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자화상

by 국화리

자화상


장소현 작가의 신작 소설 『그림 그림자』를 읽다가 한 구절에서 멈추어 긴 사색에 들었다.


“나는 요즈음 자화상을 그리려고 발버둥 치고 있네. 지나온 자취들을 되돌아보고 나는 도대체 어떤 중생인가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 때문에 아팠던 사람 찾아서 미안하다는 말도 전해야겠지.”


작가는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에게 묻는다.


“실례지만 뉘신가요.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였던가요.”


그러고는 끝내 자화상을 그리지 못했다고 했다.


미술과 문학을 함께 공부한 그는 시집, 희곡집, 소설집, 미술책 등을 수십 권 펴냈고, 희곡도 50여 편 남겼다. 스스로를 ‘문화 잡화상’이라 부르며 다양한 얼굴을 살아온 그는,


어쩌면 그 많은 얼굴 중 무엇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화가는 자화상을 그렸다.

그들의 얼굴 속에는 삶의 표정과 함께 내면의 풍경이 담겨 있다.


청년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은 지금도 섬뜩하다.


거친 붓질로 그는 자기 안의 불안과 절망을 마주했다.


“천재 화가님, 자학이 너무 격해서 마음이 아프네요.”

나는 그의 그림 앞에서 그렇게 속삭였다.


렘브란트의 말년 자화상 앞에서는 오래 머물게 된다.


잔잔한 터치, 균형미 속에 스며든 인간미.

그의 눈을 마주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참회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작가는 조선의 윤두서 자화상을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 마치 총구처럼 응시하는 시선, 덥수룩한 수염 한 올 한 올에도 무거운 삶이 서려 있다. 당쟁 속에서 벼슬길을 포기한 그가 그림으로 심상을 담았던 것일까. 칼날 같은 빛이 번뜩인다.


나도 젊은 시절 그림을 그린 적은 있지만, 자화상을 그려본 적은 없다.


내 얼굴의 안과 겉엔 늘 안개가 깔려 있었고, 그림자만 따라다녔다.


세월 속에서 나의 희로애락도 춤을 추었다.


이민이라는 큰 강을 두 번이나 건너며 낯선 풍경 속에 뿌리를 다시 내렸다.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계절을 따라 흘러갔다. 낙엽이 낭만이 아니었고, 바람은 늘 등을 떠밀었다.


자화상처럼, 그 시절의 내 모습도 그려둘 걸 그랬다.


장편은 두 편에서 멈췄지만, 단편들은 여전히 써지고 있다.

아마 그 자화상들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말수가 적고 시무룩한 날이면 딸이 묻는다.

“엄마, 또 무슨 일 있어요?”


삶을 헐렁하게 걸치고 살아온 탓에 돌부리에 걸리기도하고, 뒤통수를 맞은적도 있다.


닳아버린 나사처럼, 아니면 엇맞는 나사처럼 그냥저냥 살아왔다.


나는 본디 이슬방울 얼룩진 식물성이다.


검붉은 장미나 보랏빛 수선화 같은 화려한 꽃은 되지 못했다.

그저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들꽃이면 족했다.


글을 쓰는 동안엔 해바라기처럼 해를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내 얼굴에도 글자 무늬가 새겨졌다.

글자 사이로 장례식장의 노란 국화가 떠올랐다.

죽음의 냄새를 중화시켜 보라며, 국화는 그렇게 나를 향해 피어났다.


이제 나이의 무게가 점점 더 버겁다.

나도 장소현 작가처럼 거울을 들여다보며 말을 건다.


“정숙 씨인가요, 국화 씨인가요?”


말년에는 국화로 살기로 했으니, 국화의 얼굴을 그려야겠다.

연필을 들었는데, 내 안의 내가 너무 많아 형체가 어른거릴 뿐이다.


정숙으로 살던 세월은 프리다 칼로의 그림처럼 가슴에 몇 개의 못을 박았다.

오늘 거울을 보니 그 못 들은 생선가시처럼 흐물거렸다.

찌르지도 못하는, 더 이상 가시도 아닌 것들.


내 얼굴은 내가 볼 수 없으니 남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평생 남의 얼굴만 보고 살았기에 내 안에 남은 자화상은 오히려 또렷하다.


나는 박경리, 박완서 두 여성 작가의 말년을 좋아한다.


그들의 얼굴엔 거친 세월을 정리하고, 버릴 것만 남긴 듯한 담담함이 있었다.


‘나성문화재 1호’라는 별명이 붙은 장소현 작가.

그는 과연 어떤 자화상을 남길까.


나는 박경리와 박완서를 모델로 삼았기에, 내 자화상은 단순할 수밖에 없다.


윤곽만 그린 국화의 얼굴 안에

텅 빈 하늘이나 담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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