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이면서 ‘는’인 삶
“너는 좋고 싫은 게 분명해서 그래.”
세상에 화가 많던 내게 언니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정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1번부터 100번까지 쭉 목록화해서 나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의 나에게 ‘아무거나’나 ‘중립’이란 단어는 선택을 미루는 회피형 단어로 일부러 피하는 단어였다.
그래서 나는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데 적극적이었다. 싫어하는 걸 당당하게 싫어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타인의 의견에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 뭐가 싫고 좋은지를 직접 알아보고 겪어봐야 했다.
그 시도들이 매번 플러스(+)의 경험으론 남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탐구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낯선 상황에 나를 던지기도 하고, 갈등이 예상되는 태풍의 눈을 맞이하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꼿꼿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내가 나를 알아갈수록 나는 단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복잡한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ㄱ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거꾸로 ㄴ이 되기도 했고, 전에는 맞았던 게 지금 보니 틀리기도 했다. 황희 정승의 ‘너도 맞고 너도 맞다.’ 자세가 시시때때로 추가 이리저리 기우는 세상에서 기울어 무너지지 않고 균형을 지키는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너는 ㄱ이야.”라고 정의되는 것에 불편해졌다. 누군가는 나에게 ㄱ이라 하고, 누군가는 나에게 ㄴ이라 한다. 처음에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나 자신도 어느 쪽으로 나를 정의해야 하나 답답했다.
나 스스로도 나를 정의할 수 없다는 걸 알아챌 즈음, 나의 복잡한 내면과 생각이 내 신체를 뚫고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할 즈음, 내 곁의 사람들은 ‘너는 이래.’라고 쉽게 단정 짓는 걸 알았다. 그 사람들은 그래야 나를 대하기 편했던 걸까?
누가 나에 대해 ㄱ이라 하면 마음속으로 ‘저 사람은 나에 대해 다 알지 못해. 저 사람에겐 내가 ㄱ으로 보이나 봐. 근데 따져보면 ㄱ도 괜찮아. 그럼 앞으로도 ㄱ을 보이자.’라고 생각한다. ㄱ의 무리에선 ㄱ이, ㄴ의 무리에선 ㄴ이 된다.
그러다 보니 나는 갈등을 두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된 데는 갈등을 맞닥뜨리고 그걸 고칠 에너지가 부족한 게 크다. 몸을 다친 이후로 내 신체는 언제나 연료가 반만 차 있다. 몸은 약해졌고 날씨에도 쉽게 영향받아 골골대기 일쑤다. 한창 왕성히 살아야 할 나이인데 신체적, 정신적 한계로 눈앞에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없다. 나 혼자 다 바꿀 수도 없다. 종종 ‘버겁다’고 느낀다. 나라는 사람이 ㄱ인지, ㄴ인지 증명하는 데도 지쳤다. ‘뭐든 다 할 수 없는 나’, ‘부족한 나’, ‘영웅이 아닌 평범한 나‘를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정의하는 걸 멈췄다. 애써 구분해 이해하고 설득하고 고치기보다 그대로 긍정하려 노력한다. 이런 지금의 나는 20대의 내가 혐오하던 부류다. 개인의 삶의 편의를 핑계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편을 정정하지 않는 사람. 세상의 소요 속에서 달관한 척, 초연한 척 거리를 두고 관망하는 사람.
모난 돌이 둥글게 깎여서 나라는 사람의 크기는 작아졌다. 작아졌지만 단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이게 맞는 걸까 의아하기도 하다. 나는 이마저도 판단을 미뤄두기로 했다. 그저 지금의 나를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기로 한다. ‘극(opposite)’에 있으면서 거꾸로 ‘는(equal)’을 긍정하려고 애쓴다.
(*극곰을 뒤집어 문는을 작가명으로 정한 까닭이다.)
이렇게 복잡해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나도 나다. 때로는 극을 오가며 삐죽하고 모순적이면서도, 때로는 물렁해서 ‘ㄱ=ㄴ’에 순응할 줄도 안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나를 이루는 단단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를 등지며 반성할 줄 알고, 현재의 나를 직면하여 변화를 추구하며, 미래를 향한 내 신념에 부끄러움이 없고 떳떳하다면.
이런 나도 괜찮은 사람이다.
그러니, 오늘의 바보스러운 나에게 잘해주자 다짐한다. 웅크려 작아진 상체를 바로 편다. 오롯이 배에 힘을 주고 앞을 향해 걷는다.
또
박
또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