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추억
가을비
창 밖
내 작은 뜨락에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린다
종일토록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덧
내 가슴속 웅덩이로 빗물이 고여 든다
하늘에서 무심코 내리는 비도
세상 모든 정경을 담고 내려오는데
하물며
내 가슴속으로 고여 드는 빗물은 오죽하랴
고여 드는 빗물을 가슴으로 받아내며
빗물 속에 녹아있는 세월을 느낀다
창 밖 뜨락엔
추적추적
가을비가 계속 내리고
내 가슴속 웅덩이론 세월이 흘러들고
아 세월이여
모든 추억과 꿈을 휩싸서 가버린 세월이여
세상을 돌다 돌다 가을 하늘을 날다 날다
어느 구름을 만나 문득 비가 되어
오늘 나의 뜨락에 내리게 되었는가
그리고 지금 내 가슴속으로 고여 들고 있는가?
아 세월이여
나는 하나도 잊지 않고 있노니
너의 색깔 너의 체취 너의 소리
-여름 폭풍우 겨울 눈보라 봄의 꽃 내음 가을 낙엽 지는 소리-
그 속에 녹아있는
내 여인들의 사랑이야기
내 친구들의 웃음소리
내 가족들의 도란도란 다정한 모습
나는 하나도 잊지 않고 있노니
아 세월이여
오라 들어오라 내 가슴속으로
가을비는
추적추적 계속 내리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바라보다
나의 눈에서도 비가 내린다
그리고 가슴속 웅덩이 속엔 빗물보다 진한 세월의 눈물이 고여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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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에 이곳 오클랜드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누군가에 의하면 오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며칠 전에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계속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가 시를 한 편 썼다. 그렇게 시를 쓰다 문득 아주 오래 전의 어느 비 오는 가을날과 거기 얽힌 추억이 생각났다.
그땐 가을이었고 저녁이었고 비가 내렸고 거리엔 간간이 바람이 불었다.
사십 년도 더 지난 그때의 일이 왜 아직도 그렇게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시시때때로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오늘같이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때 그날의 일이 또 떠오르고 나는 어느덧 사십여 년 전의 그날로 돌아간다.
그때 나는 스물여섯 살이었고 군 복무 중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군 복무를 하기 위하여 공군 장교가 되었고 공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임관한 지 벌써 2년이 넘었기에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군대 생활은 편하다 못해 지루하다고 할 정도로 판에 박은 일상이었다.
그날도 5시 퇴근시간이 되자 통근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가 대방동 공군본부를 지나고 한강 다리로 진입할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비 치고는 제법 굵은 빗방울이 버스 차창을 두드렸고 차창 넘어 저 아래로 한강물이 아스라하게 느껴졌다. ‘어 비가 제법 내리는데, 이럴 땐 내려서 한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글쎄, 어디서 쯤 내릴까?’ 내리는 비를 보며 공연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는지 버스에 타고 있던 젊은 장교들 몇몇이 수군거렸다.
버스가 무교동 광화문 우체국 앞에 서자 꽤나 많은 장교들이 내렸다. 그중 하나가 앉아있는 나를 보며 소리쳤다. ‘어이 김중위, 같이 내려. 한잔 하자고,’하며 손짓을 했다. ‘아니 난 일이 있어서 가야 되네.’ 하고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좀 있다 버스가 종로 5가에 섰을 때 나는 재빨리 내렸다. 아직도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고 거리엔 어둠이 제법 짙었다. 내 발길은 동숭동 대학로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 학림다방에 가서 커피 한 잔을 하자. 그리고 브람스를 들려 달래자,’하고 이미 버스 안에서 작정을 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이미 몇 년이 지났지만 마음이 울적하거나 옛 생각이 나게 되면 무심코 오게 되는 동숭동 대학로이고 또 학림다방이었다.
부드럽게 내리는 가을비를 개의치 않고 온몸으로 맞으며 나는 서서히 걸었다. 총총거리고 내 앞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 앞 저만치에 걸어가는 한 여자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아니, 지희 아니야. 그럴 리가?’ 하면서 나는 흰 바바리를 입고 검은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또 보았다. ‘틀림없이 지희다. 지희가 한국에 돌아왔나? 그리고 이 시간에 웬일이지.’ 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걸음을 빨리 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희는 대학시절 내가 가장 가까이 지냈던 같은 과 여학생이었다. 그녀와 더불어 이 대학로를 같이 걸었던 수많은 날들이 생각났다. 그땐 무슨 이야깃거리가 그렇게 많았던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사이 종로 5가 버스 정거장에 도착했고 그녀가 버스 타는 것을 보고 나는 혼자 집으로 걸어가곤 했었다. 대학 3학년 겨울 방학이 시작됐을 때 그녀는 가족들과 더불어 남미의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도산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커피를 마시던 그날 일이 바로 엊그제 같다. 바로 지금 가고 있는 학림다방에서였다. 가서 꼭 편지를 하기로 했었지만 그날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런저런 반갑지 않은 소문만 가끔 들려올 뿐이었다.
그런데 이 저녁 그녀가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니.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희, 지희 맞지?’ 그녀에게 다가간 나는 큰 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 누구 찾으세요?’하고 놀란 표정으로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린 그녀는 낯선 얼굴이었다. 꿈속에서도 잊지 않았던 지희가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착각을 했군요. 미안합니다,’하고 나는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어둠은 더욱 짙어졌고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화석처럼 서있었다. 빗속에 어둠 속에 지나간 날들의 그녀와의 추억이 끈적거리며 녹아내렸다.
‘커피 한잔 주세요. 아주 뜨겁게요. 그리고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부탁해요. 물론 1번요.’ 학림다방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을 삐걱거리며 올라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자 주문을 받으러 온 아가씨에게 나는 목마른 사람처럼 커피와 음악을 아울러 주문했다. 그랬다. 이 비 내리는 가을 저녁엔 꼭 브람스의 음악 그것도 비의 노래라고 알려진 1번 바이올린 소나타여야 했다. 비 내리는 날엔 지희와 더불어 자주 이 다방에 오곤 했다. 그리고 그녀는 어김없이 브람스의 소나타 1번을 신청했다. 그러면서 또 ‘2악장부터 틀어주세요’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었다.
뜨거운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커피를 마시며 곧이어 흘러나오는 브람스를 들으며 나는 지희 생각을 했다. 아직도 브라질에 있을까? 무슨 일이 있기에 편지 한 장도 못할까? 다시금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솟구쳤다. 헤어진 지 3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기에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애틋한 사랑의 마음이 바이올린 선율과 더불어 가슴을 저몄다. 잊자, 잊어버리자. 어차피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했지 않나. 독백하듯 중얼거리며 나는 끝까지 음악을 들었다.
그 저녁 다방에서 나온 나는 혼자 술집을 찾아 들어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마셨다. 그리고 밤거리를 끝도 없이 비척거리며 걸었다. 가을비는 지금처럼 추적추적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빗속에서 어둠 속에서 저만치 앞에서 지희는 여전히 내 앞을 걷고 있었다.
2017 4월 11일 석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