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을 묻다
얼마 전 '좋은 삶을 묻다'라는 주제로 진행된 한 컨퍼런스에 다녀왔다. 가장 인상 깊었던 시간은 한평생 괴테 문학을 연구한 학자이자 <파우스트>, <데미안> 등을 번역하신 전영애 선생님과의 대담회 시간이었다.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 체구와 상관없이 느껴지는 아우라, 분명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쉽게 보편화하지 않으려는 말투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사회가 원하는 '좋은 어른'에 가까운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한 가지 분야에 몰두하며 지식을 나눠오신 전영애 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자긍심을 쌓는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을 잘하는데서 자긍심이 쌓이며, 그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해야 하는 평범한 일을 그냥 계속하는 것이다.
내가 조금 더 어렸을 때 이 말을 들었다면 '맞아 자긍심 중요하지' 정도로 넘겼겠지만 이제는 자긍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나의 일을 좋아하며, 점차 잘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쌓아온 재능을 나누며 이 사회에 작은 보탬이 되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나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을 찾아 그냥 계속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어쩌면 한평생에 거쳐 탐구해야 할 숙제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선생님께서도 항상 인생의 스승을 찾아다녔다고 하셨다. 학문의 스승은 49세에 만났고 간절하면 찾게 되지만, 결국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을 알게 되셨다고 한다. 결국 자신의 선생님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나이 든다는 것의 좋은 점은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시간이 부족해서 여러 문제들이 스르르 풀리기 때문에 기대해도 좋다는 말씀을 하셔서 순간 위로를 받았다. 다만 준비해야 할 것은 자기 세계를 다져놓는 것이다. 주위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자긍심을 높여야 하며,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꾸준히 하고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남기셨다.
그러면서 본인이 번역하신 <파우스트>의 한 구절을 소개해 주셨는데 '노력하다'라는 말로는 원어의 의미가 잘 살지 않는 것 같아 오랜 고민 끝에 '지향'이라는 단어를 쓰셨다고 한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는 사람이 방황하기 때문에 방황하지 않는 사람은 다 산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해석과 함께, 사실상 비문이지만 틀린 문장이 주는 위로가 있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러니 방황한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 어디로 가는지 내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향’ 어려운 말이 아님에도 순간적으로 낯선 단어처럼 느껴진 것은, 명사형보다 동사형으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인 것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 심리적으로 지향보다는 ‘지양’에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면서 무엇을 할지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 나의 개성 중에 무엇을 살릴지보다 무엇을 죽여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에 더 익숙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당부하셨던 마지막 말씀은, 한 개인이 작은 선택을 내릴 때 조금이라도 사회를 위한 '51'을 택하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어렵더라도 '51'을 택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49와 51의 비유는 나 역시도 종종 하던 생각이다. 나의 경우에는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이 많아도 착한 사람이 51로 아주 근소하게 더 많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언제였더라. 누군가 나에게 "사실 착한 사람은 5% 나쁜 사람은 10%밖에 안될걸?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착해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는 사람이야"라고 정정해 주었을 때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을지언정 굳이 이 명제를 수정하지 않았다. 이것을 인정해 버리는 순간 내가 지금껏 믿고 있던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였다. 세상엔 아주 근소하게 착한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다는 믿음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기제, 심리적 방어선인 셈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연일 뉴스에서는 사회 초년생의 절박한 마음을 이용한 전세사기니 살인이니 온갖 나쁜 사람이 판친다. 뉴스까지 갈 것도 없이 고개만 조금 돌려도 교묘하게 남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널려있고, 더 이상 사람에 기대할 것이 전혀 없을 것 같다. 그럴 때면 '이번 생은 망했어'처럼 '이번 인류는 망했어' 같은 절망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가 가끔 세상을 살다 보면 만나게 된다. 자기는 사실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끝까지 선을 수호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비난과 외면이 더 쉬운 세상에서 끝까지 마주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이런 사람들이 있어 착한 사람이 더 많다는 바보 같은 명제를, 눈에 빤히 보이는 반례를 끝까지 찾지 않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어지는 것이다.
결국 나의 삶의 지향은 나의 선택이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끝까지 선의 편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직 그런 사람들이 있음을 열심히 전파하는 것, 그리하여 이 세상에 근소하게라도 선을 지향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