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완벽주의
제목만 보고도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추억의 만화 <영심이>를 기억하는가? 영심이와 친구들이 여행을 가는 기차 안에서 신나게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무한’ 숫자송이다.
나는 그 숫자송을 내 멋대로 줄여서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
둘이면 둘이지 셋은 아니야
랄라랄라 랄라랄라 랄랄 라~‘
하고 부른다.
무심코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덧 이 가사가 나에겐 ‘하나면 하나지를 받아들여야지!‘라고 들린다. 우리가 매번 욕망으로 들끓으며 고통받는 데는 바로 이 ’하나면 하나지‘를 받아들이지 못해서다.
우리는 늘 하나보다 더 많은 둘을 바란다. 그게 인간의 본능일까? 하나를 들이면서 둘을 얻기를 바라는 걸 도둑놈의 심보라 단정할 수 없다. 그 어느 누가 자기가 들인 하나마저 기꺼이 버리며 영의 결과를 내도 초탈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를 들여 둘, 그 와중에 감히 셋을 기대하기도 하고, 나 또한 하나보다는 더한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 여겨지길 바란다. 가끔 내 옆의 누군가는 하나를 들여서 열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행운이 언젠가는 내게도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세상은 머리 아픈 수학 문제집 속 공식처럼 딱딱 풀리지 않는다. 둘을 바라며 하나를 들이지만 정작 손 안의 남은 0과 1 사이의 것을 깨달을 때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상실의 늪에 빠진다. 아직 얻은 게 아닌 것임에도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느낀다니 참으로 비합리적인 감정이다.
나는 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내가 하나 이상의 가치를 지닌 인간이길 바랐다. 돌아보면 내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1인분의 역할이 넘는 삶을 좇느라 버거운 삶이었다. 한 가지 일화를 들자면 이렇다.
무주택자 부모님의 오랜 숙원인 집 장만의 꿈을 이루고 집들이를 성대하게 열었다. 출장뷔페 음식만 700인분 치를 주문했으니 시골에서 결혼 못지않은 큰 잔치라 내세울 법하다. 다리를 저는 아빠와 공사다망한 엄마. 딸이 비혼이라 잔치를 열 기회가 -1인 부모님의 장녀로서 나는 손님 접대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강도 사고의 후유증으로 다리가 성치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손님들을 챙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다리를 질질 끌며 하루종일 이곳저곳을 누볐다. 심지어 중간중간 엉덩이가 무겁게 앉아서 술을 마시는 남동생을 다그치기까지 했다.
그날 밤 엄마는 이불속에서 숨죽여 우는 나를 발견하고 놀랐다. 나는 아픈 다리를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었다. 일에 치여 돌아다닐 땐 몰랐던 다리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불안감이 날 사로잡았다.
“이러다 평생 아빠처럼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면 어떡해?“
나는 엄마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최근 아빠가 환갑을 맞았다. 크루즈 여행은 못 보내줘도 나는 내 선에서 최대한 성의를 보여 가족 식사와 이벤트를 준비했다. 20년 전 사고를 당해 한 순간에 장애가 생겼던 아빠. 5일간 혼수상태를 겪고 병원에서 치료도 거부당했었던 아빠가 환갑이라니.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아빠의 환갑을 준비하며 나는 왜인지 자꾸만 집들이 사건이 떠올랐다.
이제껏 나를 짓누르고 있던 불편한 사실. 사실인즉슨 장애인의 가족인 내가, 어릴 때부터 인권감수성이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하던 내가, 그 누구보다도 장애를 혐오하고 있었다.
내 몸상태를 제쳐두고 애쓰는 강박과 완벽주의. 그로 인한 자잘한 질병들. 내 고질병의 원인은 나뿐만 아니라 세상을 모두 숫자로 판단하는 데 있다. 엄마는 자수성가해서 2가 될 수 있지만 엄마의 역할로는 마이너스니 1.5의 사람. 아빠는 장애인이라 정상인보다 더한 노력으로 1을 채워야 하지만 노력을 하지 않으니 0.5의 사람. 나는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 졸업 후 그럴싸한 결과를 내지 못했으니 0.5의 사람. 그러나 노력으로 1 이상을 채우려는 사람.
언젠가 친구에게 ”나는 어제보다 오늘 +1이 되지 않으면 불완전하게 느껴져.“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슬럼프가 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데 대한 칭얼거림이었을 뿐인데, 내 말을 들은 친구는 화들짝 놀라며 “왜 그렇게 생각해?”라고 걱정을 담아 되물었다. 다른 친구는 내게 “너는 그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의문을 느꼈다.
‘가족 사이에서도 필요와 교환에 의해 애정이 샘솟는데 어떻게 한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해도 소중할 수 있지?’
어릴 땐 가난해서, 가족이 아파서, 조금 커서는 인서울 대학을 나와서, 비혼을 선택해서. 숫자로 세상을 인식하는 데 능숙했던 나는 늘 내 쓸모를 증명하려 애썼다. 이런 나에게 제동을 건 것은 채사장의 <열 한 계단>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에게 전문성을 요한다. 때문에 ‘전문성’과 ‘생산성’이 결여된 일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그동안 ‘생산적 결과’로 개인의 쓸모가 증명되는 능력주의적 사고에 절여져 실패를 겪을수록 더더욱 완벽주의와 강박이 심해졌던 것이다.
여전히 나는 강박과 완벽주의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나를 가둔 이 완벽주의 감옥은 문고리가 걸쳐지지 않은 채 닫힌 상태이다. 그저 내가 문을 열고 나가면 된다. 다만 나는 아직도 이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강박과 완벽주의, 그로 인한 높은 불안까지. 나는 여전히 생산성에 집착하면서도, 비생산적인 일에 몰두하고 실패가 예견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도 한다. 가끔은 비생산적인 일이 생산적 결과로 이어지기를 감히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는 하나지’를 생각하며, 지금의 노력이 모두 1 이상의 결과를 낳진 않을 거라는 세상의 진리를 받아들였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공장식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린 제각각의 크기와 모양이 다른 나사다.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정상성’의 강요에서 벗어나 1인분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나부터 우리의 불완전함을 긍정하고 서로를 보완하려는 배려와 여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의 완벽주의는 다행히도 불치병이 아니다. 언젠가 나는 감옥의 문을 활짝 열고 제 발로 이 감옥을 탈출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기꺼이 불확실하고 비생산적인 삶을 유랑해 볼 참이다.
23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