민들을 섬기다가 금년 초 아들이 있는 뉴질랜드로 돌아와 몇 달 동안의 휴식을 끝낸 뒤 한국으로 돌아와 지난 9월에 동해시의 동인병원에서 집무를 시작한 내 중학 동창이다. 


지난 5월 뉴질랜드를 방문한 친구 전박사가 소식을 전해 주어 최박사의 소식을 처음 들었다. 전박사나 최박사나 같이 의료계에 종사하고 있기에 나는 모르는 최박사의 근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정 때문에 최박사를 만나지 못하고 전박사는 귀국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서재 깊숙이 박혀 있던 중학교 앨범을 꺼내서 최박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5월의 어느 저녁 그의 집을 찾았다. 중학교 졸업 한 뒤 첫 만남이니 40여 년 만의 해후였다.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5분이 안돼서 우리는 옛 동심을 회복하고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한국의 슈바이처

잠시 뒤 그의 부인이 보여주는 DVD(KBS TV가 사모아로 와서 취재 제작한 ‘한국의 슈바이처’)를 통해 지난 14년간 그가 살았던 서 사모아에서의 삶을 보며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봉사와 섬김의 삶이었다. DVD가 보여 주는 아름다운 섬 풍경보다 한결 더 아름다운 최박사 내외의 겸허한 삶의 모습에 나는 경외감에 가까운 감탄만을 계속하였다. 의사라면 아직도 세계 어디에서나, 그리고 특히 한국에서는, 안정된 직장과 생활이 보장되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작은 섬 사모아에 가서 봉사할 생각을 했느냐고 내가 궁금해서 묻자 최박사는 중학교 2학년 때 슈바이처의 전기를 읽고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슈바이처와 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그 꿈을 이루고 성취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이제껏 살아왔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내 친구 최박사의 모습을 나는 어디에선가 보았거나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때에 그런 결심을 한 뒤 최박사는 슈바이처와 같이 의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그 결과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이라면 우리 모두는 아직도 코흘리개 철부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 친구는 그때 이미 뜻을 결정하고 그 뒤로는 뒤도 옆도 보지 않고 오직 그 길만을 달려왔고 의사가 된 뒤에도 결혼을 한 뒤에도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슈바이처와 같은 봉사의 삶을 살 곳을 찾아서 서 사모아로 갔다. 그보다 앞서 사모아에 왔었던 다른 의사들은 더위와 풍토병으로 일주일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최박사는 그 어렵고 힘든 열대의 땅에서 원주민들을 형제처럼 가족처럼 14년간 섬기다가 기한이 차 이제는 잠깐 아들이 있는 뉴질랜드 땅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무엇을 할 것인가? 좀 쉬어야지,”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씩 웃으면서 “아직 쉴 나이는 아니고 또 어딘가에 가서 봉사할 곳을 찾아야지,”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표정에서 나는 무언가 성스러움을 느꼈다.


그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맞아. 중학교 때 읽었던 국어 책에서인가 나다니엘 호오도온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이 있었는데 그 큰 바위 얼굴이 바로 저 친구의 얼굴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내도 빙긋한 미소로 동의를 해주었다.


꿈을 먹고사는 환갑 청년

그 뒤 그가 한국으로 가기 전까지 우리들은 자주 만났다. 갈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그를 포함한 몇몇 부부가 우리 집에서 모였었다. 첫 모임에서 공부 시작하기 전에 각자 자기소개를 했었는데 최박사 차례가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최ㅇㅇ입니다. 달리 드릴 말씀은 없고 그냥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꿈을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요즈음은 북한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꿈을 꾸며 그 꿈을 먹고 삽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이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환갑을 지낸 나이에 꿈을 먹고 산다는 말은 정말 얼마나 멋진 말인가? 보통 사람들이라면 가졌던 꿈도 모두 포기할 나이에 다시 꿈을 꾸며 그 꿈을 먹고 산다는 이 친구야말로 참 믿음의 친구라고 생각이 되었기에 나는 그의 앞에서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이 친구의 꿈에 동참하자. 여럿이 같이 한 꿈을 꾸고 먹으면 이루기가 한결 쉽지 아니한가?


그리고 한두 달이 지난 뒤 잠깐 한국에 다녀와야겠다고 떠난 최박사는 다시 뉴질랜드에 돌아오지 않고 한국의 동해시에 눌러앉았다. 욕심이 없는 사람들은 몸이 그렇게 가벼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짐도 안 갖고 한국으로 떠났던 그가 그렇게 한국에 자리 잡으리라고는 예상을 못했지만 그는 그렇게 했다. 서울에 있는 병원들에서의 좋은 대우는 모두 마다하고 한적한 시골 동해시로 내려간 것은 그 나름대로의 행보의 수순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북한에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선 한국에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더욱이 그 꿈이 믿음 위에 기초한 꿈이라면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시간문제일 것이다.


다시 한국에서

지난 9월 말 뉴질랜드를 떠나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친구 최박사는 만나야겠다고 작정을 했었다. 그렇기에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그에게 전화를 하고 바로 그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한국에서 운전을 안 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이번엔 결심을 하고 국제면허까지 챙겨 왔었다. 다음 날 아침 사위의 차를 빌려서 아내와 더불어 동해시를 향해 떠났다. 내비게이터란 편리한 존재가 있었기에 겁 없이 10년 만에 한국에서 운전대를 잡은 것이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차가 좌측통행이기에 운전대가 반대 편에 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무척 불편하더니 곧 익숙해져서 아주 상쾌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었다. 오랜만에 고국의 고속도로를 직접 차를 몰며 달리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고국이란 편안하고 다정한 어머니의 품과 같아서 아무리 오랜만에 돌아와도 늘 넉넉한 품으로 나를 맞아 주는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항시 그림자 같이 내 옆을 지켜 주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여행은 가슴 뿌듯하게 행복을 느끼게 해 주었다. 가면서 휴게소에 들러 옛 생각을 하며 가락국수도 사 먹어 보면서 천천히 강릉에 들러 참소리 박물관과 오죽헌 구경도 한 뒤에 최박사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동해시에 들어섰다. 꽃집에 들러 최박사에게 줄 선인장 화분을 하나 사 들고 그의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6시경이었다. 


우리의 도착을 알고 뛰어 내려온 최박사의 반가운 손을 붙잡고 짐을 챙겨 그의 아파트로 올라갔다. 병원에서 제공한 그의 아파트는 방 세 개짜리로 꽤 널찍하고 전망이 좋았으나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앉은뱅이 식탁 하나뿐으로 그 흔한 텔레비전도 없었다. 어디서 빌려 왔는지 우리 부부를 위해 안방에다 이불과 요를 정갈하게 깔아 놓았다. “TV가 없으니 책 보고 기도할 시간이 더 많아져 불편이 없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잠시 후에 저녁을 먹으러 같이 밖으로 나왔다. 최박사가 병원 직원들에게 물었더니 동해시 선착장의 맨 끝에 있는 횟집이 좋다고 했다기에 천천히 차를 몰고 찾아갔더니 마음씨 좋게 생긴 주인장이 나와 맞아준다. 최박사가 자기소개를 하고 병원 직원들 소개로 왔다고 하니 어찌나 대접이 좋던지 6만 원짜리 모둠회를 하나 시켰는데 셋이서 먹다 먹다 남아 결국 매운탕 거리는 싸가지고 왔다. 식당에서 나와 잠깐 선착장을 따라 걸었는데 방파제 위로 마침 보름달이 둥근 얼굴의 착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횟집 앞에서 최박사와 같이


환자가 가족보다 중요한 의사

다시 아파트로 돌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베란다에 자전거가 타기 운동기구가 하나 보였다. 누군가 버린 것을 주어서 갖다 놓고 저녁때 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전거 옆의 유리창에 종이가 두어 장 붙어 있어 무엇인가 했더니 자전거를 타면서 성경을 외우기 위해 성경 구절을 써서 붙여 놓은 것이었다. 역시 최박사다운 발상이었다. 아파트 거실 TV가 있을 자리에는 TV는 없고 대신 최박사가 손수 그린 예수님의 그림이 있었다(최박사의 그림 솜씨는 아마추어의 경지를 넘는다). 아내가 사 갖고 간 선인장을 예수님 그림 옆에 놓자 무언가 이야기가 되는 듯하였다. 그것을 배경으로 최박사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나는 동해시의 이 작은 아파트가 나중에 최박사의 꿈이 이루어지는 산실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운전을 하고 와선지 졸음이 쏟아져 아쉽게도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 8시경 최박사는 병원으로 우리는 서울로 떠나야만 했다. 아쉬운 만남이었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이었지만 다음번에는 와서 며칠을 지내기로 약속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병원으로 향하여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저이에게는 환자들이 나보다도 더 중해요,’라고 말하던 최박사 부인의 말이 떠올랐다. 참 훌륭한 친구다. 그리고 그의 가슴속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있다. 그의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며 나와 아내는 차를 서울 쪽으로 몰았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사랑하는 친구도 만나고 또 옛 추억도 곳곳에서 만나는 뜻깊은 여행이었다.


친구 찾아가는 길


아무리 멀어도

친구 찾아가는 길은 정겨운 길

내 친구 내 마음 알고

가는 길 길목마다 얼굴 내민다


가는 길 내내 

맘 속에선 벌써 만난 내 친구

거기 친구가 있기에

낯선 곳도 정겨운 곳이 되었고

거기 친구가 살기에

낯선 사람들도 정겨운 사람들이 되었다 


아무리 멀어도

친구 찾아가는 길은 흥겨운 길

내 친구 내 마음 알고 

가는 길 길목마다 손을 내민다


가는 길 내내 

맘 속에선 벌써 만난 내 친구

길목마다 만나서 눈 마주치고

길목마다 만나서 손 마주 잡고

아아 친구 찾아가는 길은

아무리 멀어도 정겹고 흥겨운 길


2008.10.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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