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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Feb 04. 2024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아름다운 여행

황거레이 여행의 낙수(落穗)

2년 만에 다시 찾은 황거레이(Whangarei)

2년 만에 다시 찾은 황거레이(Whangarei: 뉴질랜드 북섬 노스랜드의 도시)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밝은 태양 아래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테아 강(Hatea River: 황거레이 도심을 흐르는 강)의 강물은 반짝거렸고 강을 중심으로 여유롭게 자리 잡고 있는 크고 작은 건물들은 서로 잘 어울려서 정겨운 풍경화를 만들어냈다. 터너(Turner: 영국의 풍경화가)가 여기 왔더라면 분명 멋진 풍경화 몇 점을 남겼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타운 베이신(town basin) 근처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아내와 같이 반대편 도심의 번화한 길 쪽으로 걸어 나갔다. 


2년 전에 왔을 때 점심 먹을 곳을 찾다가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마침 한국 분이 경영하는 곳이었다. 커피도 팔고 빵도 팔고 또 한쪽에서는 퓨전 스타일의 일식 음식을 파는 곳이었는데 근처의 다른 집들에 비해 더 많은 손님이 붐비고 있었다. 낯선 곳에 와서 괜찮은 식당 찾기가 만만치 않았고 사전 정보도 없이 왔었기에 밖에서 봐서 손님이 많은 곳이 괜찮은 곳이라는 아내의 말에 따라 들어간 집이었다. 일하고 있는 종업원들이 동양인들이어서 우리는 태국이나 베트남 사람이 운영하는 곳일 거라고 생각했다. 


음식을 시키고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주방 안에서 키 큰  남자 한분이 나오더니 휘적휘적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혹시 한국 분들 아니신가요?”하고 물어왔다. “그렇습니다마는,”하고 내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답하자 그분은 “아이고 반갑습니다. 안에서 내다보니 꼭 한국 분들 같아서 반가운 마음에 나와봤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 식당 주인이라며 식사 후에 꼭 커피는 자기가 대접하겠다며 “맛있게 잡수세요,”하면서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우리가 시킨 음식이 나왔는데 생각보다 푸짐하였고 입맛에도 맞아서 우리는 아주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아내도 아주 만족했는지 “틀림없이 저분이 우리 음식을 특식으로 만드셨을 거예요,”라고 말해서 나도 그럴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와서 우리 그릇을 치우자 다시 그분이 우리에게 왔다. “음식이 괜찮으셨나요?”하고 묻기에 내가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럼 커피 한 잔 하세요, 우리 집 커피가 꽤나 맛있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친절한 호의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아메리까노와 라떼 커피를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되지 않아 손수 커피를 가지고 온 그분은 우리 탁자에 같이 앉아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예절 바른 그의 태도에 나는 흔쾌히 그러시라고 답했고 그는 잔잔한 미소와 더불어 우리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는 진솔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 가족은 황거레이에 와서 산지가 10년쯤 되었는데 이삼 년 전부터 황거레이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해서 지금은 인구가 많이 늘었다고 했다. 또한 10년 전에는 한국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요즈음엔 꽤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와서 정착했다고 했다. 그렇지만도 식당에 식사하러 오는 한국 분들은 아주 드물기에 자기는 한국 분이 오면 반가워서 꼭 나와서 인사를 한다고 했다.


음식점 주인은 목사님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심 바쁜 때가 지났고 식당 안의 손님들도 대부분 빠져나갔다. 그제야 틈이 났는지 주방으로부터 한 여자분이 과일 접시를 들고 우리 쪽으로 왔다. “제 집사람입니다,”라고 그는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여보, 인사드려요. 오클랜드에서 오신 분들이야,”하고 부인에게 말했다. 눈이 크고 얼굴이 갸름한 예쁜 아내가 자랑스럽다는 듯한 태도였다. 얼굴 하나 가득 웃음을 담은 부인은 우리를 보며, “늦게 나와 죄송합니다. 이 양반은 한국 분만 보면 이렇게 달려 나와 좋아한답니다,”라고 말하며 남편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의 태도가 너무 다정하고 또 구김이 없어 보여 우리도 쉽게 말문이 열려 마치 오랜 친구인 양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신앙 이야기가 나왔고 우리가 교회 다니는 사람인 것을 알자 부인이 얼굴이 더 밝아지면서 “사실은 저희 남편이 목사예요,”하며 이곳에 오게 된 자세한 이야기를 했다.

 

주인 되시는 K 목사는 미국에서 신학을 하고 목회를 했었는데 십여 년 전에 아주 힘든 병마에 시달려서 목회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뒤 이곳 뉴질랜드로 휴양 목적으로 여행을 왔다가 이 나라가 마음에 들어 아주 이민을 왔다. 번잡한 오클랜드보다는 비교적 한적하고 기후도 온화한 황거레이가 맘에 들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때엔 이곳에 한국교회가 없어 집에서 가까운 키위(Kiwi: 뉴질랜드에 정착해 사는 영국인들을 비롯한 유럽인들을 부르는 호칭)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보았다. 교회를 다닌 지 얼마 안 돼서 담당 키위 목사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유일한 동양인 가족이기도 했지만 신실한 신앙 태도를 보이는 K 목사 가족에게 담당 목사가 특별한 관심과 세심한 배려를 베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K 목사가 평신도가 아니라 미국에서 목회까지 했던 목사라는 사실을 알고 난 담당목사는 혹시라도 K 목사가 황거레이에서 목회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교회를 무료로 빌려주겠다는 고마운 제의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회복되는 건강과 더불어 기회만 되면 하나님 섬기는 일을 다시 하고 싶었던 K 목사는 키위 목사의 고마운 제의에 힘을 얻어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 중에 뉴질랜드에서 소외받고 있는 소수민족들을 섬기라는 응답을 받고 다민족 교회를 열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목사 내외와 아들까지 셋이서만 예배를 드렸다. 3개월이 지난 뒤 처음으로 이 교회에 들어온 가정이 캄보디아 가정이었다. 그때의 감격과 기쁨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K 목사 내외는 입을 모았다.


그 캄보디아 가정이 일하고 있었던 음식점이 바로 지금 운영하고 있는 음식점이었다. 이 음식점은 그 당시 운영난으로 비틀거리고 있어 새 주인을 찾고 있었다. 한국이나 미국과는 달리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목회를 해도 일을 하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김 목사 내외는 종업원 대부분이 동남아 사람들인 이 음식점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이라 생각하고 과감히 떠맡았다. 이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었던 캄보디아 사람들, 베트남 사람들, 태국 사람들이 얼마 안 있어 교회의 성도가 된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도 요식업을 해본 경험이 없는 K 목사 내외였지만 기도하면서 성도가 된 직원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일하자 식당에 손님들도 많이 오게 되었고 교회에도 이제는 이십여 가정이 모이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이지요,”라고 담담하게 미소를 짓는 K 목사의 얼굴은 근엄한 성직자의 얼굴이 아니고 그냥 작은 음식점 주인의 소박한 얼굴이었다. 그 겸손한 태도와 표정에 이끌려 나와 아내도 뉴질랜드에 온 뒤의 우리의 삶과 신앙 여정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별것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지만 끝까지 경청해 주었던 K 목사 내외는 헤어질 때 우리 두 손을 잡고 “알고 보니 믿음도 삶도 저희의 선배님이시네요. 오늘 너무 반가웠습니다. 다음번에 황거레이에 오시게 되면 꼭 다시 들리십시오,”하고 차마 손을 놓지 못했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황거레이기에 우리 부부가 이번에 다시 황거레이에 오자마자 그분들의 음식점을 찾아 나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점심때가 이미 지나고 있기에 배도 고파서 전에 먹었던 풍성한 덮밥 생각도 간절했다. 아내와 나는 2년 전 기억을 되살려 어렵지 않게 음식점을 찾을 수 있었다. 식당 안은 여전히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전이랑 똑같네요,”하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엔 태국인같이 보이는 직원만 있었고 K 목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직원에게 주인을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는 “미스터 K?”하면서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곧이어 K 목사가 큰 키의 몸을 구부정하게 굽히며 주방에서 나왔다. 내가 “목사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자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아니 장로님!”하고 반갑게 내 손을 잡았다. “배가 고파서 밥 먹으러 왔습니다,”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활짝 웃으며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주문을 하고 식사가 나오는 동안 우린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식사가 나오자 K 목사는 우리가 편히 먹도록 잠깐 자리를 비웠다. 전보다 더 맛있어진 느낌이 드는 덮밥을 후딱 해치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K 목사가 커피를 가지고 왔다. “장로님은 아메리카노, 권사님은 라떼, 맞지요?” 하며 우리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2년 전에 우리가 주문했던 커피를 그대로 기억하고 계신 목사님의 마음 씀씀이가 향긋한 커피 내음과 더불어 코끝으로 전해져 왔다. 그리고 다시 주방문이 열리더니 과일 접시를 받쳐 든 사모가 우리에게 왔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이 두 분 이야기 많이 했는데 오늘 드디어 오셨네요,”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듬뿍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우린 가능한 K 목사 내외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대화의 물꼬를 터나갔다. 교회에서도 음식점에서도 한국 사람을 만날 기회도 한국말로 이야기할 기회도 많지 않은 그분들께 마음껏 기회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다양한 이야기 끝에 나이 든 사람들의 대화가 흔히 그렇듯 자연스레 서로의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K 목사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얼마 전에 결혼했고 아들 내외가 둘 다 약사인데 호주 시드니에서 아주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모님과 같이 있기 위하여 얼마 전에 과감하게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 황거레이로 왔다. 둘 다 이곳에서 새로운 직장을 마련하고 가까운 곳에 살고 있기에 여간 든든하지 않다고 했다.


“굉장히 착한 아드님이시군요. 시드니의 직장이 훨씬 더 좋은 여건이었을 텐데 그걸 다 포기하고 이곳 부모님 곁으로 오다니요,”라고 내가 말하자 사모가 “네, 정말 착한 애예요. 게다가 이번엔 또 아버지를 위해서,”하고 말을 이어나가려 하자 옆에 있던 K 목사가, “여보, 그 말은, "하며 눈짓으로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돌연 사모의 큰 눈이 금방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이 그렁그렁 해지면서 “그래도 장로님께는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하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이 양반, 다음 달에 수술하세요,”라고 했다. “아니 건강해 보이시는데 무슨 수술을요?”하고 깜짝 놀란 우리 부부가 거의 입을 모아서 두 분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허, 참, 그 사람, 두 분 걱정하시게 왜 그런 이야기를,”하면서 K 목사는 “저 사람은 이 얘기만 나오면 금방 울려고 해서…… 제가 말씀드려야겠네요,”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K 목사는 신장기능이 나빠져 약 1년 전부터 신장투석(腎臟透析) 시술을 받아왔다. 한 번 시술에 4시간 이상이 걸리는 투석은 고통도 심하고 또한 시술 자체가 신장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기능의 일부만을 대체하는 임시방편이기에 신장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장을 기증받아야 하는데 뇌사자(腦死者)의 신장이나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의 신장을 받아야 했다. 뇌사자의 신장은 구하기도 어렵고 구했다 하더라도 면역 적합성이 서로 맞아야 하는데 이는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다. 결국 살아있는 사람의 신장을 기증받아야 하는데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의 신장을 기증받기를 기대하기는 또한 가능성이 거의 없다. 검사 결과 다행히 사모의 신장이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와 신장이식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최후 순간의 마지막 점검 과정에서 사모의 신장에서 결석(結石)이 발견되어 이식 불가능 판결을 받았다. 신장 이식 수술에 모든 기대를 걸고 있던 K 목사 내외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고난을 사랑으로 이기고

그러자 이번엔 아들이 자기의 신장을 아버지께 드리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아들의 제안은 너무도 고마웠지만 K 목사는 자기가 살겠다고 앞날이 창창한 아들의 신장을 받을 수는 없었다. “아들아, 너무도 고맙다만 아직 시간이 있으니 다른 기증자가 나오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마,”라고 K 목사는 아들의 제안을 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아들은 이제껏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던 기증자가 쉽게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시간이 갈수록 투석을 받는 아버지의 고통은 커지고 수명은 짧아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 몰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마쳤고 자기의 신장이 어머니의 신장보다도 훨씬 더 아버지에게 이식하기 좋은 적합성을 갖췄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고 신장 기증자가 한쪽 신장만 가지고도 건강과 수명에 조금도 영향이 없고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는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아들은 우선 자기의 아내를 설득했고 아내가 승낙하자 둘이 같이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들 사랑과 남편 사랑의 한가운데서 그래도 아들 걱정이 더 커서 처음에는 아들을 말리던 사모도 드디어 마음을 돌렸고 온 가족의 뜨거운 사랑에 K 목사도 급기야 아들의 신장을 받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네 가족이 서로 부둥켜안고 한바탕 뜨거운 눈물 잔치를 했다. 특히 사모는 며느리를 끌어안고 “미안하다, 아가야. 그리고 너무 고맙다. 너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이고 우리 부부는 평생 네 앞에 죄인이다,”하며 끝도 없이 울었다고 했다.


K 목사 내외의 이야기가 끝날 때 이번엔 우리 내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세상엔 아직도 이렇게 착한 자식들이 있기에 부모들은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자녀들을 낳아 키우는구나. 세상엔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렇기에 세상은 아직도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자식을 위해서 몸의 일부 아니 전부라도 희생하는 부모는 많이 있다. 그러나 부모를 위해서 자기 몸의 일부라도 떼어내는 자식은 요즘 세상에선 너무도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정말 전래 동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바로 눈앞의 K 목사 내외에게 들으며 우리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다음 달 19일이 수술 날이어요. 기도 부탁드려요. 하나님께서 기도의 역군이 더 필요하다고 장로님 내외를 오늘 저희에게 보내 주신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사모의 두 손을 아내가 꼭 잡았다. “그럼요. 우리가 이번 여행을 남으로 갈까 북으로 갈까 하다가 어쩐지 북으로 오고 싶어 황거레이에 들렸는데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을 오늘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름다운 목사님 가정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합니다,”하고 아내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나도 K 목사의 두 손을 찾아 힘껏 잡았다. 하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둘의 눈길이 부딪쳤고 서로 바라보는 눈길 속에 많은 것이 담겨있었고 또 녹아내렸다.


잠시 후 우린 두 분의 배웅을 받으며 식당을 나왔다. 걷다가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고 또 걷다가 아직도 서있는 두 분에게 그만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며 우리는 차를 향했다. 자동차는 얌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앞에 흐르는 하테아 강물은 여전히 아까와 다름없이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우리 부부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아까보다 훨씬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우린 차에 올랐고 목적지인 황거레이 헤드를 향해 차를 몰았다.


“오늘이 여행 첫날이지만 저는 마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느낌에요. 이미 이번 여행에서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다한 느낌이 드는 것이 왜지요?”하며 아내가 아직도 물기에 젖은 큰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고 말했다. “나도 동감이오.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것이 여행인데 오늘 만난 아름다움보다 더 큰 아름다움이 어디 더 있겠소?”하고 나도 아내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시작된 2박 3일의 황거레이 여행은 시종 아름다웠다. 몇 차례 가본 곳이었지만 보는 곳마다 새로웠고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아침저녁으로 다음 달 19일에 있을 K 목사의 수술을 위해 기도하였다. 


2019. 5월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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