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유카탄 반도, 카리브해를 가다
-한국인 멕시코 이민자 '애니깽'-
스노클링에 도전
칸쿤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행은 잠시 긴장했다. 한 숙란회원이 갑자기 메스꺼움과 어지러움증을 호소했다. 다행히 체증이라 간단한 시술 후 회복되었다. 서울에서부터 이어진 강행군이 피로를 누적시켰으리라. 그러나 곧 도착할 칸쿤은, 그 모든 피로를 푸른 바닷속에 녹여줄 보랏빛 휴양지가 아닌가.
칸쿤(Cancún), 멕시코 유카탄 반도 북동쪽 해안에 자리한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휴양 도시다.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실크처럼 고운 백사장, 붉은 산호초가 기다리는 곳이다. 신혼여행온 커플로 해변가는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그 해변선을 따라 늘어선 고층 '호텔 존'에 들어서자 ‘드디어 휴가! ’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래사장 위의 야자 파라솔의 행렬은 칸쿤의 끌림이었다. 야외 식당의 뷔페식으로 우리는 종일 물속과 해변을 드나들며 먹고 마셨다.
스노클링 장비를 갖춰 입고 총 없는 전사처럼 바다로 뛰어들었다. 가슴에서 덜컹 소리가 났지만 입고 있는 장비를 굳게 믿기로 했다. 투명하고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며 열대어와 함께 유영했다. 마치 우리 자신이 거대한 푸른 물고기가 된 듯 바닷속을 누볐다. 꾸역꾸역 누적된 마음속의 쓰레기들은 깊은 심해로 풀려 나갔다.
늦은 밤, 해변가에 둘러앉아 고향 노래도 한 곡조씩을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나 역시 어설프게 배운 판소리 가락을 읊으며, 파도 소리에 남은 서로움의 찌꺼기를 띄워 보냈다. 우리는 휴가 분위기에 녹아들며 푸른 파도와 하나 되었다.
돌과 심장의 제단
칸쿤에서 100여 Km 떨어진 곳으로 마야 문명의 심장부인 치첸이트사(Chichén Itzá)로 향했다.
이집트의 파라미드 다음으로 높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석조 제단.
멕시코 시티의 티오테우아칸과 비슷한 석조 건축물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아즈택과 마야문명은 지역만 다를 뿐 소통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수많은 숙련공들이 돌을 다듬고, 옮기고, 길이를 재며 축조했을 이 공간에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엄숙함이 감돌았다. 그 당시에는 멕시코의 토속색채로 칠해지고 부속 장치도 많아 멀리서도 눈길을 사로 잡았다한다.
태양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젊은이들의 뜨거운 심장을 영광스럽게 바쳤던 제단. 그 숭고함 뒤에 숨겨진 섬뜩한 역사가 피부 속을 파고들어 신음소리를 냈다. 마야 문명은 아즈텍보다 훨씬 먼저 시작되어, 그곳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툴룸(Tulum)으로 이동했다. 절벽 위에 우뚝 선 해변가의 유적지로 아름다웠다. 마야 문명의 마지막 도시 중 하나이다. 이곳은 무역의 중심지인 코바(Cobá)의 항구 도시로 번성했다.
마야어로 ‘벽'을 뜻하는 이름처럼,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푸른 바닷가와 고대 건축물이 절묘하게 조화된, 세계에서 유일한 해변 요새다.
마야 귀족들은 별천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심청이 같은 처녀를 바쳤던 신성한 우물 세노테(Cenote)에서 기우제를 드렸다. 심청이와 인당수가 생각나서
멍울이 맺혔다.
조선인 애니깽, 선인장 아래 잠들다
멕시코는 선인장의 나라다. 만여 종이 넘는 가시 돋친 생명체들이 메마른 땅을 지키고 섰다. 그중 용설란은 질긴 섬유질을 품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을 삼킨 헤네켄(Henequen)이다. 멕시코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이 섬유로 밧줄로 엮으며, 고난의 세월을 ‘애니깽'이라는 억센 이름에 새겨 넣었다.
1905년, 새 희망을 품고 유카탄 반도에 도착한 천여 명의 조선인들.
그들은 노예처럼 헤네켄 농장에 팔려와 일했다. 헤네켄이 밧줄, 로프 등의 원료가 되는 동안, 한국인 노동자들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약속된 임금은 낮았고, 그마저도 제대로 주지 않아 그들의 삶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계약이 끝나도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1910년, 조선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고, 그들이 정체성인 '조선'이라는 여권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같은 시기 멕시코에서는 혁명의 포성이 울렸다.
조국이 사라지고, 자신들이 버려진 땅에서 일해야 했던 그들의 정체성은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했을까? 그들은 머나먼 멕시코까지 와서, 돌아갈 조국조차 없어 표류하는 조선의 망명자가 되었다.
누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었을까. 조선인들은 쿠바 등지로 흩어지며 현지인과 결혼하였다. 희망을 심어 로프를 짜던 아니깽, 1,2 세는 한을 품고 선인장 그늘에 잠들었다. 쿠바로 아주 했던 애니깽은 일부 돌아와서 두 곳에는 현재 3만여 명의 한인 후손이 있다. 그들의 3세, 4세 후손들은 마른 뿌리를 축이며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소설가이자 역사학자인 이자경 작가는 이 잊힌 역사의 화석을 발견하고 유카탄으로 향했다. 그녀는 전화번호부의 한국 성씨들을 뒤쫓으며, 땅속에 묻힌 조상들의 목소리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조선인 이민자의 현주소는, 그녀의 펜 끝에서 다시 역사의 페이지로 불려 나왔다.
그녀는 1998년 《한인 멕시코 이민사》를 집필하여 학계의 찬사를 받았으며, 2005년에는 《한인 멕시코 100년 이민사》를 출간하여 멕시코 후손들의 손에도 안겨주었다. 1031명의 멕시코 이민자는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민 초기부터 친분이 있는 이자경작가의 10여 년에 걸친 끈질긴 추적과 열정을 지켜보았다.
멕시코 이민자들의 타지에서의 애환이 세상에 밝혀지게 된 이 가슴 시린 역사는, 김영하 작가의 소설 《검은손》을 통해 한국 사회에도 충격을 주었으리라. 소설은 작가에게 동인 문학상을 안겨 주었다.
멕시코 메리다에는 [한인 이민사 박물관]이 세워졌다. 1905년 제물포에서 출발해 메리다 항구로 도착한 멕시코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의 역사가 담긴 사진, 기록물,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사와 더불어, 멕시코의 헤네켄 이민사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증거로 역사에 새겨지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며, 굳건한 유산
동문이라는 인연이 우리를 하나의 끈으로 이어주었고, 함께 웃고 노래하며 나눈 우정은 타향의 고독을 씻어주는 따뜻한 위안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금 ‘이민자’라는 이름의 무게를 떠올렸다.
백이십여 년 전, 선조들이 채찍 아래에서 헤네켄을 베던 그 땅을 밟으며 느낀 감정은 울컥했다. 계약이 끝나도 돌아갈 조국이 없었던 그들의 절망이, 유카탄의 뜨거운 바람 속에 서려 있었다.
이제는 그 땅에도 [한인 이민사 박물관]이 세워지고, 애니깽의 이름이 잊히지 않게 되었다.
미주에서 반세기를 살아온 나에게 이번 여정은 이민자의 뿌리를 되돌아보는 깊은 통찰의 시간이 되었다. 내가 이민을 왔을 땐 이민자에게 조국은 있으나 코리아를 아는 미국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소외감은 컸다. 멕시코 이민자들은 그 보다 반세기 이전에 이민 와서 노예 취급을 받았다. 그들이 느꼈을 절망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릿하다.
떠나온 땅은 멀어도, 가슴속의 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자랑스러운 뿌리가, 세대를 잇는 가장 굳건한 유산으로 남아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의 후손들도 세계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랑스러운 조국이 있음에 자부심과 깊은 감사가 같이하리라.