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말해 주는 교훈
뉴 플리머스(New Plymouth)에 갔습니다. 뉴질랜드 북섬 서해안에 위치한 정원의 도시 뉴 플리머스는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곳입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올해엔 정원 축제(Garden festival)의 시기는 놓쳤지만 수국(水菊)을 좋아하는 아내가 철쭉(Rhododendron) 철은 놓쳤지만 수국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기에 가까이 지내는 선배 부부와 같이 차를 몰고 내려갔습니다.
뉴 플리머스에 도착하기 한 시간쯤 전에 세 자매 바위(Three Sisters Rock) 해변이 있습니다. 마침 물때가 맞기에 차를 세우고 해변을 걸어 들어갔습니다. 세 자매 해변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한참을 걷다 왼쪽 모퉁이를 돌자 세 자매는 기다렸다는 듯 우리 부부를 맞아주었습니다. 자연의 신비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오랜 세월 오직 물과 바람의 힘으로 해변에 세 자매 바위를 형성해 놓았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자연의 창조물을 보며 한참이나 감탄하다가 우리 부부는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세 자매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다 올 때는 보지 못했던 기이하게 생긴 바다 동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 자매를 만나려고 부지런히 앞만 보고 가다가 미처 보지 못했던 바닷가 암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코끼리의 모습을 닮기도 한 모습에 감탄해 서 있는 우리 부부를 한 차례의 부드러운 바람이 쓰다듬듯 보듬고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스떼판느 말라르메(Staphane Mallarme: 프랑스의 시인)의 시 ‘바다의 미풍(微風)의 첫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
달아나리! 저곳으로 달아나리.’
결코 말라르메가 모든 책을 다 읽었기에 이렇게 외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읽어도 읽어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이었기에 육체는 슬프다고 부르짖으며 저곳 미지의 피안으로 달아나자고 우리에게 외쳤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 바다 기암(奇巖) 앞에서 나도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책을 놓자고. 그리고 책 너머의 어딘가로 달아날 때가 되었다고.
나이가 들어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아직도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지식욕 때문이라는 생각이 나를 질책했습니다. 모든 가진 것을 내려놓아 심신을 가볍게 해야 할 나이인데도 책만은 쉽게 놓지 못한 것은 가장 큰 미련이고 욕심이었습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제 대로 잘 소화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도 아울러 들었습니다.
그 옛날 성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4세기의 신학자, 고백록의 저자)를 회심시킨 것은 결코 수없이 읽었던 책이 아니었고 사도 바울이 알려준 사랑이었습니다. 육체를 만족시키는 쾌락을 추구하는 정욕도 문제이지만 정신을 만족시키는 희열을 추구하는 지식욕도 문제였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도 떨어지고 집중력도 모자라는데 억지로 책을 붙들려고 했던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알고 있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나누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할 때 바다로부터 다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스쳤습니다.
“그만 갑시다,” 나는 옆에 있는 아내의 손을 잡고 가벼운 걸음으로 차로 돌아왔습니다.
2020. 11월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