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멀티버스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면

by 무화원

지난밤 악몽을 꾸었다. 요 몇 달간은 악몽을 잘 꾸지 않는 나날들이 이어졌는데 스트레스가 조금 높아지는 느낌이 있더니 어김없이 악몽이 찾아왔다. 조금 찝찝한 기분으로 일어났지만 괜찮다. 무의식이 주관하는 영역에서 벗어나 침대를 내려오면 그 이후의 나의 행동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나의 선택으로 오늘 하루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오늘은 매일 가는 출근길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언덕길을 골랐다. 돌아가느라 5분 정도는 더 걸리지만 빼곡히 늘어선 가로수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제법 차가워진 겨울 아침의 공기를 느낀다. 매일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가면 매일의 출근길도 작은 모험처럼 느껴진다. 회사 가기 싫은 직장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소심한 반항이다.


연말을 맞아 회사에서 야유회를 했다. 야유회. 이름만으로 야유를 보내고 싶어지는 행사다. 추워진 날씨 탓에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야외가 아닌 실내에서 퀴즈를 풀고 낮부터 술을 마셨다. 어정쩡하게 웃으며 어쩐지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고 2차로 향하는 무리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야유회가 더 일찍 끝나서 모처럼 평일 오후에 비는 시간이 생겼다. 선물처럼 주어진 이 시간에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가장 안전한 행복을 보장하는 코스를 택했다. 조금 멀지만 서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 가기로 한다. 눈앞에 보이는 지하철역을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어쩐지 오늘은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타고 싶은 날이다. 불필요하게 많은 계단, 답답한 공기, 붐비는 열차보단 조금 돌아가더라도 바깥의 풍경을 보며 작은 바람이라도 맡을 수 있는 버스가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스 뒷문에서 두 번째 줄 창가 좌석에 앉았다. 오늘 들은 노래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1집. 모든 트랙을 외울 정도로 많이 들었던 앨범이다.


노래를 들으며 서울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낮도 밤도 아닌 이 시간대의 서울의 모습을 좋아한다. 마지막 트랙이 나올 때에 맞춰 목적지가 눈에 보여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버스에 내려 카페로 향하는 길에 지나치는 사람들을 관찰해 본다. 평일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처럼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아마도 야유회가 일찍 끝나는 사람은 없겠지. 혼자만 웃긴 상상 하며 카페로 향한다. 카운터 앞에서 어떤 메뉴를 고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부족한 잠과 약간의 취기를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 아주 달콤한 메뉴를 골랐다. 진한 초코케익을 한입 베어 물며 주말에는 상상도 못 할 여유로운 카페를 독점한다. 아, 행복하다. 그냥 가기는 아쉬워 따뜻한 커피 한잔을 테이크 아웃해서 나온다. 서울숲에 갈까 하다가 오늘은 왠지 강이 보고 싶어 한강 공원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시원한 바람, 반짝이는 물결, 파란 하늘, 적당한 햇빛 그리고 말랑한 노래까지.


내가 선택할 수 있던 수만 개의 유니버스 중, 아마도 오늘의 선택지의 내가 가장 행복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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