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나은 삶을 위한 불을' 만들며 살기 위하여
이곳에 살기 위하여
폴 엘뤼아르(1895~1952)
하늘이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불을 만들었다,
친구가 되기 위한 불,
겨울 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불,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불을.
빛이 나에게 준 모든 것을 나는 그 불에게 주었다:
숲과, 덤불, 밀밭과 포도밭,
둥지와 새들, 집과 열쇠,
벌레, 꽃, 모피, 축제.
나는 불꽃이 탁탁 튀는 소리만으로,
그 열기(熱氣)의 냄새만으로 살았다:
나는 흐르지 않는 물속에 가라앉는 배와 같았다,
죽은 자처럼 나는 단 하나의 원소밖에 갖지 않았다.
폴 엘뤼아르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이며 열렬한 저항 시인이었습니다. 초현실주의의 이상을 삶으로 실천했던 그의 시의 주제는 언제나 영원한 사랑, 평화, 그리고 자유에 도달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이 시도 그의 저항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하늘이 나를 버렸을 때’의 하늘은 신(神) 또는 그가 추구하는 자유로운 세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 하늘이라고 번역된 프랑스어는 ‘azur’입니다. 일상적인 의미의 하늘인 프랑스어 ‘ciel’ 대신 시인이 맑고 푸른 창공(蒼空)을 뜻하는 ‘azur’를 사용한 것은 그가 추구하는 사랑과 평화와 자유의 세상, 또는 그런 것들을 조화롭게 다스려야 할 신(神)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불을 만들었습니다. 불은 물론 저항과 혁명의 불꽃을 뜻합니다. 시인은 그 불과 친구가 되기 원하고 그 불과 더불어 겨울 밤 같은 어둔 세상으로 들어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겠다고 합니다. 초현실주의 시인답게 꿈과 현실을 하나로 융합하는 모습입니다.
둘째 연에서 ‘빛이 나에게 준 모든 것을 나는 그 불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빛’이라고 번역된 프랑스어 ‘jour’는 ‘날’이라는 뜻의 시간적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빛이 나에게 준 모든 것’은 ‘빛’이라는 자연과 ‘날’이라는 시간이 준 모든 것, 즉 삶이 그에게 부여했던 모든 것을 그가 추구하는 혁명의 ‘불’에게 주었다는 뜻입니다. 자연 속의 숲도, 육신을 담아야 했던 집도, 때론 즐거움을 주었던 축제도, 모두 혁명을 위해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불, 즉 혁명과 하나가 됩니다. 불꽃이 타며 소리를 내듯 혁명의 함성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 들어도, 또한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열기만 맡아도 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던 세상은 깨어 있지 않아 흐르지 않는 물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그런 흐르지 않는 또는 닫힌(fermée) 물속에 가라앉는 배와 같다고 자탄했습니다. 가라앉았기에 죽은 자와 같았고 물 밖의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잡다한 욕망과는 달리 오직 ‘불’이라는 하나의 원소만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지키고 있는 하나의 원소 ‘불’은 흐르지 않는 물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살아있다는 시인의 의지를 표명합니다.
고국에 살기 위하여
저와 아내는 30년간 뉴질랜드에 살다가 3년 전에 고국으로 영구 귀국하였습니다. 30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뉴질랜드에 살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많은 분들과 귀한 만남을 가지며 살다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아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결심하고 돌아온 것은 이곳이 우리의 고국이고 우리를 사랑하는 형제자매와 친구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그 옛날 우리를 낳아주고 키워준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다가 삶을 마치고 싶어서였습니다.
지난 3년간 아내와 나는 돌아온 고국의 삶에 무척 행복했습니다. 30년이나 나가서 마음껏 방황하다 돌아온 우리 부부는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탕자(누가복음 15장)와 같았지만, 고국은 사랑이 많은 아버지와 같이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더구나 30년 전 우리가 떠날 때의 고국은 개발도상국의 고개를 겨우 넘어 중진국에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지만, 돌아온 고국은 당당하게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 여러 방면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국이 우린 자랑스러웠고 이런 고국의 일원으로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삶에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불안한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은 재작년 후반기부터였습니다. 경제, 문화, 스포츠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을 계속해 온 우리 고국이지만 웬일인지 정치만은 후진성을 못 면하고 있었습니다. 여소야대의 상황 속에서 행정부와 입법부가 대립만을 일삼다가 드디어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했고 야당 의원이 대다수인 국회는 이를 무산시켰고 대통령을 탄핵했습니다. 여와 야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움만을 일삼았고 국민들마저 두 패로 갈라져 거리로 뛰쳐나와 매일같이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결국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의 의결로 대통령의 탄핵은 용인되어 파면되었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가 시작되었고 한 달 동안의 선거유세가 아닌 난투극 끝에 야당의 후보가 승리를 거두고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야당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환호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새롭게 대통령이 된 사람이 도덕적으로 너무도 흠결이 많은 사람이기에 걱정이 많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사람됨에는 눈을 감고 오직 권력을 잡으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그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깊은 우려의 마음을 많은 국민들이 갖고 있습니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라고 경고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잠언 29:2)이 이번 경우에는 해당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하튼 이제 던져졌던 주사위는 땅에 떨어져 결판이 났고 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허공을 날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이 상황을 훗날 역사가가 어떻게 평할지 몰라도 지금 우리가 모두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이번의 일련의 사태로 둘로 갈라진 국민들의 마음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일입니다. 서로의 의견이 다르기에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나와 의견이 다른 남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참다운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이번 일로 상처받은 마음이 있으면 싸매 주고 다툼이 있었던 이웃이 있으면 먼저 찾아가 악수를 청하고 모두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은 마음이라고 허허 웃을 때 우리 국민은 다시 하나가 될 것입니다.
다시 이곳에 살기 위하여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했던 시를 읽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곳(우리 고국)에 살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 번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가장 위험한 때는 전시(戰時)가 아니라 오히려 평화로운 때라고 합니다. 지난 반세기 지나치게 빨리 경제적 풍요를 일구었기에 어쩌면 우리는 조금은 정신적 안일과 육신적 나태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이 시를 썼던 시인처럼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불’을 마음속에 담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곳에 살기 위하여' 평생을 바쳐온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과, 또한 우리 부부와 같이 노년의 삶을 ‘이곳에 살기 위하여’ 돌아온 사람들이 더욱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2025년 6월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